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답사기 말미에 만산홍엽의 만추에 다시 찾고 싶다고 했는데 15년 만에 다시 들렀습니다. 최고 이었던 진입공간, 녹슨 철계단 아래로 떨어지던 폭포수는 이제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나마 두 분 처사님의 친절한 마음 이 이른 아침 찾아 든 객의 심사를 달래주었습니다.
아래는 2004년 글 입니다.
화암사! 삼계탕에 대추를 넣는 이유가 삼이 가진독성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는데,이곳의 대추와 삼은 나란히 공생하며 상생하는 것은 왠 까닭이란 말인가? 산죽의 속삭임과,신록의 재잘거림이 들릴 뿐 개울물마져 소리없이 흘러내린다. 길이 개울이고 개울이 길인 화암사 가는 길에 욕심에 찬 나의 발걸음이 소음으로,사치로 들릴즈음 끊어질 듯 이어지는 산길 위로 나직히 물소리를 내는 폭포가 흘러내리고 그위로 걸쳐진 녹슬은 철제계단이 절집이 가까워 졌음을 알린다. 입춘대길이라도 붙여졌을 것 같은 대문에는 삐뚤삐뚤한 한글로 시주자의 이름이 있지만 거부감마져 사라진 것은 바로 눈에 들어오는 화암사 중정이 주는 아늑함 때문이리라.
입구에는 대형버스 여러대의 주차 공간이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20분 미만 호젓한 산길을 벗 삼으면 됩니다.
옛길 옆으로 도보길이 생겼습니다. 들꽃의 이름표가 정겨움을 더 합니다.
부도전 옛길과 도보길이 합류하는 지점 나무 다리 좌측 산죽 속에 있습니다.
부도(1) 당호를 새기지 않았습니다. 복련의 하대석은 별석이며, 탑신 하부에 마치 상대석 처럼 앙련을 새기고, 보주를 일석으로 꾸몄습니다. 탑신 상부에는 앙련과 대칭으로 복련으로 장식하였으며, 2단 굄위에 연화보주를 올렸습니다.
주인공은 누구 일까요? 아래 부도(2)에서 추정 해보겠습니다. 요즘 제가 부도 주인공의 행장을 추적하는 일에 푹 빠져 있습니다.
덕운당德雲堂 거칠게 치석된 대좌 위에 두텁지 않고 길쭉한 탑신을 세우고 별석의 보주를 조성하였습니다. 탑신에는 당호를 음각하였고, 탑신 상부는 원으로 종견처럼 구획하였습니다. 상륜부는 결실되었고, 촉공(?)이 파손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일석으로 된 보주가 파손된 것으로도 보입니다)
덕운당德雲堂
덕운당德雲堂 화암사에 전하는 중창비문, 불화를 일차적으로 뒤졌습니다. 다행히 16나한도(아래 나한도 참조) 화기에 동일 당호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함풍팔년 무오 정월일( 咸豊八年 戊午 正月 日) 화암사 의상암 (花巖寺 義湘庵) 화주 덕운당 금O(化主 德雲堂 錦O) 1858년 화암사 의상암에 봉안된 16나한도의 화주승으로 참여하였으며, 이를 근거로 의상암에 주석하셨던 스님으로 생각됩니다. 동일 인물 여부는 불분명 합니다. 하지만 입구 주차장의 화암사 안내문에는 이 부도가 위치한 부근을 작은 절터로 명기 하였으며, 화암사 중창비문에도 의상암과 원효암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19세기 후반에 조성된 덕운당 부도와 더불어 부도(1)도 나한도에 등장하는 의상암에 주석하였던 스님중의 한 분의 부도는 아닐런지요?
늘 그러하듯 잠시 체온을 나누고 발걸음 옮겼습니다.
1572년 화암사 중창비에는 진입 동선을 더욱 실감나게 묘사하였습니다
계곡 입구에는 바위 절벽이 있는데 높이가 수십 길에 이르며, 많은 골짜기로 물이 흘러가며, 아래쪽 계곡 입구에는 폭포가 있고, 바위 벼랑 허리쯤에는 좁은 길이 있는데 넓이가 한사람 앉을 정도여서 여기를 통해 들어가면 이내 절의 넓은 골짜기가 나타나는데 말 1만 마리도 숨길 수 있다. 기괴한 바위와 고목들로 오목하고 깊지만 툭 틘 곳이다. 참으로 하늘이 땅에 은밀한 곳을 만들어 사람에게 주신 복된 땅인 것이다.
오붓했던 길 이제는 데크가 설치되어 참배객의 왕래는 쉽겠지만, 아쉬움도 없진 않습니다. 걷기를 즐기는 나이의 반증이겠지요.
여기도 폭포수가 떨어졌었는대.
한치 망설임 없이 우회를 택하였습니다.
여기 어디에 녹슨 철계단이 있었으며 발아래로 떨어지는 폭포수를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냥 기억 입니다.
계단 아래 폭포가 있었습니다. 철거된 녹슨 계단과 더불어 제 기억도 녹슨 줄 알았는데...
마지막 숨을 고르면
정겨운 길이 기다립니다.
화암사
화암사중창비문에 화암사명의 유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라북도 완주군 경천면(庚川面) 가천리(佳川里)의 화암사(花巖寺)를 중창하게 된 경위를 적은 비석. 신라(新羅)의 원효(元曉)․의상(義相) 두 조사(祖師)가 중국과 서역을 유람한 후, 이곳에 절을 지어 주석하면서 시작되었다. 절의 당주(堂主)인 수월관음(水月觀音)의 용모와 자태는 바로 의상대사의 영혼이 도솔천(兜率天)에서 노닐 때 수월관음의 참모습을 직접보고 만들어진 등신원불(等身願佛)이며, 절 동쪽 원효대(元曉臺)와 남쪽 의상암(義相庵)은 모두 두 조사(祖師)가 정신수양을 수양하던 곳이라 한다.
그 후 고려(高麗) 대덕(大德)년간(1297~1307년)에 화주(化主) 달생(達生)이 중창(重創)하였으며, 조선(朝鮮)에 들어와 중추원판사(中樞院判事)를 지낸 성달생(成達生, 1376~1444년)의 지원으로 승려 해총(海聰)․신해(信海)등이 주도적으로 중창하였고, 1489년(성종 20년) 을유(乙酉)에 용마루 기와와 마룻대 등과 부속 건물을 한번 더 중창하였다.
화암(花巖)이란 명칭의 유래는 의상대사가 서역을 유람할 때 단향목(檀香木)의 씨를 가져와 심었는데, 그 꽃이 예뻐 중국에까지 알려져 중국 황제가 사신을 파견하여 왕궁 안 정원에 옮겨 심게 했다는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출처/한국금석문종합영상시스템)
우화루
2004년 답사기 중에서
입춘대길이라도 붙여졌을 것 같은 대문에는 삐뚤삐뚤한 한글로 시주자의 이름이 있지만 거부감마져 사라진 것은 바로 눈에 들어오는 화암사 중정이 주는 아늑함 때문이리라."
2004년 글에서 "적묵당 툇마루에 앉아 ㅁ자형의 전각을 우러보니 극락전,적묵당,요사,우화루가 어깨를 맞대고 졸고있는 듯하며, 좁은 중정이 주는 편안함, 목어가 걸려있는 우화루의 마루가 안겨주는 친근함이 처음이면서도 전혀 낯설지 않는 까닭이겠지 . . . 다시 나와서 우화루 마루를 바라보면 중정이 결코 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우화루와 마당의 높이가 같아서 단절이 아닌 마당의 연장으로 보이는 까닭이다.밖을 향한 우화루의 판벽을 열어 보면 좁은 공간에서 넓은 자연공간을 극락전 뜰로 넉넉하게 가져 올 수 있을 것이니,우화루를 2층으로 하지 않은 도편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우화루 목어 예전에는 우화루에 들어 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금지입니다.
15년 면모는 일신되었지만 극락전 안 마루는 세월을 비켜간 듯 밟을 때마다 삐거덕삐거덕 옛 기억을 불러 옵니다. 2004년 글
극락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발췌 및 보완) "국보 제316호.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건물. 「화암사중창기」에 의하면,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생존하였던 무과 출신의 성달생(成達生)이 1425년(세종 7) 이 사찰을 중창하여 개채[改彩: 불상에 채색을 다시 함]하고 확장할 것을 기획하여 1429년에 마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극락전은 그 앞에 내정을 건너 남북축을 맞추어 마주보고 있는 우화루(雨花樓)와 같이 세워져 있는데 마당에서 75㎝ 높이의 잡석 기단 위에 자연석(自然石)의 덤벙주초를 놓고 그 위에 지름 약 60㎝되는 기둥을 밑에서부터 민흘림으로 세웠다. 내부는 내고주(內高柱) 없는 통간 대량(大樑)을 걸쳐 소박하고 작은 규모를 보이고 있다. 건물의 정면은 빗살문으로, 중앙간은 네짝분합 그리고 협간(夾間)은 세짝문으로 되어 있다. 또, 동서의 양쪽에는 앞쪽에 출입문을 한 짝씩 달고 나머지는 벽체로 되어 있으며, 후면 서쪽 협간 및 중앙간에는 다같이 문짝을 달았다. 건물 내부 중앙간 후측에는 아미타 삼존을 봉안하였고 그 위에 닫집을 올려놓았다. 단청은 내외부 모두 화려한 금모로단청(錦毛老丹靑: 부재의 양끝에 주된 단청을 하고 중간에 여러 가지 비단 무늬를 그린 단청) 단청을 하고 있으며, 가구는 다포계의 맞배집으로 창방은 전후면만 둘러져 있고 측면에는 툇보와 같이 고주에 연결되어 있다. 전면과 후면에는 평방 위에 포작(包作)을 배열하였는데, 외이출목 내삼출목으로 볼 수 있으나, 이 포작 위에는 덧서까래와 같은, 이른바 하앙(下昻)이 내부에서부터 길게 뻗어나와 있다.이러한 하앙구조는 우리 나라에 현존하는 건물로서는 단 하나뿐이다. 이 구조는 하앙부재를 지렛대와 같이 이용하여 외부 처마를 일반 구조보다 훨씬 길게 내밀 수 있어서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써 온 것으로 알려졌고, 중국이나 일본에는 이와 비슷한 구조의 실례가 많이 남아 있다. 1981년 이 건물 해체 보수 때 알려진 중앙부 종도리와 장여에 기록된 상량문에 의하면, 1605년(선조 38) 6월 초8일(萬曆 三十三年 乙巳六月 初八日)에 세워진 것으로 되어 있다. 1980년 6월 11일 보물 제663호로 지정되었으며, 2011년 11월 28일 보물 제663호에서 국보 제316호로 승격 고시되었다."
중앙 사분합 빗살문. 양협칸 3분합 빗살문
겹처마 하앙下昻 처마 무게를 받치는 부재를 바깥쪽에 하나 더 설치해 일반 건물보다 처마를 더 길게 내밀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극락전 현판. 주악비천상
극락전 후면
극락전 후면
후면 하앙 전면과 달리 뾰족합니다.
극락전 측면 방풍널을 달았습니다.
목조아미타삼존
아미타도.1858 화기를 확인하지 못 했습니다.
닫집
천정
나한도.1858년 함풍팔년 무오 정월일( 咸豊八年 戊午 正月 日) 화암사 의상암 (花巖寺 義湘庵) 화주 덕운당 금O(化主 德雲堂 錦O)
칠성도.1917 대정육년 정사(大正 六年 丁巳)
현왕도 1871 동치십년 신미(同治十年 辛未)
화암사 동종 임진왜란이전에 조성된 동종이 전화를 입어 광해군 재위 기간에 주조된 종으로 추정하는 자료와 공주 갑사 동종(1584년)과 유사하며 16세기 후반 종의 특징이 보이는 동종이라는 글이 보입니다. 천판에 단룡이 여의주를 물고 음통을 감고 있습니다. 상대위쪽에는 입상화문대가 있으며, 아래로 여의두문,연화문을 장식하였습니다 종신에는 유곽 4개, 구름위에 서서 석장을 지고 있는 지장보살 4구를 봉안하였습니다 유곽 아래에 "금철대시주 동철대시주 보시 공양주(金鐵大施主 銅鐵大施主 布施 供養主)”명문이 있으며, 하대에는 연화문과 덩굴문을 장식하였습니다.
음통.용뉴
입상화문대. 여의두문.연판문
유곽
지장보살
유곽
하대 연화문.덩굴문
불명당 극락전을 기준으로 좌측에 불명당 우측 적묵당. 맞은편 우화루가 ㅁ자 배치이며, 불명당 측면에는 명부전, 한 단 높은 측면에 철영당이 있습니다. 적묵당 뒤편에는 산신각과 요사 공양채를 배치하였습니다.
적묵당
명부전 옛 글에도 언급이 없으며, 이번에도 최근 전각인 줄 알 고 참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불경한 나의 심성을 깨우치듯 봉안된 조선 후기의 지장보살, 지장탱, 소조 시왕과 인연을 짓지 못했습니다.
산신각 옛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예전에는 장독대가 바로 옆에 있엇던 것 같고.
산신도
철영재啜英齋 독특한 전각 입니다. 2004년 들렸을때는 스님이 기거하신다고 하였는데, 안내문에 의하면 성삼문의 조부인 성달생(1376~1444)의 위패를 모신 전각입니다. 성달생은 전라도 관찰사겸 병마도절제사로 재직하였으며, 1425년 중창불사를 도왔다고 합니다. 편액에는 자하紫霞가 새겨져 있습니다. 조선 후기 서예가, 시,그림의 대가이며 추사와 막역했던 신위申緯(1769~1847의 작품)일까요? 철영啜英 함부로 입을 놀리지마라는 의미라고 하는데, 스님의 수행처 느낌입니다.
성달생 신위(한건택님 제공) 부도 철영재 뒤편에 위치
복련의 대좌,원구형 탑신,사모지붕 옥개석과 연화보주가 일석 입니다. 당호를 새기지 않았으며, 조선후기 원구형 부도 입니다.
옥개석
화암사중창비 花岩寺重創
화암사중창기(花巖寺重創記).1572
또한 금은과 그림 등을 보시하였고 공사를 감독하여 용마루 기와와 마룻대의 위용이 드러나고 끝마쳤다.
병술(丙戌)년에 황제가 사신을 파견하여 왕궁 안 정원에 옮겨 심게 했다. 절이 화암(花巖)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이러한 연유 때문”이란 고사가 전해져 온다.
<옆면>
부도 오늘 화암사를 찾은 가장 큰 목적이 이 부도를 뵙는 것이었습니다. 문화재청 발간, 한국의 사찰문화재에서 부도 귀부를 보고 오매불망 인연 지을 날을 기다렸습니다.
결론적으로 부도는 모두 본래 부재로 추측 되었으며 당호를 새기지 않았지 화암사 사세가 최고조 때 주석하셨던 스님의 부도로 추정됩니다.
귀부와 연화대좌 탑신의 암질과 암색 때문에 다른 부재의 조합으로 보입니다. 연화대좌를 후보물로 추정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귀부는 이끼로 덮혀 있어 본디 색깔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 입니다.
즉. 귀부는 하대저석, 하대석, 원형 중대석을 일석으로 조성한 부도의 기단부 입니다. 앙련이 조식된 상대석 하부에는 1단 원형 굄을 두어 중대석과 매칭 시켰습니다 상륜부는 2단의 높은 굄을 두고 보주를 올렸습니다.
귀부.전면
귀부. 측면 비석의 귀부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등에는 장방형 비좌가 아니라 처음 부터 원형으로 치석되었습니다. 이 부도의 부도비로 추정될 수 없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기단석 외에 다른 용도의 귀부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굳이 진도를 나가자면 경주 남산 천룡사지,월출산 우왕골. 여수 흥국사.영주 성혈사. 석당.석등처럼 기단부로 추정이 가능합니다. 이 경우도 촉공이 있다는 전제가 따릅니다. 더불어 석등과 부도가 동시에 조성, 배치된 양주 회암사지.여주 신륵사지, 충주 청룡사지 등의 작례가 떠오르지만, 화암사 경우는 귀부형 석등이어서 부도보다 오히려 석등이 품격 있는 주객이 전도된 배치가 될 것 입니다.
요약하자면 귀부형 석등일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말씀 입니다.
중대석과 앙련이 조식된 상대석의 괴임과도 느슨하지 않습니다.
귀부.후면 굵고 짧게 꼬리를 표현 했습니다.
중대석과 상대석으로 이해한 부분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았습니다.
탑신석 자연적인 훼손이 아니라 화재 또는 고의적인 외부 충격에 의한 인위적 훼손으로 추정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장인들의 안목으로 이렇게 무르고 균열이 심한 암질을 선택하는 경우는 언감생심 있을 수 없기 때문 입니다.
상륜부 화염보주로 생각했는데, 연화보주이군요.
부도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불명산 깊은 산골에서 유례가 없는 거북 대좌를 갖춘 부도의 주인공은 화암사 사세가 최고일 적의 스님으로 단정해도 크게 무리는 아닐겁니다. 역으로 추정하면 1425년(세종 7) 중창주 해충(海聰), 1611년(광해군 3) 중창주 성징(性澄),1년(현종 7)에 중창주 영혜(靈惠) 스님이 우선으로 떠오릅니다. 또한 화암사에 전해오는 진영의 주인공인 허주(虛舟)·고경(古鏡)·낭월(朗月)·보경(寶鏡)·인파(仁坡)·낙암(樂巖)·월하(月河)·벽암(碧巖) 스님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겠지요.
며칠을 뒤졌지만, 언급된 스님들의 행장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부도의 주인공을 꼭 찾고 싶습니다.
귀부로 기단을 삼은 부도는 흔치 않으며 그 작례는 아래와 같습니다.
완주 송광사(부도 기단?. 노주석?)
삼척 신흥사. 화운당현진대사花雲堂玄辰大師 .1771년
구미 대둔사.완화당 부도 1798년
부산 동아대 박물관.대적사. 청성당 상환대사
광주 증심사.수월당보문탑 水月堂普文塔
부도의 구성에 대한 부재의 이해는 개인적인 시각이며, 안목 높은 분들의 현장 답사와 혜안을 기대해 봅니다. 아울러, 개인적으로는 화암사 귀부형 부도로 이름 붙이고 싶습니다.
안도현 시인이 "화암사 내사랑 찾아가는 길은 굳이 알려주지는 않으렵니다."라고 시에서 표현 하였듯이
2004년 첫인연 이후,저도 가장 품고 싶은 절집 1순위가 화암사 이었기에 "화암사 내사랑 부도 위치는 굳이 알려주지는 않으렵니다." 라고 욕심 부려 봅니다.
내 사랑 화암사 ...안 도 현
인간세(人間世) 바깥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미워하는지 턱 돌아앉아 곁눈질 한번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화암사를 찾아가보기로 하였습니다 세상한테 쫓기어 산 속으로 도망하는 게 아니라 마음이 이끈 길로 가고 싶었습니다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 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습니다 마음의 흙먼지를 잊어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산 은,슬쩍 풍경의 한 귀퉁이를 보여주었습니다
구름한테 들키지 않을려고 구름속에 주춧돌 놓은 잘 늙은 절 한 채 그 절집 안으로 발을 들여 놓는 순간 그 절집 형체도 이름도 없어지고 구름의 어때를 치고 가는 불명산 능선 한 자락같은 참회가 가슴을 때리는 것 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이 화엄사 앞마당에 먼저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 세상의 뒤를 그저 쫓아다니기만 하였습니다
화암사 내사랑 찾아가는 길은 굳이 알려주지는 않으렵니다
*사족 잘 늙은 절 한 채 그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15년 전 꾸미지 않은 안온한 느낌 스님도, 보살님도 사람을 그리워 하셨지요. 심지어 멍멍이 마져.
이제는 모두 절 집을 떠나시었습니다.
나는 15년 전 다짐 처럼 만산홍엽의 만추에 다시 찾을 수 있을런지...
2019.07.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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