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함안군

함안...신창마을 솟대

임병기(선과) 2019. 3. 10. 08:01
728x90

 

 

 

군북면 동촌리 신창마을

조선 중엽  양곡 보관 창고가 있어서 ‘창고(倉庫)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창촌(倉村)이라 불렀다고 한다.

현재는 군북초교, 군북면소재지. 39사단과 인접해 있는 농촌마을이다. 

주변에는 지석묘가 넓게 산포해 있어 고래부터 사람이 거주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신창 마을 솟대는 어떤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풍수형국의 행주형 마을의 비보책은 아닐지.

일반적으로

솟대는 마을의 풍요와 안녕. 벽사. 화기 예방.다산 등의 상징물로 마을 입구에 조성하는 마을 신앙체이며,

일년에 한 번 정월초부터~정월 보름 사이에 동제를 모실 때 제례를 같이 올린다.


솟대 1기만 인지하고 찾았는데

마을 어르신께서 골목안에도 1기 더 있다고 알려주어 2기 모두 뵈었다.
 

 

지대석 위에 당간지주처럼 두 개 돌기둥 사이에 솟대를 끼워 세웠다.

나무 당간으로 보았는데, 다녀 온 후 자료를 살펴보니 쇠당간(?) 이라고 등재되어 있다.

 

금년에도

동제를 모신 듯 금줄과 소지가 걸려 있다.

 

가슴 뭉클하다

민초들의 순박한 염원들이 스쳐가면서...

 

 

오리

화기를 잠재우는 비보책

더불어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메신저의 상징도 있다.

 

 

 

골목안

마을 공동우물 터 옆에 있다.

 

도시화

마을인구의 격감

그 시류를 견디지 못하고 우물터로만 남아 있다.

앵두나무도, 바람 날 처녀도 옛이야기이다.

 

또한 우물은

마을 부녀자들의 문화가 계승되고, 여론이 형성되고

시어머니. 시누이의 성토장이며, 아녀자들의 스트레스 해소장이었는데.

 

 

우물도 기능을 잃고

솟대도 시나브로 잊혀져 간다.

 

난리부루스, 표피적인 전시행정의 예산 한 푼만 투자하면 이런 모습으로 남겨 놓지 않을텐데.

 

 

만행 떠난 오리

과연 다시 찾아 올까?

 

우리의 몫이다

면면히 이어오던 전통을 우리세대에서 끝내야만 하는가?

 

 

솟대만 인지하고 찾았는데

신창마을은 효성그릅 창업자인 조홍제회장이 태어난 마을이었다.

또한

마을 민가에 있는 지석묘 26호에는 덮개돌에 400여개의 바위구멍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어쩌겠는가?

나의 인연은 솟대까지었으니.

 

2019.03.09

 

728x9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