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함안군

함안...대산리 석조삼존상

임병기(선과) 2019. 3. 11.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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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리 석조삼존상

답사꾼이면 모두 그러하겠지만 오며가며  이미 서너 번  뵌 부처님이다.

예전에 없었던 보호각이 설치되어 있었다.

 

오래전 대구매일신문에 연재했던 글을 가져왔다.

 

함안 아라초등학교는 가야읍내 도항리 고분군 아래 자리잡은 초등학교다. 이름이 예쁜데 옛 지명을 지켜오고 있는 것이 참 흐뭇하다. 전북 김제에는 지평선 중학교, 지금은 폐교되었지만 재약산 사자평에는 고사리 분교라는 고운 이름의 학교도 보았다.

삼국유사 오가야조에 아라가야는 경상남도 함안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나라로 전한다. 다른 기록에는 아야(阿耶)`안라(安羅) 등으로도 표기되고 있는데, 이는 우리말을 한자식으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고 동일한 대상을 지칭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변한(弁韓) 12국 중의 하나로 나오는 안야국(安耶國)이 그 모태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 무덤크기로 강대했던 세력짐작
일찍이 아라가야는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한 전기 가야연맹의 구성원으로 편입되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낙랑`왜 등과의 교류를 독자적으로 전개하기도 했다.

 

6세기 이후 가야사회의 중심지가 경상도 내륙인 고령지역(대가야)으로 옮겨가면서 후기 가야연맹이 성립되자 아라가야도 새로운 연맹의 일원으로 편입해 들어갔으나, 대가야가 쇠퇴함에 따라 백제와 신라의 갈등관계를 이용해 가야의 새로운 맹주국으로서 지위 상승을 꾀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서기 531년 백제의 침공을 받아 크게 타격 받은 후로 서서히 소멸되어갔다. 경남 함안 지역의 말이산(末伊山)에 남아 있는 상당 규모의 가야시대 무덤들은 그들의 세력이 강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함안군 함안면 대산리 한절골(大寺里) 마을 느티나무 아래 석불 한 기는 한쪽 다리에 힘을 빼고, 목과 허리를 가볍게 튼 삼곡(三曲)자세가 완연한 보살 입상이다. 왼손에 깨끗한 물을 담는 병 정병을 지물로 들고있어 관음보살로 추측되지만 불두를 비롯해 훼손이 심하다.

한절골 절집에 모셔졌던 본존불 옆에 모셔진 협시로 추측되며, 옆에는 석탑 지붕돌 하나가 헤어진 석탑 부재를 애타게 기다리는 듯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동행한 님에게 그늘아래에 뵈는 타올과 서너개 생수병이 한절골 석불을 찾아오는 길손을 위한 동민들의 배려가 분명하겠지라고 동의를 구했더니 웃음으로 화답한다.

◇ 훼손된 불두와 불상 아쉬움 많아
한절골 마을의 세 구 불상은 상품 상생 수인의 아미타 본존과 두 기의 좌우 협시불이다. 처음부터 본존불과 협시불인지는 알 수 없으나 좌측 보살은 왼손에 정병을 들고 있어 관음보살로 추측되며, 중앙 석조좌상이 아미타불이라는 가정하에 우측보살은 대세지보살로 보고 싶다.

높은 관을 쓴 협시보살은 안상이 새겨진 팔각 지대석, 꽃부리가 아래로 향한 복련이 고운 둥근 하대석을 갖추었다. 또한 세겹 꽃부리의 연꽃무늬 앙련이 핀 상대석 위에 한복 분위기의 옷을 입고 서 있다. 무릎에는 타원형 옷주름이 보인다.

우리나라 문화재 안내문에 천편일률적으로 등재된 '도식화 된', 지방화 된' 표현이 한절골 석불에도 예외는 아니다. 전문가들의 시각이겠지만, 역발상으로 석불, 석탑의 모습에서 절집을 그려내 보면 어떨까? 불상을 바라보고 지극 정성으로 복을 기원했을 우리네 어머니 할머님이 석불 인물보고 절에 가지는 않았을텐데 말이다.

삼존불 본존 아미타 불상은 희미하지만 오른 어깨 쪽은 벗고 왼 어깨에만 옷을 걸치는 우견편단 법의이며, 불두를 비롯해 훼손이 심하고 제짝인지 모호한 배모양의 거신광배도 반이상이 잘려 나갔다.

 

◇ "부처를 볼 때는 불상말고 정성을 봐야"
협시불에는 둥근 상하기단, 하기단 복련, 상기단의 세 겹 앙련이 보인다. 길게 발등까지 내려온 타원형 주름이 보이는 습의와 도톰한 발이 인상적이며, 어렵고 힘든 일에 봉착했을 때 부르면 금방이라도 달려와 포근하게 안아 줄 친숙하고 정겨운 우리네 할머니 모습이다.

하늘나라에 계시는 할머니를 그리며 한절골 마을을 떠나려는데 멋진 문장이 새겨진 표시석을 가리키며 동행한 님이 나를 부른다.

"여기 절터에 심어졌던 느티나무는 천수를 누리다가 가고 그 자리에 이 마을 출신 고동원, 조용수 두 어른께서 어린 느티나무를 심어 이렇게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그 마음을 기려 돌에 새긴다. 앞으로도 사나운 비바람에 꿋꿋이 잘 자라거라." 1952년 식수, 1993년 기념비 내용이다.

동구밖에 당산목 아래 모신 부처를 볼 때는 불상을 보지 말고 주민들의 정성을 봐야한다. 오는 이 가는 이가 아미타불, 협시보살, 우아한 매듭과 같은 전문용어를 구사하든 말든 그네들에게는 아들을 점지해주고, 병을 낳게 해주며, 사악한 기운을 막아주는 마을 지킴이인 것이다.

임병기(답사카페 cafe.daum.net/moonhawje 운영)

 

 

대세지보살.아미타불.관음보살

고려초인 11세기 이전 작품으로 추정된다.

 

 

아미타여래좌상

대좌는 망실,광배는 훼손이 심하다.

상품상생.상품중생인지 분명하지 않은데 옛글에는 상풍상생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광배

 

 

배면

 

 

 

우협시보살

정병을 들고 있어 관음보살 이다.

통견의 법의는 한복 느낌이다.

 

 

대좌

하대석 상대에는 복련, 하대석 중석에는 안상을 새기고 귀꽃을 표현하였다.

상대석에는 앙련을 세겹으로 새겼다.

 

 

상대석과 두 발은 일석이다.

 

 

왼손의 정병

 

 

 

 

후협시보살

관음보살과 거의 비슷한 모습이다.

 

 

대좌

 

 

 

 

어깨 매듭

 

 

 

 

 

보호각 앞

 

 

삼존상 우협시보살인 관음보살 입상과 비슷하다

삼굴자세가 뚜렷하고

 

삼존불과 더불어 동시대에 조성되었을 보살상이다.

 

 

 

후면

허리끈과 쇼올은 아니지만 쇼올(?) 같은 법의가 신부님들의 옷을 연상케한다.

 

 

 

옥개석

낙수면 물매가 급하고

현수곡선이 나타나며, 상부에는 탑신굄은 각형 1단이다.

 

처마 반전은 경쾌하며

풍탁공을 2개 두었고, 각형 3단 층급받침, 절수구는 생략하였다.

 

11세기말 경 아닐까?

 

 

 

 

 

예전 답사 때에

느티나무 아래에 앉아 길손에게 물을 권하던 할머님들은 잘 계신지.

 

추억 반추에 익숙한 일상

그래도

그 하나하나 편린들이

마냥 그립다.

 

2019.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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