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공주시

공주...계룡산 신원사

임병기(선과) 2019. 8. 8. 0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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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들린지가 2007년 이었습니다.

대웅전을 비롯 모든 전각에서 사시예불을 올리고 있어 내부 참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옛인연으로 간직하라는 뜻 일까요?

 

여느 사찰처럼

불사가 진행되어 새로운 분위기 었습니다.

 

뽀얗게 변신한 오층석탑

하지만

중악단은 옛모습 그대로 이었지만 예불이 진행중이어서 참배를 올리지 못하고

오늘

답사의 목적인 부도전으로 발길 옮겼습니다.

 

석탑과 부도전을 제외하고는 옛글로 대신 합니다.

 

 

중악단

 

 

 

 

 

오층석탑

4층 탑신. 옥개석, 상륜부가 망실되었습니다.

고려전기 석탑으로 전합니다.

 

 

 

 

지대석

4매석으로 조성

 

하층기단

저석, 중석, 갑석을 별도로 조성

2구의 안상을 조식한 중석은 감입식 결구, 탱주 1주, 우주를 모각하였습니다.

2매로 조합한 갑석에는 약간의 물매가 있고, 상부에 각호각 3단 괴임을 조출하였습니다.

중앙 호형 굄이 상하 각형보다 매우 넓습니다.

 

 

하층기단 중석 안상

 

 

상층기단

중석은 감입식 결구, 탱주 1주, 우주를 모각

상부에는 하층기단 굄과 동일하게 구성하였으며, 부연을 생략했습니다.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한 개 부재

전층 양우주를 모각하였고, 초층 탑신에 비해 상층의 체감히 급격 합니다.

 

옥개석

층급은

전층 4단, 절수구를 새겼고, 음각으로 추녀를 표현했습니다.

낙수면 물매는 급하나 현수곡선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상부에는 1단 굄을 조출했습니다.

 

 

옥개석 낙수면

 

 

옥개석.

절수구와 음각 추녀

 

 

4층 탑신석(5층 탑신석)

대부분 자료에는 5층 탑신석과 옥개석이 망실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 사진에 보이듯이 4층 옥개석의 비례가 맞지 않습니다.

즉,현재 4층 탑신석은 5층 탑신석입니다.

따라서

신원사 석탑에서 망실된 부재는 4층 탑신석과 옥개석입니다.

 

 

1975년 12월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1층 탑신 사리공에서 사리구를 비롯, 개원통보(開元通寶), 함원통보, 황송통보 및 황유주자, 녹색 유리 긴 사리병 등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부도전

신원사와 다소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조선후기 부도 8기가 모셔져 있습니다.

 

예전 답사에서 놓쳤는데

먼저 다녀온 우리카페 시니브로님의 포스팅 덕분에 일사천리로 뵈었습니다.

 


기단부는 다른 부도재로 추정됩니다.

탑신과 상륜부가 일석이며, 둥글고 높은 보주 받침이 이채롭습니다.

 

 

등개(등계)백곡당탑 登皆(登階)白谷堂塔

옆에 떨어진 옥개석이 본래 부재일까요?


자연 암반을 하대석으로 삼고 앙련의 상대석 위에 탑신석을 올렸습니다.

중대석 하부에는 2단 굄을 선각으로 표현하였으며, 당호를 새겼습니다.

 


옥개석

 


등개登皆?

등계登階?


안타깝습니다.

 


백곡당白谷堂

 

 

대각등계백곡집 (大覺登階白谷集)

 

처 능 處能(1617-1680)

12세에 의현義賢에게 글을 배우다가 출가를 결심하여 15세에 승려가 되었고 부휴선수浮休善修의 법을 이은 쌍계사의 벽암각성碧巖覺性에게 찾아가 23년간 수학하여 그 법을 전수 받았다. 신익성申翊聖에게 역사와 제자 시문을 배웠고 정두경 등 당시 일류 문사들과 친교를 가졌던만큼 문장과 시문에 능했고 유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1674년 팔도선교십육종도총섭八道禪敎十六宗都摠攝이 되었으나 곧 사퇴하고 대둔사 안심암에 주로 머물면서 법회와 수행에 전념하였다. 저술로는 ≪대각등계백곡집≫ 2권과 임성당대사행장<任性堂大師行狀> 1권이 있으며 특히 척불斥佛에 대해 간쟁한 상소인 간페석교소<諫廢釋敎疏>는 유명하다.


간페석교소(諫廢釋敎疏)

"1661년(현종 2)경 조선 중기의 승려 처능(處能)이 현종의 척불책이 부당하다는 것을 간하기 위해 올린 상소문.

조선시대 상소문 중에서 가장 긴 것으로, 8,000여 자에 달한다. 현종은 1660년에 양민이 승려가 되는 것을 금하고, 승려가 된 자를 환속시켰으며, 이를 어긴 자를 죄로 다스리도록 하였다. 또한, 1661년 정월에는 성안의 비구니 사찰인 자수원(慈壽院)과 인수원(仁壽院)을 없애고, 40세 이하의 여승은 모두 환속시켜 결혼하게 하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성밖으로 내쫓았다. 그리고 봉은사(奉恩寺)와 자수원에 봉안했던 열성위패(列聖位牌)를 땅에 묻고, 봉은사 및 봉선사(奉先寺)까지도 철폐하려 하였다. 이와 같은 현종의 폐불조치에 대하여 그 부당함을 간하기 위하여 상소문을 쓰게 되었다.


그 내용은 먼저 국왕이 폐불을 행하려는 근거로 ① 불교가 이방의 것이고, ② 상고의 법이 아니며, ③ 윤회를 설하고, ④ 정치를 혼란시키며, ⑤ 승려가 용역을 피하는 것 등을 열거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폐불하는 것이 합당하지 못한 까닭을 조목조목 들어서 논파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 역대의 왕과 대신들 중에서 불교를 신봉했던 이들을 열거하고, 폐불의 군신(君臣)은 몇 사람에 불과하였음을 말한 뒤, 중국의 유명한 유학자들 중에서 불교를 믿었던 예를 들었다. 다음으로 우리의 역사를 언급, 삼국시대에는 불교를 숭앙하여 나라를 흥하게 했고, 고려시대에는 불교를 크게 숭배하였다는 것을 예로 들어 불교가 나라를 다스림에 해롭지 않음을 역설하였다.

또한, 태조 이래 조선의 역대 왕들이 숭불하고 폐불하지 않았음을 열거하였고, 불교의 사찰이 국가의 흥망에 비보가 된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역대의 모든 왕 및 왕후가 자수사와 인수사를 내원당(內願堂)으로, 봉은사와 봉선사를 외원당(外願堂)으로 삼았는데 하루아침에 이 절들을 없애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역설하였다. 상소문의 영향으로 봉선사와 봉은사는 철폐를 면할 수 있었다. 『백곡집(白谷集)』 후권에 수록되어 있으며, 조선시대 불교사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제 금산사 부도전


처능은 김제 금산사에서 입적하였으며, 부도전에 부도가 전합니다.

완주 안심사 사적비


또한 처능대사가 완주 안심사 주지로 재임중에 세운 사적비의 비문이 전합니다.

조선 영조 35년(1759)에 세운 비로, 비문은 그보다 100년전 즈음인 효종 9년(1658) 이 절의 주지였던 처능의 부탁으로 우의정 김석주가 지은 것이다. 글씨는 비를 세울 당시 이조판서를 지내던 홍계희가 썼다고 합니다.
처능의 인맥을 미루어 짐작 가능합니다.
 

아~!

개인적으로는 동일인물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등계登階(백곡집)와 등개登皆(한국사찰정문화재.언덕 부 阝가 누락된 것으로 추정)가 서로 상이하여 확신이 들지 않습니다.

다음에 다녀오실 분은 꼭 부도 당호를을 확인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당호를 새기지 않았습니다.

자연석 위에 팔각 기단부, 탑신석,옥개석,상륜부를 올렸습니다.

 


당호가 알려지지 않은 부도

자연 암반,팔각 기단 위에 탑신과 보주를 일석으로 조성

 


당호 처럼 보입니다.

 

 

추월당보수탑 秋月堂寶修 부도

한국사창문화재에는 추일당秋日堂으로 기록하였습니다.


복련이 조식된 방형 대좌

상대석.중대석.탑신석.보주를 일석으로 조성한 원구형부도 입이다.

이런 작례는 기억 나지 않습니다.


중대석에 당호를 새겼습니다.


계룡산 동학사 부도전에도 추월당秋月堂 부도가 전하지만, 동일인물 여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지대석

 


중대석 명문

추월당秋月堂

 


중대석 명문

보수 寶修

 

 

 

금파당 金波堂 부도

팔각하대석은 중석과 복련이 조식된 갑석이 일석

탑신석과 앙련이 조식된 상대석, 상륜부가 일석으로 조성된 흔치 않은 작례입니다.

탑신석 상부에는 연줄기,연잎,간엽이 새겨져 있고,연화보주를 표현 했습니다.


저는

당호를 확인하지 못했으며, 한국의 사찰문화재에는 금파당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 묻힌 팔각 하대석 중석에 새겨진 것 같습니다.

 


팔각하대석 

 


상대석.탑신.상륜

 

 

보주와 부도 상부


 


기단부는 매몰

탑신은 세장하며, 상부에 복련을 길게 새겼습니다.

보주는 일석으며, 당호가 전하지 않습니다.

 


당호가 전하지 않으며

원구형 부도로 옥개석은 사모지붕 입니다.

기단부가 탑신과 비례가 맞지 않습니다.

 


부도전

등계백곡 스님으로 밝혀지면 불교계의 적지 않은 파장이 예상 될 것이라는...

저는

그런 꿈을 꾸는 덜 떨어진 답사객 입니다.


2019.07.31 

아래는

2007년 글 

 

 

천왕문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 신원사는 백제 의자왕 12년(652년)에 열반종의 개종조인 보덕(普德)선사가 창건하여  중수와 중건을 거치다가 조선 고종 13년(1876년)에 보련화상이 중건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고종 16년(1879년)에는 신원사 동쪽에 중악단을 조영하였으며, 고종 22년(1885년)에는 관찰사 심상훈이 중수하면서 ‘신원사(新元寺)’라는 현판을 걸게 됨으로서 현재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신원사(新元寺)는 신원사(新院寺) 또는 신정사(神正寺)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주로 신원사(新院寺)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귀신의 집이라는 의미를 지닌 것이라고 한다. 이로써 신원사가 계룡산신과 깊은 관련을 지닌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사하촌이 온전하리라는 기대와 달리 이곳 역시 시골 순박한 아줌마 얼굴에 화장을 덧칠한 모습이다. 사찰에서 처음 얼굴을 마주하는 천왕문도 물건을 구입하면 손해볼 것 같은 가게 주인장의 모습이라면 건방의 극치인가?


대웅전

 

겉모습이야 그러했지만 기단이 눈을 사로잡는 대웅전. 봄눈 녹듯이 사르르 얽힌 심사가 녹아내린다. 기단에 꽃이라도 만발하고, 우측 정원에 배롱나무꽃 만개한다면 벽면 십우도는 필요할까나? 충청지방의 특색인지 처마선 곡선 처짐이 영남지방보다 깊어 보이는 대웅전은 겹처마 팔작 지붕이다.

 

또한 대웅전은 정,측면 3칸* 3칸의 다포식이며 어칸에 사분합 빗살문을, 협칸에 사분합 띠살문을 달았고 문위에는 우물 정(井)자 창을 내었다.

 

삼존불

 

어라? 분명 삼존불을 뵈었는데..., 한분 보살님은 사진 촬영이 부담스러워 기둥뒤로 숨었는가 보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대웅전 현판과 달리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대세지 관음보살을 뵌 듯한데 숨박꼭질하시는 보살님은 관음보살?



 영원전

 

공부는 배워도 배워도 끝없다는 사실을 깨닫게한 영원전. 대웅전에서 바라본 영원전이 사람을 끌어 당기지 않나요?

저렇게 나를 부르는 전각에는 어느님이 좌정하고 계실까?

 

달려갔더니 어렵소?

지장보살 무독귀대왕 도명존자 시왕이 시립해있는 명부전이다. 

지장전.명부전. 시왕전. 영원전(靈源殿)이 지장보살을 주존인 전각이라고 희미하게 알고 있었지만 눈으로는 처음 보았다.

영혼을 근원으로 돌아가도록 기원하는 전각이라는 의미일테고....

 

중악단 솟을삼문

 

신원사는 크게 대웅전 영역과 중악단 영역으로 대별된다.

대가집을 방불케하는 솟을대문 멀리 중문과 중악단이 보인다.

대문간채, 중문간채, 중악단을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배치하였다.

 

중악단은 신라시대로 부터 산신제를 올리던 제의 공간이었다고 한다.

즉 신라오악은 북 태백산, 남,지리산, 동 토함산, 서 계룡산, 중 팔공산을 말한다.

 

홍살문

 

신성공간임을 상징하는 홍살문이다.


 

사찰 금강문을 수호하는 금강역사처럼 좌우에는 솟을문과 중문에 네분의 신장상이 시립하여 사악한 무리를 검문하고 있다.


 

어떤 자료에는 변형된 사천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중악단 배치가 유교.불교, 궁궐 전각이 혼합된 사례로 판단  때문인 것 같다.

 

중악단

 

무학대사의 꿈에 산신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태조 3년(1394)에 처음 제사를 지냈다고 전하며, 효종 2년(1651)에 제단이 폐지되었다.

그 후 고종 16년(1879)에 명성황후의 명으로 다시 짓고 중악단이라 하였다. 중악단의 현판은 조선 후기 문신 이중하(1846~1917)가 쓴 것이라고 한다.

 

높은 돌기단 위에 3칸* 3칸 규모에 팔작지붕이고  다포 양식인데,  화려하고 위엄있게 하였다.

중앙에 보이는 길은 신도(神道)로 신이 다니는 길이다.

그럼 제를 주관하는 고승과 고위관료는 어느길로 출입했을까? 

 

중악단 담장

 

중악단을 어우르는 담장. 화려한 암키와 단장은  장식성과 장엄성과 더불어 수(壽)·복(福)·강(康)·녕(寧)·길(吉)·희(喜)를 새겨 황실의 복과 번영을 기원했다.


추녀마루 잡상

 

지붕 위에는 잡상을 모셔 주야장장 잡귀의 침입을 경계하고 있다.

잡상은 궁궐과 부속 건물, 도성 문루에만 배치하는 유형으로 중악단도 왕실 지원하에 조성되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산신

 

무심코 문을 열었더니 한 여인이 소리내어 울고 있었다. 산신전에 울고 있던 그녀는 무녀인가?

 

내부에는 계룡산신의 신위와 영정을 모셔 두었다.

조선 태조 때는 지리산 상악단, 묘향산 하악단과 더불어 산신을 모셨으나 현재에는 계룡산 중악단에서만 자취를 찾을 수 있다.

 

오층탑

 

중악단에서 절밖으로 나오면 보이는 오층탑은  현재 4층 옥개석까지만 남아 있다. 지대석을 4매로 구성하여 상하기단을 쌓았다.지붕돌 층급은 3단으로 전형에서 약화된 모습이며 반전은 미미하다. 

 

1975년 12월에 해체∙복원공사를 실시하였는데 해체 당시 1층 탑신의 사리공에서 외호(外壺)와 내호(內壺)로 구성된 사리구를 비롯하여 개원통보, 함원통보, 황송통보, 손잡이와 주둥이가 결실된 자기 주전자와 녹색 유리제의 목이 긴 병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하기단에는 두 개의 안상을 새겼으며, 상기단에는 양우주와 한 개 탱주가 모각되어 있다.



중악단과 오층탑

 

"역사상 최고의 여걸인 명성황후는 다 스러져가는 조선왕조의 운명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려 하였다. 제국주의 열강들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각축을 벌이는 와중에서, 그녀는 특히 고유의 산신들에게 의탁해 외세를 물리치려는 정성을 보였다.

 

이를 두고 명성황후를 마치 무당의 대장쯤으로 격하시키는 것은 역사의식이 없는 이들의 잘못이다. 신원사 중악단은 건축적 개성도 뛰어나지만, 이 나라 왕비의 애절한 염원이 스며있는 기념물이기도 하다"...김봉렬 교수(눈첩처마 방 124번 참조)

 

2007.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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