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공주시

공주...계룡산 동학사

임병기(선과) 2019. 8. 7.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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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사

남매탑 답사 후 부도전의 각각의 부도 사진을찍기 위해 다시 찾았습니니다.

일주문 현판은 여초如初 김응현의 작품으로 무인戊辰년은 1998으로 추정 됩니다.


 

마애비

일주문 못 미쳐 위치.

우리에게 드라마로 널리 알려진 공주 갑부 김갑순의 마애비


行 公州郡守 金 公 甲淳 不忘碑(행 공주군수 김 공 갑순 불망비)

1906년에 새긴 것으로 추정.


김갑순은 친일파로 대전, 공주 인근에 많은 부동산을 소유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모르긴해도, 그가 동학사 중창시에 시주를 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대웅전

현판은 일중 김충현의 1980년작품

 

 

목조삼존불

2010년 8월 개금 불사 중에 복장물이 발견되었습니다. 복장유물은 조성발원문, 개금중수발원문, 개금불사원문을 비롯해 후령통(喉鈴筒)과 사경(寫經), 각종 경전류와 갓 끈, 거울 등 78건 136점이며, 불상조성발원문을 통해 1606년 음력 3월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불, 약사불, 아미타불로 구성된 삼세불상(三世佛像) 3구와 그 내부에서 나온 복장물로 이루어져 있다. 복장물 가운데 불상조성발원문은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충청남도 공주 계룡산의 청림사(靑林寺) 대웅전에 봉안되었던 불상으로 밝혀졌다. 불상 제작시기는 1605년 음력 10월 대웅전의 석가모니불, 약사불, 아미타불과 극락전 아미타불 등 4구를 조성하기 시작하여 1606년 음력 3월에 완성되었다. 또한 중수개금발원문을 통해서 1883년에는 동학사 대웅전에서 삼세불상의 개금 중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어 1883년 이전에 청림사에서 인근에 위치한 동학사(東鶴寺)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복장유물 중 다른 불상 복장물과 비교되는 것은 일부가 잘려진 남자 갓끈과 작은 손잡이 거울이고, 가장 많은 수량의 경전류는 모두 93권 55책으로 고려 말부터 조선전기에 간행된 불서들이다. 고려 말과 조선 초에 베껴 쓴 것으로 추정되는 『묘법연화경』 권4, ‘대공덕주(大功德主) 효녕대군(孝寧大君)’ 묵서가 적힌 『지장보살본원경』 권하 등이 주목되는 등 그 중요성이 평가되어 불교전적 중 8책은 별도로 보물 제1720호로 지정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은 앞으로 숙인 자세에 목과 상체가 긴 비례감, 넓은 무릎이 주는 균형감에서 조화가 돋보이며 위엄 있고 작은 얼굴 표현, 측면에서 느껴지는 마른 체형과 간결한 옷주름 등이 특징인 작품이다. 세 구는 수인과 착의법에서만 조금 차이가 있을 뿐 그 특징이 비슷하며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이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모습을 하고 변형된 편단우견식(偏袒右肩式)의 대의(大衣)를 입었다.


아미타불은 오른손을 어깨 부위 정도로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설법인(說法印)을 하고 왼손은 왼쪽 무릎에 거의 닿을 정도로 둔 채 엄지와 중지를 맞대었으며 약사불은 왼손을 든 설법인 자세로 아미타불과 반대의 모습이다.


약사와 아미타불은 편삼(偏杉)을 입고 그 위에 대의를 걸쳤다. 이 불상은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에서 발견된 불상조성발원문에 불상을 만든 사람이 상화원(上畵員) 각민(覺民)이라고 승려 법명이 적혀 있다.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활동한 조각승 각민에 의해 제작된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으로 임진왜란 직후인 1606년에 조성된 불상이다. 임진왜란 직후인 17세기 초기에 제작된 불상 사례가 많지 않은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높다. 각민이 수화승으로 등장하는 유일한 현존 작품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현왕도 現王圖
1898년,

 

 

삼세불도(약사회상도) 三世佛圖(藥師會上圖)
1898년,대한광무2년 무술3월 22일

 

 

신중도 神衆圖
1898년,

 


삼층석탑

남매탑이 있는 청량사지에서 옮겨 온 석탑으로 전합니다.

남은 부재로 복원 하였으며, 기단부,3층 탑신,보주는 후보물 입니다.

기단갑석 굄의 연화문은 옛부재를 충실히 살린 것으로 흐뭇하기기 그지 없습니다.

 

 


기단부. 후보물

 


기단갑석. 옛부재

 

 


초층탑신석

일석이며 문비와 자물쇠를 새겼습니다.

 

 

전층 탑신석에는 우주를 모각

초층 옥개석과 이층 탑신석은 일석이며,

옥개석 낙수면 물매는 급하고, 층급받침은 전층 4단, 절수구를 표현하였습니다.

 


추녀를 음각으로 새겼습니다.

 


삼층 탑신석은 후보물

삼층옥개석과 노반석, 복발을 일석으로 조성 하였습니다.

보주는 후보물.

 

 

석탑이 소형화된 고려전기 석탑으로 추정됩니다.


 

발원문비

 

만萬

동방정기생불천方正氣生天 동방의 정기로 불천에 태어났으니

학혁원무제불하亦願舞諸下학또한 부처님 아래서 춤을 추려는 듯

사승심념통불령僧心念通靈 절 승도들의 마음 불령에 통하여

찰나견성성불지那見性成地 찰나간에 견성 성불하는 도량이어라

 

첫구절은 동학사찰東鶴鶴刹로 시작

여섯째 구는 불佛

 

여러자료에는

단기4292년(1959년).정오(正悟) 스님작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사진이 없으며, 저도 확인하지 못 했습니다.

 

(ㅇ)

(ㅇ)

(ㅇ)


정신통일(?) 精神統一 

일념견성(?) 一念見性

 

시주 施主

세명거사 김치홍  世明居士 金治洪

 

 

동학삼사

관련글은 아래 2007년 글로 대신 합니다.

 

 

인재문

 

 

숙모전.동무.서무

 

 

 

삼은각.동계사

 

 

숙모재

 


부도전

근세 동학사에 주석하셨던 큰 스님들의 부도를 새롭게 모셨습니다.

 


경허스님 부도


(경허 진영..서산 천장사)


경허鏡虛(1849~1912). 최인호의 소설 길없는 길을 통해서 우리 옆으로 돌아오신 대선사이다.

 

본관은 여산. 본명은 송동욱, 법호는 경허鏡虛, 법명은 성우惺牛. 아버지는 송두옥, 어머니는 밀양 박씨이다. 1849년(헌종 15)에 전주 자동리에서 출생,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9세 때  의왕시 청계사에서 주지 계허를 은사로 모시고 출가하였다.

 

1862년(철종 13)부터 한학을 배워 불교경론과 사서삼경 등을 익혔다. 계허가 환속하면서 경허는 계룡산 동학사의 만화화상에게 맡겨졌다. 이때부터 경허는 본격적으로 한학을 공부하여 불교의 일대시교뿐만 아니라 논어,맹자,시경,  같은 유학 경서와 노장사상까지 두루 섭렵하였다. 1871년(고종 8) 동학사의 강사로 추대되어 불교 경전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1879년(고종 16) 어느 날 옛 은사 계허를 만나기 위해 서울로 가던 중 심한 폭우를 만나 민가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려고 하였다. 하지만 마을에 돌림병이 들어 대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경허는 밤새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면서 생사불이生死不二’의 이치가 문장 속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경허는 그길로 동학사로 돌아가 학인들을 돌려보내고, 3개월 동안 참선과 정진을 하여 도를 깨쳤다.


얼마 후 거처를 지금의 충청남도 서산시 고북면 장요리에 있는 천장암으로 옮겨 수행을 계속하면서 만공,혜월,수월 스님을 지도하였다. 1886년(고종 23)에는 옷과 발우, 주장자 등을 불태우고 무애행을 나섰다. 이때부터 서산시 운산면 개심사와 부석면의 부석사를 오가며 후학을 양성하고 선풍을 크게 떨쳤다.

 

1899년에는 합천 해인사에 머물며 해인사 수선사 방함인海印寺修禪社蒡啣印과 합천군 가야산 해인사 수선사 창건기陜川郡伽倻山海印寺修禪社創建記를 집필하기도 하였다. 1904년 천장암으로 돌아간 경허는 만공에게 마지막 법문을 전하고 종적을 감추었다. 떠도는 이야기에 따르면 박난주로 개명한 뒤 갑산, 강계 등지에서 머리를 기르고 유관을 쓰고 다녔으며, 서당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았다고도 한다. 1912년 4월 새벽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하니 그의 나이 64세였다.

 

 

가선대부겸팔도총섭묘암당대사문찬세대유적비
嘉善大夫兼八道總攝妙巖堂大師文燦世代遺蹟碑

상좌 上佐

가선 각정 嘉善 覺정(車+丁)

가선 능규 嘉善 能圭

가선 사정 嘉善 思淨


후면

옹진2년 갑진 2월 甕正 二年 甲辰 二月 造成.

화주 통정 원민 혜심.일초 化主 通政 元敏.惠諶.一初

손상좌 해명 孫上佐 海明


1724년 동학사에는 원민,혜심.일초.해명스님이 계셨으며.

해명스님은 묘암당 문찬대사의 손상좌이고, 그이전에 동학사에 주석하였던 묘암당의 상좌는 각정.능규.사정 스님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동학사 부도전의 당호가 새겨지지 않은 부도의 주인공중에는 이 분 들도 있지 않을까요?

 

 

비구니원종헌답공덕비 比丘尼圓宗獻畓功悳碑.근세

 

 

나월당설민대사 懶月堂雪敏大師 부도

방형지대석. 팔각대좌.원구형 탑신.사모지붕.보주


대좌에 당호를 새겼으며, 상부에 복련을 조식하였습니다.

 

 


당호를 새긴 듯 한데.

 

 


추월당 秋月堂 부도

방형 지대석.복련이 조식된 원형 대좌에 탑신과 보주를 일석으로 새겼습니다.

 


육안으로 구분은 어렵지만

다음블로그 나물 먹고 물마시며의 무위당님은  "풍수지관이었던 인정스님이 신미해에 세운다"라는 명문 통하여 신미해를 묘암당 유적비(1,724년) 이전인  1691년 또는, 1631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1784년 화재로 동학사가 전소되어 사세가 어려워 중창주 월인,만화,만우 스님의 부도도 조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추론 하였습니다., 즉 17,84년 이후에는 부도를 세을 여력이 없었으며, 또한 왜소하게 조성한 묘암당 유적비의 편년(1,724년)을 기준으로 삼으면 동학사 부도전의 부도는 그이전에 조성한 부도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무위당님의 글은 불기 2543년 동학사에서 발행한 동학사 책에서 옮긴 듯 합니다.

 


화염보주 입니다.

 


 

고암당탄옥지 高岩堂坦玉之 부도

탑신과 보주를 일석으로 조성한 구형부도 입니다.

근세 부도를 세우기전에는 뒷줄 중앙에 자리하고 있어서 가장 오래된 부도가 아닐까라고 생각했습이다.

 

  


당호를 새기지 않은 부도

 


당호를 새기지 않은 부도

 


당호를 새기지 않은 부도

 

 

권명옥여사헌답공덕비 權明玉女史獻畓功德碑.근세

 


당호를 새기지 않은 부도

 


당호를 새기지 않은 부도

위에 언급한 무위당님은 현상태로는 판단이 모호하지만  이 부도를 1784년 대화재에 피해를 입은 부도의 상흔이 가장 많이 남아 있으며 전체 부도 편년의 기준이 된다고 하였다.

 

 

당호를 새기지 않은 부도



당호를 새기지 않은 부도

  


행장 쫒기에 실패했지만

그 과정이 즐겁기에 다시 또 시작해야겠습니다.

 

2019.07.31 

(위에 인용한 글 중에서 1784년 대화재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부도 를 기준으로 나머지 부도는 그 이전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후대에 조성한 부도로 추정되는 양식도 있습니다.. 다만 명확한 근거가 없기에 유보합니다.)

 

아래는

2007년 글 

  

 

봄. 올해도 여흥을 주체 못한다.

겸사겸사 떠남에 익숙해서인지  따뜻하게 챙겨주는 마누라 고운 손길에 코끝이 찡해온다.

그렇게 새벽을 달려 고요를 밟으며 동학사 일주문에 이른다. 청도 운문사. 수도산 청암사와 더불어 비구니 승가대학이 있어  산속 옹달샘처럼 마알간 느낌의 절집이다.


 

신라 성덕왕(724년)시 상원조사가 기거한 암자로 시작하여, 도선국사 중창 고려 태조 때는 원당으로 삼았으며 볼모로 잡힌 두왕자를 구한 신라 충신 박제상을 배향하는 동계사를 지었던 인연으로 동학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사적은 산위 남매탑으로 유추 가능하지만 멀리 막 잠에서 깨어난 부도는 조선시대 석종형처럼 보인다.


 

어느 절집이 정갈하지 않겠냐만은 비구니 주석 가람은 유난히 더 깨끗하다.

밟고 지나가기 겁 날 만큼 동학사 역시 그런 분위기지만  제사를 모시는 제향공간 때문에 정갈하고 엄숙하다.

그런 분위기를 망치는 대웅전 처마를 뒤집기 하려는 듯한 두 기의 큰 석등은 누구의 발원인지?

 

 

작은 중정을 안고 있는 대웅전. 협칸,어칸 꽃 창살이 매난국죽 사군자다. 어

칸 가운데 두짝부터 좌우대칭으로 매난국죽 순이며 좌우 마지막 문은 복을 염원하는 1월의 나무 소나무와 학이 새겨져 있다.

 

전각 내외벽에 사군자가 그려진 절집은 쉽게 만나지만, 창녕 관룡사 약사전 내부처럼 매난국죽이 순서대로 묘사된 경우는 흔치 않다. 

혹 유교의식으로 제를 모시는 공간이 세곳이나 모셔진 영향은 아닐까?


 

대웅전 앞 삼층석탑은 청량사지(계룡산 남매탑이 있는 곳)의 암자에서 옮겨온  탑으로, 1기단,   3층 몸돌은 멸실되었다.  

기단 옥개석은 완만하게 경사를 이루었고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을 얕게 새겼다. 지붕돌 받침은 5개, 초층 몸돌에는 문비가 보인다. 여러 기법으로 미루어 고려시대 탑으로 생각된다.


 

동학사에는 다른 사찰과 달리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홍살문을 중심으로 3개의 전각이 있으며, 전각은 신라, 고려, 조선의 충신들을 추모하여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동계사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충신 박제상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고려개국공신 유차달이 고려태조의 원당인 동학사를 유람하던 중 사중에 모셔진 박혁거세 및 박제상의 영정을 보고 박제상의 충열을 사모하여 경내에 ‘東鶴祠’라는 사당을 창건했다고 한다.

 

삼은각은 고려말 이성계에 저항 죽은 포은 정몽주와 목은 이색, 야은 길재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초혼제를 지낸 단에 세운 각으로 현재 삼은각에는 3분이외에 금알 유방택, 도은 이숭인, 죽헌 나계종 위패가 모셔져있다고 한다.

 

숙모전은 단종과 사육신 등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면서 원통하게 희생된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세조의 명으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세조는 동학사에 왔다가 삼은각 옆에 품자의 단을 보고 무슨 단이냐고 물었습니다. 김시습이 단종과 사육신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초혼재를 지낸 단이라는 설명은 들은 세조는, 원통하게 죽은 280여명의 이름을 비단에 써서 주며 토지를 내리면서 초혼각을 건립하라고 명하면서 매년 제사를 지내도록 했습니다. 또 세조는 사찰의 이름도 동학사란 이름을 내렸다고 합니다. 당시 세조가 서서 울었다는 바위(자작바위)가 동학사 입구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 내력을 알고 있는지?

채 서리가 녹지 않은 건너편 개울 건너에는 어처구니가 없는 맷돌이 사당을 지켜보고 있다.

세상 인연을 땅,물, 불, 바람에 넘기고 고해를 건너간 납자를 그리워하며...

 

 

2007.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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