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완주군

완주...위봉사 부도전

임병기(선과) 2019. 7. 23. 18:41
728x90
728x90

 

 

 

옛글을 보니 세번째 방문이며, 마지막으로 2008년에 들렸습니다.

부도전을 제외하고는 옛글로 대신 합니다.

 

 

 

 

 

 

 

 

 

보광명전 불단 후벽

영산제 등 제의시에 연주하였던 악기들이 걸려 있습니다.


 

 

 

 


해강과 죽농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부도전

위봉사 부도전은 출입 금지 구역 입니다.


문화재청, 한국의 사지 등에는 위봉 폭포 방향에 4기 부도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현재는 이건하였습니다.

주지스님 말씀에 의하면, 모두 도난 되어  남아 있는 부재를 옮겼다고 합니다. 

 

 

 


부도(1)

이 부도도 대석과 제짝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지만 조선후기 원구형 부도 같습니다.

 

 

 


석등부재 

팔각 지대석과 복련을 새긴 하대석이 일석 입니다.

부러진 간주석 이상은 결실되었습니다.

 

 

상대석 모서리의 화문



 


부도(2)

탑신석은 도난 당했으며 부재는 방형하대석으로 사리공이 남아 았습니다.

 


부도(3)

탑신석은 도난, 하대석에는 사리공이 있습니다.

 


부도(4)

부도재 여부도 불투명합니다.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2019.07.13 

아래는

2008년 글

 

2004년 이슬비 부슬부슬 내리는 아침에 찾아든 위봉사에는 절집마져 운무에 덮여 선경을 연출했었다. 오늘도 전주의 님들과 해질 무렵 들린 절집은 안온하고 포근하여 먼 여행길에서 돌아온 고향집 느낌이었다. 적어도 나에게 위봉사는 언제나 마음에 평온을 가져오는 가람으로 자리할 것 같다.

 

"위봉사는 고려후기의 불교를 이끌어간 나옹(懶翁) 스님이 머무르며 거찰의 면모를 일구어온 유서 깊은 사찰이다. 유사시에 왕실의 영정을 보관하고자 사찰 주위에 위봉산성을 축조하였던 17세기에는 성곽 수호의 임무까지 띄게 되어, 동학 농민혁명 당시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있던 태조의 영정을 이곳으로 피난시켜 수호하기도 했으니 그 위세는 대단하였을 것이다.


근세 초까지 이 지역을 대표하는 큰 사찰로서, 1911년 조선총독부가 모든 사찰을 30본말사로 구획할 때 위봉사는 전북 일원의 50여 사찰을 관할하는 본사(本寺)의 위상을 갖추고 있을 정도였다. 또한 명강사와 무수히 많은 인재를 배출해온 강원(講院)으로서 사격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사찰정보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근래에 조성한 일주문에서 바라보는 진입동선도 즐거웁다. 보광명전각과 더불어 생각하면 김봉렬교수의 화엄종찰의 은근한 진입동선이 송광사에서도 유효하다고 생각된다.

 

사찰정보에 의하면 창건시기에는 여러설이 전해온다. 늘 하는 말이지만 역사적 사료와 명백한 증거로서 사찰 창건시기를 추정하는 것은 나는 싫어한다. 전설, 설화도 창건의 중요한 배경이 된다고 믿는다. 이제는 햇빛 아래의 역사보다 달빛에 젖은 야사가 더욱 마음에 닿는다면 노친네 반열에 드는가?, 결코 아니다. 그건 연륜이 쌓인 것이리라.

 

현재 사찰 내에 남아 있는 「극락전중건기(極樂殿重建記)」에 의하면, 신라 말에 최용각(崔龍角)이라는 사람이 산천을 섭렵하다가 3마리의 봉황이 날아든 흔적을 발견하고 이곳에 절을 지어 위봉사라 칭했다고 한다.


창건에 관한 또 한 가지 설은 신라시대인 604년(진평왕 26) 서암(瑞巖) 스님에 의해 세워졌다는 기록이다.
창건에 관한 설이 분분한 가운데 늦어도 고려 초에는 위봉사가 창건되었을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이후 1359년(공민왕 8)에 나옹스님이 대규모로 중창하여 전사(殿舍)가 28채, 외암(外唵)이 10여 개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최근에 조성한 천왕문, 4년전에는 공사중이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스님이 말씀하셨다. 스님이 위봉사에 왔을때 저소나무까지만 위봉사 였다고 했다. 혹자는 산지중정 가람을 운동장 처럼 넓혔다고 하지만 스님은 아직도 못다한 일 많지만 이제는 욕심부리지 않고 후학의 일로 남겨 두고 싶다고 했다. 못생긴 소나무가 절을 지킨다고, 6.25 이후 산간도로가 개설된 후 수많은 소나무가 잘려 나갔고 저 못 생긴 소나무만 남았다. 문득 곡즉전이 떠오른다. 

 

老子 도덕경 제22장 - 굽은 나무는 베어지지 않는다

 

曲則全, 枉則直, 窪則盈, 폐則新, 少則得,
곡즉전, 왕즉직, 와즉영, 폐즉신, 소즉득,
多則惑, 是以聖人, 抱一爲天下式, 不自見故明,
다즉혹, 시이성인, 포일위천하식, 불자견고명,
不自是故彰, 不自伐故有功, 不自矜故長,
불자시고창, 불자벌고유공, 불자긍고장,
夫惟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 古之所謂曲則全者,
부유부쟁, 고천하막능여지쟁. 고지소위곡즉전자,
豈虛言哉. 誠全而歸之.
기허언재. 성전이귀지.

 

굽은 나무는 수명을 온전히 마치게 되고, 자벌레는 몸을 굽힘으로써 뻗을 수도 있게 된다. 물은 우묵한 웅덩이로 흘러 모이게 되고, 옷은 낡아 해어져야만 다시 새 것을 입게 된다.

 

욕심이 적으면 마음의 만족을 얻을 수 있고, 지식이 많으면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무위 자연의 성인은 하나인 도를 지켜 천하의 법이 되는 것이다. 무위 자연의 성인은 자기를 내세우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의 존재가 뚜렷해지고, 자신을 옳다 하지 않기에 그 좋은 것이 세상에 나타난다.

 

자기의 공을 자랑하지 않기에 그 공이 자기의 것이 되고, 자신의 우쭐댐을 버리기에 언제까지고 존경을 받게 된다. 성인은 절대로 남과 다투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세상에 그를 적으로 대하는 사람이 없다.

 

옛 사람이 말하거늘 굽은 나무는 제 수명을 다한다고 했는데, 참으로 인생의 진리를 제대로 말한 것이다. 참으로 굽은 나무가 되어 내 몸을 온전히 하고, 온전한 몸을 대자연에 되돌려 주는 것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보광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현재 보물 제608호로 지정되어 있다. 1673년(현종 14)에 번와공사를 하였고, 현재의 보광명전 편액의 기록에 의해 1838년(헌종 4)에 이창덕(李昌德)이 중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868년에 포련대사(布蓮大師)와 1994년에 법중(法中) 스님이 각각 중수하였다.


굵직한 재목들을 사용하여 건물이 웅장하게 보이며, 귀솟음도 뚜렷하고 공포는 내외 모두 3출목(三出目)이다. 쇠서(牛舌)의 조각과 내외부의 연꽃을 초각한 솜씨, 귀공포의 간결한 처리 및 보의를 다듬은 기법 등으로 보아 17세기경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지스님은 보광명전이 보물로 지정된 이유를 후벽 백의관음보살 때문이라고 믿고 계신다. 나역시 부정은 하고 싶지 않다. 전각 보수도 후벽 관음보살의 멸실을 우려 미루고 계신 스님의 믿음이 존경스럽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전각 내부에는 석가 문수 보현보살을 봉안하였고 불상 위에는 화려한 닫집을 두었다. 보광전이면 비로자나불을 모셔야할텐데 석가모니를 모셨으며 전각밖 안내문에는 아미타삼존불을 모셨다고 표기했으니 세박자가 각기 엇나가 있다.

 

스님.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아미타불을 모셨다고 설명했습니다. "글쎄말이야!! 관에 고치라고 한지가 언제인데... 저 부처님은 나한전에 모셨던 부처님이야!! 해방후 길이나자 GMC 수십대 분의 불상이 실려나갔다고 그래 아마 나한전의 나한님도 그 때 다 실려 갔을거야"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후벽 백관음보살 벽화. 전원을 찾지 못해 이렇게 나왔다. 처음부터 스님의 허락을 득했으면 좋았을 텐데 강진 무위사 스님이 생각나 도촬의 결과이다.

 

 

대광명전 후불벽 뒤쪽에 그려진 벽화로, 왼손에 정병을 들고 선 관음보살이다. 후불벽  관음벽화는 여수 흥국사 대웅전이나 무위사 극락전 내소사 대웅전등에서 볼 수 있는 희귀한 예에 속한다.
 
필치와 색조가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화면의 높이는 395cm이고 폭은 290cm이다. 백의관음보살도 등은 색조가 차분하고 아늑한 금단청(錦丹靑)과 더불어 옛 채색기법의 우수함을 보여주고 있다.
 
주지스님은 백의 관음보살도 나홍선사가 조성했다고 믿고 계셨다. 누가 틀렸다고 하겠는가? 채색만 계속했으면 가능한 이야기이지 않는가?
 
관음보살님 사진을 잘못 찍은 못난 중생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요 ()()()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스님. 업경대는 지장전에 모셔야지예.

 

-.ㅎㅎ 저기(출입동선에서 보면 봉서루 현판이 걸린 누대 반대에 지장전 현판이 걸려있다) 있어도 그냥 둘란다.

 

-.흩어져 여기저기 있던것을 한 곳으로 모셨으니 다음 스님도 할 일이 있어야지 안그래요?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어느 스님이 업경대를 새로히 지장전을 불사하여 지장전에 모실지...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대광보전 앞 중정 노송 옆에 있는 고려시대 석탑으로, 1359년(공민왕 8) 나옹 스님이 절을 중창할 때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마모. 멸실이 심해 제모습 추적도 쉽지 않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위봉사 숨은 이야기와 법문을 들려주신 법중 스님.

 

1978년 오신 후 오늘의 위봉사를 조성한 분이다.

 

연닢차도 감사하게 마셨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관음전에 걸린 편액. 관음전은 팔작지붕의 앞뒤 건물 가운데를 맞배지붕으로 연결시켜 배치평면이 工자형 배치를 하고 있다. 건물의 용도도 서로 달라 앞면은 관음전이고 뒷면은 요사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 고건축에서 공(工)자형 건물은 空으로 해석하여 금기시 한다. 하지만 도산서원, 밀양 표충사 선원. 위봉사 관음전의 건물은 공부(工夫)르 해석하여 끊임없는 학문 연마와 치열한 용맹정진을 통한 학문적 성공과 자기 성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위봉사 극락전중수기에 의하면 1868년(고종 5)에 포련선사가 60여 칸의 건물을 지었다고 하는데, 가구의 짜임새로 보아 이 불전도 그때 중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진은 우리들이 익히 아는 해강 김규진과 죽농 서동균(?)의 합작품 관음전 편액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 강점기에 둘이서 죽이 맞아 전국 31본사에 남긴 작품의 하나이다.

 

-.스님. 저 편액이 왜 위봉사에 있지요?

 

-.처사님. 그때까지도 위봉사가 김제 금산사도 말사로 둔 본사였습니다.

 

-. ...(공부합시다.)

 

위봉사 관음전 편액에 글과 그림에 대한 돌베개의 답사여행의 길잡이 13  위봉산성과 위봉사 글 중 213page를 살펴보자. "위봉사라 횡서하고 그 양 옆으로 대나무와 난초를 한 폭 친 편액이다. 일제 강점기 각기 글씨와 그림으로 꽤나 이름을 날리던 해강 김규진(1868~1933)과 죽농 서동균(1902~1978)은 서로 짝을 이뤄...31본산에 남겼다고 전해진다. 글씨나 그림은 그림은 모르겠으되, 괴짜들이 사라져 맹탕 같은 요즈음엔 차라리 그 치기 만만한 호기가 그립고 즐겁다"

 

나 역시 지금까지 그렇게 알았고 위봉사 자료를 검색하면 위의 내용을 그대로 복사하여 게재한 글이 부지기수다. 심지어 지방지 등의 문화유산 탐방 연재물, 유명인사의 글에도 가감없이 올려져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우선 두 사람의 나이를 비교해보자. 학문과 교류에 나이와 무관하게 망형우의 교류를 나누는 선인들도 없지는 않지만, 서동균이 태어 날 때 해강은 34세였다. 해강과 김규진이 전국 사찰 본사를 유람 할 때를 해강이 고인이 된 해를 기준으로 보아도 32세와  66 노인임에도 죽이 척척 맞아 호기롭게 동행한 것이다.

 

과연 그랬을까?

 

전국 사찰의 현판중 해강과 죽농의 글,그림은 순천 송광사와 해인사 등 모든 본사에 전해온다. 하지만 두 사찰 자료를 검색해보면 죽농 안순환과 해강의 작품으로 묘사되어 있다. 죽농 안순환은 출몰 년대는1881~1950년으로 13세 차이이며 여러 자료에도 일제강점기에 전국 사찰을 동행했다고 기록되어있다.

 

난 돌베개사의 글이 잘못되었다고 단정할 지식이 없지만 객관적으로는 '죽농'이라는 호 때문에 발생한 오류라고 보고 싶다. 지금 출판되는 책에는 수정 된지도 모르지만 유홍준 청장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와 더불어 답사매니아들에게 바이블이 된 책이기에 더욱 심각한 문제이다.

 

더 한심한 작태는 한 점 의문도 갖지 않고 후안무치하게 자기의 글인양 우려먹은 명사, 기자, 여행 작가들의 그 치기 만만한 호기가 아닐까? 아니면 정확한 근거 없이 나불거리는 내가 방약무인한 중생인가?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해강의 글씨는 큼직큼직한 흐름이다. 관음전 편액보다는 요사의 글씨가 크다.

 

 

법중스님과 대화가 길어져 전주에서의 약속시간이 늦었다.

 

하지만 저녁 예불 법고소리를 놓치고 떠날 수는 없었다.

 

아직

 

지천명은 고사하고 불만으로 가득찬 머리가 텅 빌 때 까지 듣고 또 듣고 싶다.

 

둥 둥 둥

 

2008.07.05

728x90
728x90

'전라북도 > 완주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완주...송광사 나한전  (0) 2024.04.22
완주...요덕사 승탑(부도)  (0) 2021.09.02
완주...불명산 화암사  (0) 2019.07.22
완주...봉서사 진묵대사 부도  (0) 2016.11.11
완주...송광사 부도전  (0) 2016.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