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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포항시

포항...도음산 천곡사

by 임병기(선과) 2019.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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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카페 몇몇님과 다녀온지가 언제 인지.

까마득하다.

기억속의 부도전도 새단장을 하여 옛추억을 무색하게 하였다.

 

천곡사 

우리 조상들은 영험이 있는 좋은 물을 소중히 여겼고 또 사찰의 창건으로 이어지는 일들이 많았다. 천곡사의 창건에도 영험있는 물이 관련되어 있다. 선덕여왕이 평소 원인을 모르는 피부병으로 고생하고 있다가 지금의 천곡사가 자리한 천곡령(泉谷嶺)을 찾아가 약수로 며칠 간 목욕하였더니 피부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이에 감동한 선덕여왕은 경주로 돌아가자마자 자장 율사에게 명하여 천곡령에 사찰을 짓게 하였고, 자장 율사는 창건 불사를 마치고 천곡사라 했다고 전한다. 이때의 약수가 지금 경내의 우물로 석정(石井), 혹은 소천(素泉)으로 부르는 샘물이라고 하는데, 이 우물은 신기하게도 정월 대보름이면 물이 용솟음을 쳤으며 가뭄이 아무리 극심해도 물이 마르는 법이 없다고 한다.


또한 우물물은 스스로 자정력(自淨力)을 보이고 있는데, 날씨가 차가워지면 뿌얘졌다가 따뜻해지면 2.2m 우물 밑바닥의 모래알 하나하나를 셀 수 있을 만큼 수정같이 맑아진다고 한다. <BR>도음산 자락의 천곡사 계곡은 천혜의 자연 보고로 알려져 있다. 천곡사 계곡에서는 2001년 고란초 군락지가 발견되기도 했는데 고란초는 약수가 흐르는 벼랑에 청초한 자태를 드러낸다. 천곡사 아래 1.2km 거리에 이르는 계곡에서 발견된 수백 포기의 대규모 고란초 군락지는 95년 환경부가 고란초 보호구역으로 지정한 거제시 하청면 자생지에 버금가는 것으로 평가된다. 고란초는 해마다 그 수가 줄어들어 멸종 위기 식물 제99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충남 부여읍에 있는 고란사(皐蘭寺) 뒤의 절벽에 자라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흥해읍 천곡사 일대는 포항시 두호동과 경주시 양북면 송전리, 울산의 신현리와 함께 화석 산지가 많은 곳으로 이곳에서 많은 바다 생물과 식물 화석들이 발견된다고 한다. 천곡사 관음전에 서면 멀리 포항 앞바다, 호미곶이 바라다 보인다. 밤에는 오징어배의 불빛이 장관을 이루고 새벽이면 일출로 또한 장관이다. 천곡사는 고스란히 다 가졌다. 맑은 물과 산·계곡, 그리고 바다까지. 작은 절 천곡사는 급하게 스쳐 지나가면 아무 것도 보고 갈 수 없는 큰 절이다(포항시청)

 

 

천곡사 석조보살좌상(한건택님 사진)

사시예불중이어서 참배하지 못 하였다.

 

복장유물이 발견되지 않았으나 18세기에 조성된 석불로 전하며,

두건을 착용하고 있어 지장보살로 추정된다.

두건 아래로 보발이 흘러 내린 존상은 흔치 않은 모습이다.

 

 

옛향기는 그리움을 더하고

 

 

그리움은 옛님을 불러온다.

 

 

대좌위에 계셨던

그 옛님을.

 

관음전 외벽 창건설화 벽화

 

 

선덕여왕의 피부병

 

 

천곡령 약수 이야기를 듣고

 

 

약수를 확인

 

 

선덕여왕의 천곡령 약수터 행차

 

 

치료

 

 

선덕여왕의 명으로 천곡사 창건

 

 

창건주 자장율사의 법회

 

 

소천

창건설화속의 우물

 

 

 

부도전

산길을 제법 올랐다는 기억이 남아 있는데.

담장을 두르고 따뜻한 양지에 새롭게 단장하였다.

 

 

월풍당月風堂.1716년

방형지대석,양련이 새겨진 기단.탑신.옥개석.상륜

각 부재의 암질이 다르다.

 

월풍당 법청月風堂法淸

법청스님은 1689년에 세운 청곡사 사적비에 등장하는 스님이다.

 

 

월풍당대사법청부도전비. 강희오십오년병신이월일

月風堂大師法淸浮屠前碑, 康熙五十五年丙申二月日

 

 

기단부

 

 

원구형 탑신

 

 

처마의 팔괘

길상의 상징으로 보인다.

 

내림마루 끝에는 귀꽃도 새겼다.

 

 

옥개석 상부 卍자 문양

역시

길상의 상징이다.

 

 

상륜

노반위에 보주와 받침을 대칭으로 조성하였다.

 

 

 

수운당대사 보섬(삼곡당자오).1703년

방형지대석.부등변 팔각 탑신. 사모지붕형태의 옥개석

보경사 원진국사 부도의 영향을 받은 부도

 

 

수운당대사보섬.삼곡당대사자오사리비

강희사십이년계미시월일립

樹雲堂大師寶暹, 三谷堂大師自悟舍利碑,

康熙四十二年癸未十月日立

 

 

해월당대사 초일.1714

해월당은 서산대사의 7대 법손이다.

풍탁을 달았던 흔치 않은 부도이다.

 

 

청허당칠대지법손 해월당대사초일부도전비

강희오십사년을미십이월립

淸虛堂七代之法孫, 海月堂大師楚一浮屠前碑,

康熙五十四年乙未十二月日立

 

 

월하당 부도.1743년

옛사진에는 탑신이 없었다.

 

 

2002년 문화유적분포지도

 

 

월하당대선사탑.건륭팔년계해이월이십일립

月河大禪師塔, 乾隆八年癸亥二月二十日立

 

 

태허당 두혜.1740년

비문의 해월당법제海月堂法弟…로 추측컨데

 

해월당은 서산대사의 칠대법손이다.

태허당이 해월당의 법제자이면  서산대사의 팔대손임을 알 수 있다.

(아래 계영당부도에도 서산대사 팔대손이라는 명문이 있다)

 

태허당두혜.건륭오년경신삼월.해월당 법제

太虛堂大師社惠, 乾隆五年庚申三月, 海月堂法弟

 

 

 2002년 문화유산 분포지도

 

 

여러 기의 혼합

팔각부재는 2002년에는 월하당 부도에 있었다.

 

 

 

흥해 천곡사 사적비.1689년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에서 옮김)

 

興海 泉谷寺事蹟碑
泉谷寺事蹟碑(篆 題)
國之伽藍碁置星布間多奇踪異聞可詫可傳者而非出於禪家釋子卽畸人誕士遊方外者之爲耳」
君子人烏足一一是憑而記述之哉惟茲興海郡之泉谷寺亦海東之一巨刹也肇自新羅善德王時所謂」慈藏律師者而其祝釐之有驗寳珠之攸藏奇詭有足稱者貞觀至正之間廢興不一修改亦勤其間事蹟緇」
流有歷歷傳說者是皆可記而抑桑門之例規矱耳不必揚㩁而吾於此獨有所欽聳感歎而不欲泯者惟我」
世祖大王於興學設敎化民成俗之餘乃復游戱釋部博施緇徒於天順年間 親洒御墨以遺寺僧永作寳」
券俾加完護銀鈎玉畫炳然尙存赬肩輩至今誇示而忻聳此刹之能保萬刼增光不替者罔非 聖祖攸賜卽澤老相公龍門識記所謂太平餘光者非耶此眞綺耳聳觀可述者矣此寺重刱時化主則」
釋玄元者而古無記僧法敏等將欲識顚 末鑱之石來余索拙語甚勤余素不識釋家津筏且服朱紫」
陽不書寺額之戒初甚拒之而不但請之益力有難終辭實有感於 聖祖之遺墨畧道如是云 屠維大荒落孟夏下澣完山柳生記

나라에 절이 바둑돌을 놓고 별이 펼쳐지듯 하여 그간에 기이한 자취와 특이한 견문이 많은데, 자랑하고 전할 만한 것은 불가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승려는 기이한 사람이요 허탄한 선비이며 세상 밖에서 노니는 사람일 따름이다. 군자된 이로 어찌 이를 하나하나 믿어 기술할 수 있으리오. 오직 이 흥해군(興海郡, 경상북도 포항시)의 천곡사(泉谷寺)는 또한 해동의 한 거찰이다.

 

신라 선덕왕(善德王, 632~647년) 때 처음 창건되어 이른바 자장율사(慈藏律師, 신라 선덕여왕 때의 고승. 중국에서 불사리를 들여와 통도사 등에 사리탑을 세우고 황룡사를 창건함)라는 이가 복을 빌어 영험이 있고 보주(寶珠)를 잘 간직해왔으며 기궤한 일이 많았다고 일컬어 왔다. 정관(貞觀) 연간(627~649년)에서 지정(至正) 연간(1341~1367년)에 이르는 사이에 퇴락하고 부흥하기를 반복하여 중수하는 것도 또한 부지런히 하였다. 그간의 사적은 승려 중에 또렷하게 이야기를 전한 자가 있어 모두 기록할 만한데 불가의 예를 억제하여 법도에 따를 뿐이기 때문에 크게 드날리려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나는 이에 홀로 공경하고 감탄한 바가 있어 없애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 생각건대 우리 세조대왕께서 학교를 일으키고 교화를 베풀며 백성들의 풍속을 이룬 끝에 다시 불교에 노닐어 승려들에게 널리 베풀어 천순(天順) 연간(1457~1464년)에 친히 글을 써서 절에 보내셨다. 승려들은 영원히 보권(寶券)으로 만들어 더욱 완벽하게 수호하여 은구(銀鉤) 옥획(玉畫)이 밝게 지금까지 보존되어 붉은 어깨의 무리들(붉은 가사를 입은 승려들)이 오늘날까지 자랑해 보이며 기뻐하고 공경한다. 이 절이 능히 만겁을 보존하여 빛을 더해 바뀌지 않음을 기뻐하고 공경함은 성조(聖祖)의 하사하심이 아님이 없다. 곧 택로(澤老) 상공 용문(龍門)이 기록한 이른바 태평성대의 남은 빛남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참으로 아름다워 삼가 살펴보고 글로 지을 만한 것이다.
 

이 절을 중창할 때의 화주(化主)는 승려 현원(玄元)인데 옛 기록이 없어 승려 법민(法敏) 등이 그 전말을 기록하여 돌에 새기고자 하여 나에게 와서 글을 구함이 매우 열심이었다. 나는 본래 불교의 나루와 배[세상의 고해를 건네주는 도리 곧 불법]를 알지 못하고 또 자주색 관복을 입었으며 절의 현판을 써보지 않은 경계 때문에 처음에는 심히 거절했지만 간청을 더욱 힘들여 한 때문만이 아니라 끝내기 어려운 말이 있기에 실로 성조의 유묵(遺墨)에 감응된 바가 있어 이처럼 간략히 말한다.
도유(屠維, 己) 대황락(大荒落, 巳) 4월 하순에 완산(完山) 유생(柳生)이 적는다.

 

 

康熙二十八年己巳四月  立
佛粮入畓李元耉  海英  朴以葉  嘉善姜彦 大施主秩李元耉  愛先民  嘉善崔應南  嘉善處信  嘉善崔士  孫承燁  徐亂  高▨雄  崔抑萬  朴七同 三海  姜乫南  宋正必  崔白中  宋年山  金哲石  吳斗一  金玉先 河貴先  韓尙周  坦熙  柳承立  孔㖋同  別坐法淸  卓性  供主世沉  別坐哲民  寺中道林  道修  印圭  寳熈  性日石井石砌朴年上  石柱化主法敏  崔▨▨ 石手正仁  先甘

 

강희 28년(숙종 15, 1689년) 기사 4월 세움

불량답(佛粮畓)

이원구(李元耉), 해영(海英), 박이엽(朴以葉), 가선(嘉善) 강언록(姜彦彔)
대시주질(大施主秩)

이원구(李元耉), 애선씨(愛先氏), 가선(嘉善) 최응남(崔應南), 가선 처신(處信), 가선 최사병(嘉善崔士병), 손승엽(孫承燁), 서병란(徐병亂), 고일웅(高一雄), 최억만(崔抑万), 박칠동(朴七同), 계해(彐海), 강갈남(姜乫南), 송정필(宋正必), 최백중(崔白中), 송연산(宋年山), 김철석(金哲石), 오두일(吳斗一), 김옥선(金玉先), 하귀선(河貴先), 한상주(韓尙周), 탄희(坦熙), 류승립(柳承立), 공갯동(孔㖋同)
별좌(別坐) 법청(法淸), 탁성(卓性)
공주(供主) 세침(世沉)
별좌(別坐) 철민(哲民)
사중(寺中)

도림(道林), 도수(道修), 인규(印圭), ▨희(▨熙), 성일(性日)
석정(石井) 석체(石砌) 석주(石柱) 화주(化主) 법민(法敏), 박연상(朴年上), 최▨▨(崔▨▨)
석수(石手) 정인(正仁), 선감(先甘)

 

 

 

추운당

석종형 부도.일석으로 조성된 듯한 보주는 훼손

비문으로 추측컨데

추운당은

청허당 서산대사의 법손(9대?)으로 보인다.

 

청허. 추운당.건륭

淸虛

樞雲堂

乾隆

 

 

계영당 부도.1737년

옛사진에는 중간의 부재가 없었다.

계영당은 서산대사 팔대법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계영당 부도. 청허당 팔. 계영당우.건륭2년

桂影堂 浮屠: 1737

淸虛堂 八..., 桂影堂宇, 乾隆2

 

 

2002년 문화유적분포지도

 

 

청파당.1744년

 

계영당스님의 문인

 

 

계영당 문인.청파당대사뇌선.건륭9년갑자오월일

桂影堂門人, 淸波堂大師雷善, 乾隆九年甲子五月日立

 

 

 

 

 

설(운)화당 처신.1719년(추정)

 

 

 

현재 남아 있는 명문

오십팔년.설(운)화당대사.기해오월일립

五十八年, 雪(雲)華堂大師. 處信浮屠碑, 己亥五月日立

 

즉 강희 오십팔년이 기해(己亥)년으로 1719년으로 추정하였다.

건륭 58년은  1793년이며, 계축(癸丑)년이다.

 

 

 

 

 

 

 

 

천곡사 부도전

18세기 초반~18세기 후반. 천곡사에서 니르바나에 드신 스님들의 부도이며

청허당 서산대사의 법손,

서산대사의 법손 문인들의 부도가 대부분이다.

 

이로 미루어

18세기에 천곡사는 선풍을 날리던 선승들이 주석하였음을 미루어 유추할 수 있다.

 

아쉽게도

현재 전하는 사적비는 17세기 말에 세워져 18세기 천곡사의 사적은 전하지 않는다.

 

 

2019년 첫 걸음

금년에도 즐겁고 유익한 답사가 되길 기원한다.

 

2019.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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