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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고창군

고창...운선암 석불입상.마애여래 입상.좌상

by 임병기(선과) 2019.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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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인연 짓지 못한 님들을 뵙기위해 다시 찾았습니다.

초입에 설치되었던 차단막은 철거되었으며, 무엇 보다도 반갑게 맞이해 준 스님의 따뜻한 마음을 평생 잊지 못 할듯 합니다

아래 옛글로 대신 합니다.


운선암

태고종소속 사찰로 창건 시대는 전하지 않으나, 경내의 마애여래입상,좌상을 통해 고려시대에 향화를 피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100여년전 정주원이 미륵불을 모시기위해 사찰을 세웠으으나 한국전쟁시 불탔고 1953년 법당과 요사를 세웠다고 합니다. 지금은 주지스님의 원력으로 변모중인 모습이 순례객을 흐뭇하게 하였습니다.

 

 

임시 요사채 맞은편 배롱나무와 각자


 

초산처사정공계원유허草山處士鄭公季源遺墟.

숭정오 정묘 2월 일 완산 최전구 서 崇禎五 丁卯 二月 日 完山 崔銓九 書

1927년


글을 쓴 최전구는 독립투자와 동일인인지 궁금합니다.


최전구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우서(禹敍)로 고창군 성송면 학천리 169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이에 분격하였고, 이듬해 고창군 부안면 조양리(朝陽里: 현재의 운양리(雲陽里) 출신 신종주(愼宗周 1864 고종 1∼1936)와 함께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 ~ 1906)이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가담하였다.

최익현의병대가 순창에서 패전한 뒤 최익현과 함께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도 일본에 대하여 항거를 계속하였고, 1910년 왜적의 침략행위를 십대죄목(十大罪目)으로 성토하다가 붙잡혀 욕지도(欲知島)에 1년간 유배되었다. 
 
이후에도 1911년 동지를 규합하여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다가, 1917년 12월 붙잡혀 다시 영종도(永宗島)에 유배되었다. 1918년 고종이 승하하자 단식 투쟁을 하는 등 10차례 구속과 2차례의 유폐를 격다가 독선재에서 생을 마감했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돌확

 


석조부재

 


석탑 탑신석

 


우주를 모각하였습니다.

 

 


다른 부재의 용도는 훼손이 심하여 분명하지 않습니다. 

 

 


석가여래 삼존

 

 

소조여래삼존좌상. 조선후기(?)

 


석가(아미타?)

 


관음

 


지장보살

지장보살의 의자상은 처음 접한 것 같습니다.

 

 

칠성도 七星圖

정해 3월 일 丁亥 三月 일
1947년으로 추정

 

 


석불입상

옆에 미륵불을 새롭게 모셨습니다.

 


석불입상

(옛글 참조)

 

 

 

 

 

마애여래 입상

 

 


마애여래입상

(옛글 참조)

 

 

 

 

 

 

 

 


마애여래입상 옆 바위

무엇인가 명문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마애여래좌상

일로당 옆 큰 바위 측면에 새겼습니다.

예전 답사에서 인연 짓지 못한 님입니다.


 

연화대좌 위에 선각으로 조성하였으며, 결가부좌입니다

(여러자료에 의자좌로 설명하고 있지만 오류입니다)


두광과 신광을 표현하였고, 일반적으로 선각여래상은 상호부분은 약간의 볼륨감을 표현하지만 이 마애불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려 중기 이전 불상으로 추정합니다.



연화좌 아래는 연줄기의 표현?

 


둥근 상호. 백호공이 뚜렷하게 남아 있으며, 소발에 육계를 표현했습니다.

특이하게도 발제선을 이중으로 표현하여 마치 두건을 쓴 모습으로 보입니다.

삼도가 뚜렷하고 법의는 우견편단 처럼 여겨지며, 수인은 육안으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푹푹 찌는 날씨

스님은 저를 보자마자 부르시더니  시원한 물을 건내시며, 큰 복숭아를 건내주었습니다.

참배 후

돌아가겠다고 인사를 드렸더니  먹거리를 한 보따리 가지고 오셨습니다.

더운 여름에 순례길 허기지면 안 된다고....


스님

무탈하게 귀가하였습니다.


고창을 지나면 꼭 다시 들려 인사 올리겠습니다.


()()()

 

 

20`9.08.16

아래는

2009년 글

 

 

절집 입구에 출입금지 라는 푯말이 눈에 거슬렸다. 무슨 사연이 분명 있는 모양이다. 요란한 불사가 진행중인지, 마친 것인지 묘한 분위기의 절집에는 여름마져 지친 표정이다. 짊어지고 가도 모를 듯한 적막감이 불안감으로 엄습해온다. 스님은 여름 한낮 근처 밭에 운력 나갔을까?  

 

 

무거운 절집 문위기를 애써 피하여 마애불 뵈러 가는 계단 입구에 빈 절집을 지키는 보살 입상이 반긴다. 뽀얀 화강암 재질의 불상은 땅속에 묻혔던 흔적이 뚜렷하다. 망실된 대좌 때문인지 하반신 처리가 미흡하며, 통견의 법의, 수인은 시무외인 여원인이다. 삼도는 희미하며, 오막조막한 고운 얼굴, 귀를 높이 새겨 짧게 보인다.

 

마애여래좌상...문화재청

 

멍청한 중생. 운선암에서 뵙지 못한 마애여래좌상이다. 무엇에 홀렸을까? 균열된 바위에 선각으로 새겨진 마애야래좌상으로 고려시대에 조성된 불상으로 추정한다. 법당내에도 조선시대에 조성된 석조불상이 봉안되어 있으니 우리님들은 꼭 뵙길 바란다.

 

"좌상은 좌대에서 불신, 광배에 이르기까지 모두 얕은 선각으로 이루어졌는데, 바위 아래에서 솟아오르는 연꽃 대좌 위에 커다란 신광과 두광을 지니고 결가부좌한 모습이다. 소발의 머리에 육계가 높게 솟아있으며 얼굴은 이마부분이 넓고 턱부분이 다소 갸름한 모습이지만 이목구비가 거의 마멸되어 형태를 알 수 없고 목은 짧은편으로 삼도가 새겨졌다." ...문화재청

 

 

계단을 100여M 오르면 큰 바위면에 고부조로 새긴 마애여래 입상이 보인다.  입상은 오른손에 보주형의 문양이 새겨져 있어 약사불로 추정된다. 가슴을 가린 왼손은 전설과 어울린다.

 

 

소발의 머리, 갸름한 얼굴, 백호공,  코는 민초들에게 내어 주었고, 작은 입은 말을 속으로 삼키고 있는 모습이다. 동행한 님은 수심이 있는 여승의 얼굴이라고 말했다. 그님의 말은 안내문의 마애불 전설을 읽는 순간 놀랄 정도로 정확했다. 마애불에서 그런 표정을 읽어 내는 능력이 한없이 부러울 뿐이다. 

 

하체는 입체감이 적고 형식적인 선으로 처리되어 있다. 두광은 엷게 보이지만  신광은 희미하다.

 

 

 

연꽃 대좌, 두발은 양쪽으로 가지런하다

 

 

마애여래입상에 전해오는 달빛에 젖은 이야기를 다음에서 옮겨 왔다. 

 

옛날 그 마을에는 아리따운 한 규수가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가 몹시 편찮으셨다.  규수는 아버지의 병환이 완쾌되길 기도하기 위하여 운선암에 100일 기도를 가게되었다. 매일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법당에 들어가 108배를 하고 밥을짓고 절의 일을 도우면서 지내던 어느 날 그 절에 지나가던 떠돌이가 오게되었다.

 

절에서 머물며 산에서 나무를 해오고 마당을 쓰는 절의 잡일을 맡아서 하며 주지스님을 시봉 하면서 잠시 머물게 된 것이다. 그 여인은 매일같이 새벽에 일어나 목욕을 하고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 앞에서 불공을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 절에 스님도 다른 사찰에 일이 있어 절에는 아무도 없게 되었다.

 

여느 때와 같이 새벽녘에 나무를 하기 위해 일찍 일어난 손님은 물소리를 듣게 되었다. 물론 그 물소리는 여인이 목욕을 하고 있는 소리였다. 그가 항상 나무를 하러 갈 때마다 목욕하던 그 여자를 유심히 지켜보던 사내는 절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고 소리가 나는 곳으로 점점 다가가 보았다. 여인은 한참 목욕을 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사람의 인기척을 느낄 수가 없었고 그 사내는 발걸음을 죽이며 조심스럽게 여인의 뒤로 다가가서 그 여인의 가슴을 더듬었다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스님은 절로 다시 돌아왔지만 이미 사내는 절에서 도망을 갔다. 그 여인은 전부터 정혼자가 있는 상태였는데..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결국은 100일기도를 마치지 못하였다.그 후에도 여인은 그 날의 일로 어찌할 줄 모르다가 원통해 자신의 가슴을 칼로 도려내고 죽었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듣게된 주지스님은 자초지종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 주지스님은 그 여인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서 절의 뒤편 큰 바위에 그 여인상을 조각했는데 조각을 다 완성시키자 갑자기 하늘에 구름이 끼더니 천둥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벼락이 조각의 한쪽 가슴에서 떨어져 그때부터 조각에서는 피가 흘렀다는 것이다. 그 여인의 이름이 양춘이라 해서 그 바위를 양춘바위라 부르기도 하고 각시바위라 부르기도 한다. 지금도 그 여인상의 상처 난 가슴에서는 피가 흐른 자국처럼 붉은 물이 어려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고 한다. 사람들이 헝겊으로 정성껏 문지르고 닦아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언제나 똑같이 붉은 핏물 자국은 항상 그 형태 그대로 남아있다.

 

2009.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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