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안양시

안양...관악산 불성사 마애부도

임병기(선과) 2019. 2. 19. 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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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사

반월암.삼막사.염불암.망월암에서 하산하여 마지막으로 들렸다.


불성사에 관한 소개는 여러 자료가 넷상에 등재되어 있지만 동국대 이한성 교수의 " 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59)"에 가장 소상하게 실려 있다


"국기봉 이정표에서 보면 앞쪽 팔봉능선을 배경으로 바로 눈 아래 아담한 절이 납작 엎드려 있다. 450m 아래 불성사(佛性寺, 佛成寺, 佛聖寺)이다. 옛 기록에는 불성사 뒤 팔봉능선 봉우리를 불성봉(佛成峰, 佛聖峰), 의상대(義湘臺)라 불렀다. 봉은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 불성사편에는 불성사의 동봉(東峯)은 인봉(金+刃 峰), 나한봉(羅漢峰)이며 남봉은 문필봉(文筆峰) 원효대(元曉臺)라 하였다. 산 이름, 봉우리 이름도 시대에 따라 그 시대 사람들이 부르기 좋은 스타일로 바뀌어 온 것을 알 수 있다.

가파른 내리막길로 불성사에 닿는다. 절터는 옛자리이며 돌절구와 우물의 물맛은 옛것이로되 옛절의 모습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봉은본말사지에 전하는 불성사약지에는 신라 문무왕 15년(675년) 의상대사가 소암을 짓고 자리했다 한다(新羅文武王十五年也 巨智義湘祖師 傳授淸淨心法 未見其性故 乃棲於漢陽之南 果川冠岳山中…) 


(중략)


또한 세종실록에는 불성봉이 무너져 5명의 승려가 압사한 슬픈 기록도 전한다. (果川縣冠岳山佛成峯, 崩壓僧舍, 五人死 1428년 5월) 선조 때(1590년)에는 절이 불타 재창하였고, 1905년에는 또다시 절에 불이나 연로한 비구니 스님 한 분이 소사(燒死) 했으며, 1936년에도 절이 불타는 아픔을 겪었다. 이중환 선생의 택리지(擇里志)에서 관악산을 화성산(火星山)이라 했는데 유독 불성사는 화재의 아픔이 많았다. 그 결과 문화재로 등록될 만한 옛 것은 남아 있는 것이 없는 듯하다.


선조 때 우의정을 지낸 청천당(聽天堂) 심수경 선생은 75세, 81세에 득남했다는 전설적 인물인데 그의 시집에 불성사에 대한 3편의 시를 남겼다. 호(號)처럼 하늘의 뜻에 따르고(聽天) 불성사 산길 자주 오르며 몸과 마음을 닦으셨던 모양이다. 옥담시집(이응회), 동악집(이안눌), 관양집(이광덕), 본암집(김종후), 존재집(박윤묵), 난곡집(정길)에도 불성사에 대한 시편이 남아 있다" (하략)


  

서울대 수목원 후문에서 1.5KM


 

불성사 마애부도


 

절 입구 직전 고갯마루 좌측 바위면에 새겨져 있다.


 

바위면에 종형 탑신과 보주를 돋을새김하였으며,

정방형의 감실과 하부에 원형 사리공을 마련한 석종형마애부도이다.


 

모든 자료에 비구 각원선사 比丘覺圓禪師 마애부도라고 칭하지만 실제로는 사師 는 확인되지 않으며,

훼손된 흔적도 육안으로는 구분되지 않는다.

또한

감실 아래쪽에도  사師자는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감실을 중앙에 두고 아래 위에 띠어서 부도 주인공 글씨를 새기는 것도 보통 상식에는 맞지 않다.

그렇다면

사師는 지금은 망실된 부도 바깥  마감재에 새겼던 것일까? 

 


감실 위쪽

비구각원선 比丘覺圓禪

주지스님께서 각원대사는 서산대사의 법손으로 전하며 불교인명사전에 등재된 스님이라고 말씀하셨다.

 


감실 우측

병진 월일丙辰八月 日

병진년이 어느해(1736.1796.1856.1916)인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번암 채제공이 1786년에 쓴 유관악산기遊冠岳山記에 불성사 스님들이 언급되어 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일행을 마중 나온 승려가 4~5명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당시에는 제법 큰 절이었던 것 같다.

이를 단초로 병진년은 1796년으로 추정하고 싶다.


번암 유관악산기遊冠岳山記에서 발췌(출처/다음)


내 일찍이 들으니 미수(眉수) 허목(許穆) 선생은 여든세 살 때 관악산 연주대에 올랐는데 걸음이 나는 것 같아 사람들이 신선처럼 우러러보았다고 했다. 관악산은 경기 지방의 신령한 산이다. 그리고 선현들이 일찍이 노닐던 곳이다. 옛날부터 한 번 그 위에 올라가서 마음과 눈을 상쾌하게 하고 선현을 태산처럼 사모하여 우러르는 마음을 기르고자 하였으나, 생각만 있을 뿐 일에 얽매여 이루지 못하였다.


정조 10년 봄에 노량의 강가에 거주하니 관악산의 푸르름이 거의 한 눈에 들어오는 듯하여 마음이 춤추듯 움직여 막을 길이 없었다.
4월 13일 이웃의 이숙현과 약속하고 말을 타고 출발했다. 수행하는 집안 아이들이 또한 대여섯 명이 되었다. 10리 남짓 가다가 자하동에 들어가서 한 칸 정자 위에서 쉬었다. 정자는 즉 신씨의 별장이었다. 시냇물이 산골짜기로부터 흘러오는데 숲과 나무들이 그것을 덮고 있어 아득히 그 근원을 알 수 없었다. 물이 정자 아래에 이르러 돌과 부딪쳐 튀는 물방울이 되어 뿌리고 고인 것은 푸른 못을 이루고는 다시 흘러서 동문을 한바퀴 돌고 가는 것이 마치 피륙을 바래는 것 같다.


언덕 위에는 진달래가 한창 피어 어우러져서 바람이 불면 그윽한 향기가 물을 건너서 코를 간지럽힌다. 아직 산에 들어가기도 전에 가슴이 서늘하여 멀리서도 정취가 그만이다. 정자를 거쳐서 10리 남짓 가니 길이 험하고 높아서 말을 타고 갈 수가 없었다. 여기서부터는 타고 왔던 말과 함께 하인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가기로 하였다. 칡덩굴을 뚫고 골짜기를 지나는데 앞에서 길을 인도하던 사람이 잘못하여 절 있는 곳을 잃어 버렸다. 동서를 분별할 수가 없고 해도 얼마 남지 않았으나 길에는 나무꾼도 없어서 물어볼 수도 없다. 수행하는 자들이 혹은 앉기도 하고 혹은 서기도 하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홀연히 보니 이숙현이 나는 듯 빠른 걸음으로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서 좌우를 두리번거리는 것이 보였으나, 잠깐 사이에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어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이상하게 여기기도 하고 또 나무라기만 할 뿐이었다. 그때 갑자기 흰 장삼을 입은 중 네댓 명이 어디서부터인지 빠른 걸음으로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수행자들이 기뻐 어쩔 줄을 몰라하여, "중이 온다!"고 환성을 질렀다. 아마 이숙현이 멀리 절 있는 곳을 찾아내고는 먼저 가서 우리 일행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린 모양이었다.


중에게 인도되어 4,5리쯤 가서 절에 닿았다. 절 이름은 불성사(佛性寺)였다. 절은 삼면이 산봉우리로 둘러 있고 앞면만이 훤하게 트여서 막힘이 없었다. 문을 열어 놓으면 앉으나 누우나 눈으로 천리를 바라볼 수 있다.

이튿날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아침밥을 재촉해 먹고 소위 연주대라는 곳을 찾기로 했다. 건장한 중 몇 명을 골라 좌우에서 길안내를 하도록 하였다.


중이 말하기를, " 연주대는 여기서 10리 남짓 가야 하는데 길이 몹시 험하여 나무꾼이나 중들도 쉽게 올라가지 못합니다. 기력이 감당하시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 한다. 나는,  " 천하만사는 마음이라네. 마음은 장수이고 기운은 졸병과 같은 것일세, 장수가 가는데 졸병이 어찌 안 갈 수 있겠는가?" 하고 웃어 념겼다.


 

 

 

 


마애부도 내력을 알려주신 주지스님, 현장까지 직접 안내해주신 보살님께 감사드립니다

추운 날씨인데 따뜻한 차 한잔 마시고 가라는 보살님의 마음 깊이 간직하겠습니다

()()()


2019.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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