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울산광역시/울산광역시

울산...경상좌도 병영성 하마비

by 임병기(선과) 2019. 7. 19.
728x90
728x90

 

 

 

병영초교

경영좌도병영성에서 유래된 교명 입니다

 

 

예전에 뵈었는데 잘못 찾아 왔나?

 

 

계단을 올라가서 바라보니  비석 후면이 보입니다.

 

 

 

정면으로 들어갈려고 했지만 나뭇가지가 막고 있습니다.

 

 

 

다시

뒤로돌아 무릎을 꿇고 나뭇가지를 들고 측면을 돌아서니 겨우 하마비 정면이 보입니다.

하지만, 정면 진입은 곤란했습니다.

 

 

담쟁이를 걷어 내고 있는 중

하교하던 초교생 몇명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눕니다.

 

-저 아저씨 좀 이상하다

-.더운데 저안에서 뭐하노?

-.정신 이상자 이거나 길 잃은 사람 같다.

 

그냥

치매 노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토포사이하개하마(討捕使以下皆下馬)

 

토포사討捕使

"도적(산적·화적 등)을 수색, 체포하기 위하여 특정수령이나 진영장()에게 겸임시킨 관직이다.

1561년(명종 16)임꺽정()의 무리를 토벌하기 위하여 남치근()이 임시로 이 직책에 임명된 적이 있고, 선조 때도 도적이 극심한 고을의 수령을 겸직시킨 사례가 있었으나, 정식으로 제도화한 것은 1638년(인조 16) 전국의 내륙지방에 확대실시하면서 부터였다.

그 뒤 현종 때 홍명하()의 건의로 수령이 겸직하는 것을 폐지하고 그대신 각 도의 진영장으로 하여금 겸임하게 하였다. 그러나 진영장의 대부분은 수령들이 겸직하였는데, 이러한 까닭으로 보통 겸토포사로 호칭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즉, 병영초교 앞 하마비는 병영성의 병마절도사 외에는 성문 앞에서 모두 말에서 내려 출입하라는 문구를 새긴 비석 입니다.

정면 외에는 명문이 없어 세운 시기를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병영성

"경상좌도병마도절제사영使이 있었던 곳으로 1417년(태종 17) 해발 45m 이하의 낮은 구릉을 이용해 골짜기를 두른 타원형 성이다. 고려 때부터 진이 설치되어 군사가 주둔하였고, 조선 태종 때에  경주로 옮겼다가 1415년(태종 15)에 다시 제자리로 옮겨와 경상좌도의 병마도절제사의 주둔처가 되었다. 처음에는 옛 울산읍성과 병영이 한 곳에 있다가 분리와 합병을 되풀이하였다.

 

사방에 성문을 두었고, 문에는 옹성을 두었던 흔적이 있으며, 사방 8m 크기의 치성 이 군데군데 있었음이 확인된다. 성돌은 임진왜란 이후에 왜성을 쌓을 때 많이 없어졌으나 기단부는 대부분이 남아 있다.성벽은 구릉의 정상을 안쪽으로 하고, 바깥 경사면에 7m 두께로 기단을 둔 다음, 기단에서 50㎝쯤 안쪽으로 성벽을 쌓아올렸으며, 내부는 잡석으로 채웠다. 바깥쪽 가파르지 않은 곳에는 해자를 팠던 자취가 남아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당시에는 병마첨절제사의 진으로서 군관 399명과 수성군 40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때의 성은 군치소의 북쪽 거마곡에 있었는데 바다로부터 3리쯤 떨어진 지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둘레는 621보()이고 성안에 우물이 세 곳 있었다. 당시의 방어전략에 따르면 염포·개운포·서생포西 등으로 상륙하는 왜적을 수군이 막고, 육지로 상륙한 왜적을 이곳 병영성에서 막았다.성은 조선 초기부터 계속 쌓았던 듯 증동국여지승람에는 그 규모를 둘레 3,723척의 석축()이며 높이 12척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성 안에는 우물 7곳, 도랑 2곳이 있고 군창·동융루·선위각·조련고 등이 있었으며, 그 뒤 절도사 박원종이 이사정을 짓기도 하였다."(네이버)

 

 

 

예전 같으면

중구청에 전화해서 소리 질렀을텐데..

 

2019.07.12 

 

728x9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