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함안군

함안...고바우 마애여래좌상

임병기(선과) 2017. 7. 6.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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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북면 하림리 247

답사 매니어들에게는 익숙한 지명일 것이다.

방어산 마애여래삼존불 때문에...


그 초입에 계신다.

근대불로 치부한 까닭에 인연이 늦었지만...


 

고바우

우리세대에는 김성환 화백의 "고바우영감" 만평이 먼저 떠오르지만 여기는 슬픈 애사을 간직하고 있다.


고마암叩馬巖

사마천 사기 고마이간 叩馬而諫에서 그 근월을 살펴볼 수 있다.

즉, 말고삐를 잡이 당기면서 간언諫言을 하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이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을 정벌하러 떠날 때 신하가 임금을 시해할 수 없다고 말고삐를 붙잡고 불가함을 간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사진에 담지 못했지만 고암 각자와 명문이 있었다.


고암叩巖 .조시일(趙始一, 1755∼?)

암상청풍암하계巖上淸風巖下溪 바위 위 맑은 바람 그 아래 시냇물

선생당일조어계先生當日釣魚溪 어계선생 낚시하던 시내라네

만고강상부식후萬古綱常扶植後 만고 강상 붙잡아 세운 뒤에

서산미궐세우계西山薇蕨洗于溪 서산서 캔 고사리 시냇물에 씻었네


 

백세청풍 百世淸風

충절.지조릉 상징하는 말로 우리나라의 많은 누정, 전각 명칭이다.


고바우에 백세청풍을 새긴 분은 누구일까?

그리고 주인공은


생육신의 한 분인 조려 선생의 충절을 간직하고져 하는 후손들의 마음가짐을 지닌 각자이다.


조려

"1420년(세종 2년) 함안에서 출생하였다. 1453년 성균관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며 명망이 높았다. 그 뒤 국자감에 입학하여 학문 연구를 하던 중, 1455년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즉위하자, 불합리한 방법으로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을 임금으로 섬길 수 없다 하여, 폐위된 단종에 대한 충성과 의리로 망설임없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 함안 군북에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1456년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자 강원도 영월을 방문하여 수시로 단종의 안부인사를 원호의 관란정觀瀾亭에 유숙하며 원호,이수형 등과 함께 국사를 논하면서 어린 임금의 안전을 기원하였고, 후에 원주 치악산에 올라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을 것을 굳게 맹세하고 치악산 정상에 원호, 이수형과 함께 나란히 이름을 새겼다. 1457년 금성대군과 이보흠 등이 거듭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하고 단종이 사사당하자 문상을 하러가던 그는 영월 청령포 앞에 이르러 배가 없어 통곡하였다. 이때 호랑이가 나타나서 그를 등에 업고 영월 동강을 도강했다 한다.


그 뒤 단종왕의 넋을 공주 동학사東鶴寺에 모신 후 함안으로 돌아와 서산 아래에 은거하여 사람들은 그가 머무르던 서산을 백이산이라 불렀다. 단종 승하 후 3년간 상복을 입고 3년상을 치렀고 1489년 70세에 세상을 떠났다. 세조는 그를 여러 차례 관직에 불렀으나 끝까지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후 독서와 낚시로 세월을 보냈다.


1698년 단종이이 왕으로 복위되자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고 1703년 경상도 유생 곽억령 등이 상소를 올려 성삼문,박팽년 등 사육신의 예에 따라 생육신인 조려 등도 사당을 세워 제향하도록 조정에 건의하여 1706년 생전에 기거하던 백이산 아래 함안군 원북동에 사당을 세워 김시습, 이맹전,원호,남효온,성담수와 함께 제향하였다. 사당은 후에 서산서원西山書院으로 이름지어졌다.1781년이조펀서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가증되고 시호는 정절 저서로는 후손 조영석이 정리한 어계집漁溪集이 전한다."...위키백과


 

조려선생의 충절을 기려 후손 조삼규가 새겼다.


서산西山...조삼규(趙三奎, 1890∼1950)

어조등림일漁祖登臨日  어계선조 산 오르신 날

계산청복청溪山淸復淸 ·시내 산 맑고 맑구나

후생수불앙後生誰不仰  후손 그 누군들 받들지 않겠는가

백세청풍성·百世淸風聲  그 충절을...


 

그리고

마애여래 좌상.

조성시기도, 인물, 불상인지 분명하지 않아 인연이 늦었지만 오늘 확신이 들었다.


연화좌에 계신 여래상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선각의 여래상을 근자에 기계로 볼륨감을 높였다.


조계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서산암을 창건한 조삼규님의 공덕을 기린 명문으로 생각되며 각자와 해석은 개인적인 판단이다.


서산 西山 ( ? )

청암당 조삼규 창건기념 淸岩堂 趙三奎  創建記念

위도대중 爲度大衆 대중을 계도 하기위하여

이차공덕 以此功德 이러한 공덕을 베풀었으니(서산사를 창건하였으니

역능 서강力能西岡 정성을 다하여 기원하면

원반시방 願反十方 원하는 바를 이룰 것이다


그런데

왠지 뒤쪽에 한자가 더 있엇다는 느낌이 든다


 

 

 

 

 


마애불이 먼저 일까?

각자가 먼저일까?


같은 날 일까?

 

 

아쉬움을 가득 안고 돌아왔다.

뭐 때문일까?


2017.06.21

 

낯익다 했더니...

 

 

'조려'  조선 전기의 생육신(生六臣) 가운데 한 사람.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주옹(主翁), 호는 어계(漁溪). 할아버지는 고려말 공조전서 열(悅)이며, 아버지는 증사복시정 안(安)이다. 1453년(단종 1) 성균관진사가 되었으나, 1455년(세조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향리로 돌아와 은거하면서 평생을 보냈다.

 

1698년(숙종 24) 단종이 추복(追復)되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정조 때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1703년 경상도 유생 신만원(辛萬元) 등의 사당 제향 건의에 따라 김시습(金時習)·원호(元昊)·남효온(南孝溫)·이맹전(李孟專)·성담수(成聃壽) 등 다른 생육신과 함께 함안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어계집〉이 있다.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어계고택 솟을문

 

문간칸은  3칸으로 가운데 문을 높여 세운 솟을대문을 두었고 양쪽은 방으로 만들었고 옆에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다.

원북재


어계고택, 원북재 현판이 나란히 걸려있는 건물로 본래는 사랑채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는 재실로 사용중이며 전면 4칸·측면 2칸 규모로  두리기둥, 팔작지붕이다. 가운데 2칸은 대청이며, 양쪽은 툇마루를 단 방을 1칸씩 두었다.


조묘

 

사당은 3칸 一자형 평면에 툇칸이 있는 맞배지붕이다. 창방위에는 꽃문양이 보이며 어계선생의 불천위를 모시는 사당으로 조묘 현판이 걸려 있다.

 

채미정

 

정면4칸 측면 3칸 정자는 정면 2칸 측면 1칸을 방으로 하고 주위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어계고택 마을앞에 위치하며 백이숙제가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따먹고 살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채미(菜薇)는 곧은 지조와 절개를 상징한다.

 

채미정 현판보다 큰 백세(百世), 청풍(淸風), 왼쪽 동산의 청풍각도 같은 맥락이다. 채미정은 서산서원의 부속건물로 서원 훼철시에도 유지되었으나 육이오 동란시 소실되어 최근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채미정 솟을문

 

양쪽에 방을 단 솟을문은 경전선 부설로 인해 대문 기능을 상실하고 퇴락한 모습이 무척이나 지쳐보인다. 지붕 가득 풀이 자라고 문창살은 훼손되었으며 금방이라도 열차 진동에 일순간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생긴다.

다시 함안으로 나오며 서산서원을 들리지 않아 안타까움 금할 수 없다.

함안 대산리 무진정 영송루

 

무진정은 어계 조려 선생 손자인 무진정 조삼의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건립한 정자로 사진에 보이는 무진정 연못 가운데 육모지붕 정자는 손님을 맞이하고 배웅하는 장소인  영송루(迎送樓) 이다.

무진정


무진은 조선 성종 14년(1483)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 2년(1507) 문과에 급제하여 함양·창원·대구·성주·상주의 목사를 지냈고, 사헌부집의 겸 춘추관편수관을 지냈다.

문이 닫혀 담너머 보이는 무진정은 수리가 시급해 보인다. '무진정은 앞면 3칸·옆면 2칸의 정자는 팔작지붕이며, 앞면의 가운데 칸에는 온돌방이 아닌 마루방으로 꾸며져 있고, 정자 바닥은 모두 바닥에서 띄워 올린 누마루 형식'이라고 한다.

 

2006.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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