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진국사 부도 우리님들이 익히 인지하고 있는 부도이다. 오늘은 언제적에 뵈었는지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아 들렸다.
문화재지정명칭은 보경사 승탑이다.
보경사 뒤편 산길을 200여미터 오르면 된다.
전형적인 8각원당형(圓堂形) 부도이다.
3단 하대석 아래 2단은 아무런 장식이 없으나, 상단석에는 복련이 조식되었고 상부에는 2단 각형 받침을 조출하였다.
중대석
상대석 하부에는 1단 받침, 앙련을 조식하였고 상부에는 탑신 굄을 조출하였다.
탑신석 8각으로 고준하며, 우주를 돋을새김하였고, 남면에 자물쇠를 표현하였다. 원진국사 부도는 이러한 팔각기둥형 탑신석의 시원으로 이후 송광사 2세 진각국사로 양식이 이어진다.
옥개석
상륜부 앙련 위에 복발을 올렸는데, 꽃무늬를 화려하게 새겼다. 그위에 축약된 보륜(?)을 올리고 앙화와 보주를 얹었다.
원진국사 부도 탑신이 세장한 팔각의 기둥형부도로 순천 송광사 보조국사 이후에 조성된 16국사 부도로 그 작례가 이어지며 원진국사 비문에도 국사와 송광사 보조국사와의 교류를 담고 있어 양식의 친연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원진국사비로 미루어 국사의 부도로 추정되며, 건립시기는 1224년(고종 11)으로 여겨진다.
하대석
기단부 상대석.중대석. 하대석
상대석.중대석
탑신석 보경사 경내의 오층석탑 자물쇠와 흡사하다
탑신석과 옥개석
상륜부와 옥개석
상륜부와 옥개석
원진국사 부도 보경사 외에 나주 불회사에도 전한다.
나주 불회사
원진국사(圓眞國師) 부도 많은 사람들이 원진국사(圓眞國師) 부도를 1403년 불회사를 대대적으로 중창한 원진국사(元稹 國師) 부도로 혼동하고 있다.
또한 불회사 부도는 포항 보경사 부도비 조성(1224년)후 후대(1317년)에 분사리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떤 이유에서 분사리 하였을까?
원진국사통조지탑(圓眞國師通照之塔) 延祐四年丁巳五月日立(1317년)
원진국사(圓眞國師. 1171~1221)
(부도비문 해석본을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에에 옮겨왔다.)
원진국사(圓眞國師)비명(碑銘) [제액(題額)]
스님의 휘는 승형(承逈)이요, 자는 영회(永廻)이며, 속성은 신씨(申氏), 상락(上洛)의 산양(山陽)출신이다. 선대(先代)는 대대로 유가(儒家)이었다.아버지의 이름은 통한(通漢)이니, 이(以) (결락) 내급사(內給事)로 있다가 금성(錦城)군수(郡守)로 부임(赴任)하여 재임(在任) 중에 순직하였고,어머니도 또한 일찍 돌아가셨다. 그리하여 스님은 3살 때 고아(孤兒)가 되어 숙부(叔父)인 시어사(侍御史) 광한(光漢)에 의해서 국양(鞠養)되었다. 총명하고 영특하여 해포(孩抱)로부터 전혀 희완(戲翫)하는 일이 없었으며, 7살 때 운문사(雲門寺) 연실선사(淵實禪師)를 은사로 하여 스님이 되었다. 모든 언행(言行)과 거지(擧止)가 모두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희세(希世)의 신동(神童)이라고 입을 모았다.
13살 적에 경상북도 문경군 가은면 원북리(院北里)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嵓寺) 동순(洞純)스님을 은사로 하여 스님이 되었다. 다음 해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사(金山寺) 계단(戒壇)에서 비구계(比丘戒)를 받았다.스님은 명교(名敎)를 좋아하지 아니하고, 교종(敎宗)을 벗어나 뜻을 고상(高尙)한 데 두어 운종(雲蹤)과 학태(鶴態)처럼 초연 자약(超然 自若)하여, (결락) 깊은 숲속에서 정진(精進)하려 하였으나, 그러나 늙은 동순(洞純)스님을 두고 훌쩍 떠날 수가 없었다. 정사년(丁巳年)봄 해마다 연례적(年例的)으로 개최하는 보제사(普濟寺)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석하고 있는 중, 순공(純公)이 입적하였다는 부고를 받고,장례식에 떠나기 전 시어사(侍御史)인 숙부(叔父)를 찾아가서 여쭙되, 인생은 마치 아침 이슬과 같고, 부귀는 또한 뜬 구름과 같아서, 저는 세상 살이가 마치 밀을 씹는 것과 같나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스님께서 입적(入寂)하였으므로 곧 떠나서 나의 초지(初志)를 성취하리라 하고는, 석장(錫杖)을 짚고 곧바로 떠났다.
이때 명종(明宗)임금이 조회(朝會) 때 신하들로부터 스님의 도행(道行)이 고매하다는 보고를 듣고, 유사(有司)에게 조칙(詔勅)을 내려 스님의 도행을 초록(抄錄)하였으니, 이는 상례(常例)를 벗어난 조치인 것이다. 이 해 가을 종문(宗門)의 기숙(耆宿) 대덕(大德)스님들이 모두 강하게 권하므로, 광명사(廣明寺) 선불장(選佛場)에 나아가서 어려운 질문에 대답하니, 마치 공허(空虛)에 전하는 소리와 같으며, 유창하여 날아가는 듯한 변재(辯才)는 층암절벽(層岩絶壁)에서 떨어지는 물과 같아서 듣는 사람들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그리하여 선불장에 참석한 중사(中使)와 증관(證官)과 석덕(碩德)들이 모두 상(床)에서 내려 공손히 서서 경청하였으므로, 상상품(上上品) 승과(僧科)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스님은 이미 명리(名利)에 대하여 전혀 마음에 개체(芥滯)함이 없고, 다만 두루 명산승지(名山勝地)를 순유(巡遊)코자 할 뿐이었다.
드디어 조계산(曹溪山)으로 가서 보조국사(普照國師)를 참방하고 법요(法要)를 물은 다음,강원도 강릉군 오대산(五臺山)으로 가서 문수보살님 앞에서 예배기도(禮拜 祈禱)를 하고 명감(冥感)을 받았다. 이어 춘천(春川) 청평산(淸平山)으로 진락공(眞樂公)의 유적을 답사하면서 김부철(金富轍)이 지은문수사기(文殊寺記)를 살펴보니, 공(公)이 문인(門人)들에게 이르기를, 수능엄경(首楞嚴經)은 심종(心宗)을 증인(證印)한 것이므로, 불교의 진리를 발명(發明)함에 있어 중요한 내객(內客)이다라는 말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
태화(泰和) 8년 무진(戊辰)에 왕명으로 개골산(皆骨山) 유점사(楡岾寺)에 주지(住持)토록 하였다.경오년(庚午年) 가을 당시 귀척(貴戚)들이 경기의 연법사(演法寺)에서 법회를 개설하고, 왕에게 주청(奏請)하여 스님을 법사(法師)로 모시기로 하고, 편지를 보내어 고청(固請)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경사(京師)로 나아갔다. 지금의 상국(相國)인 청하공(淸河公)이 문하(門下)의 잠리(簪履)수천 명을 데리고 나와 도성의 동쪽에 있는 곽주사(郭注寺)로 영접하되, 기꺼이 경개(傾盖)로 환대하고 구의(摳衣)의 예를 다하였으니, 마치 돌로써 물에 던짐에 문연(脗然)히 상합(相合)함과 같았다. 청하공(淸河公)은 이때부터 더욱 선풍(禪風)을 중(重)히 여겨 조계종의 법유(法乳)로 하여금 우리나라에 진작(振作)하는데 진력(盡力)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숙연(宿緣)의 소감(所感)이 아니겠는가?
계유년(癸酉年)에 이르러 지금의 고종(高宗) 임금께서 천조(踐祚)하고 선왕(先王)인 강종의 뜻을 계승하여 2년 갑술(甲戌)에 곽주사(郭注寺)를 중수하여 낙성법회(落成法會)를 열어 선지(禪旨)를 크게 천양(闡揚)하고 선사(禪師)의 법계를 비수(批授)하였다.그리고 이 해 봄에 또 고종 임금이 스님을 비전(秘殿)으로 초청하여 상의직장(尙衣直長)동정(同正) 서치(徐稚)의 아들로써 자기 대신 삭발하여 스님이 되게 하였다. 다음 해 가을에 또 대선사(大禪師)의 법계를 비가(批加)하고, 조칙(詔勅)을 내려 동경(東京) 이내(理內)인 청하현(淸河縣) 보경사(寶鏡寺)에 주지(住持)토록 하였다. 이보다 앞서 청평산(淸平山) 문수사(文殊寺)와 설악산(雪嶽山) 한계사(寒溪寺)에 주지(住持)토록 명하였으나, 모두 고사(固辭)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지금 보경사의 주지를 맡은 것은 강권(强勸)에 의한 것이지, 결코 스님의 뜻은 아니었다. 운문산(雲門山)에 복안사(伏安寺)란 절이 있었는데, 항적(降賊)의 주장(主長)들이 연수(淵藪)에 모여 있던 구염(舊染)의 좋지 못한 형태가 아직까지 말끔히 정돈(整頓)되지 않아서, 당두(堂頭)와 노숙(老宿)스님들이 크게 염려하고 있었다. 이들을 새로운 생활의 길로 개도(開導)코자 하여 스님을 초청해서 특별히 법회(法會)를 열고, 육조단경(六祖壇經)을 강설하였더니, 군적(群賊)들이 모두 크게 감화를 받아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는 흉폭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이로부터 그 지방 일대(一帶)가 베개를 높이 베고 편안히 잠을 잘 수 있는 태평세상(太平世上)이 되었다.
이때에도 날이 크게 가물었다. 스님께서 이르기를 지금 비는 내리지 않고, 불볕 더위가 계속함은 재기(災氣)가 덮인 까닭이니, 말라가는 못자리가 타고 있는 농작물(農作物)을 어찌 그대로 보고만 있겠는가? 하고, 한 잔의 차(茶)를 바위 위에 올려 놓고 아라한(阿羅漢)님께 기도하되, 선월화상예참문(禪月和尙禮懺文)으로써 예식 도중 아직 범창(梵唱)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단 비가 내려 전답(田畓)이 완전히 해갈(解渴)되었다.
마지막으로 원정(元正)과 청림(靑林)등 두 선로(禪老)와 함께 종용(從容)히 도담(道談)을 나누었다. 8월 28일에 이르러 삭발하고, 목욕하였다. 9월 2일 시자(侍者)를 불러 옷을 갈아 입고, 단정히 승상(繩床)에 앉아 범패(梵唄)를 읊게 하였다. 이때 시자(侍者)가 스님께 임종게(臨終偈)를 청(請)하니, 스님은 눈을 뜨고 한참동안 노려 보고 이르시기를, 이 어리석은 놈아! 내가 평생동안 한 게송(偈頌)도 지은 적이 없는데, 이제 와서 무슨 게송을 지어달라는 말인가? 하시고, 승상(繩床)을 세 번 내리친 다음, 곧 적요(寂寥)하므로, 가까이 가서 보니 이미 입적하시었다. 그러나 안색(顔色)은 조금도 변하지 아니하여 온 몸이 마치 살아 있을 때와 같았다.
다음 날 영골(靈骨)을 수습(收拾)하여 신구산(神龜山)으로 이장(移葬)하고 탑(塔)을 세웠다. 세수는 51이요, 법랍은 37(비문에 24는 오치(誤植)이다)세였다. 고종(高宗) 임금께서 부고를 듣고 크게 진도(震悼)하시면서 국사(國師)로 추증(追贈)하고, 시호를 원진(圓眞)이라 증정(贈呈)하였다. 문인(門人)들이 스님의 탑비(塔碑)를 세우고자 조정(朝廷)에 건의(建議)하였다.
그리하여 임금께서 신(臣) 공로(公老)에게 비문(碑文)을 지으라고 하명하였으나, 신(臣)은 그 동안 문직(文職)으로써 막중한 추근(樞近)의 위치에 있으면서 폐하(陛下)를 욕되게 하고 있을 뿐아니라, 학식(學識)이 천박(淺薄)하여 도저히 비문을 지을 수 없다고 굳게 사양하였으나, 하는 수 없이 문도(門徒)들이 기록한 행장(行狀) 자료에 의거하여 억지로 서술(序述)하고 명(銘)하여 가로되,
그 많은 종파들이 천하(天下)에 유통(流通) ①
원진국사 영정
부도비 지대석과 일석으로 조성된 귀부 위에 비신을 올렸다. 귀부는 통일산라 시대.고려초기 귀부의 역동적인 모습이 둔화된 형상이다. 여의주를 문 귀부의 등에는 6각 귀갑안에 왕사를 상징하는 王자를 새겼다. 등위에 앙련이 조식된 방형 비좌를 올리고 비신을 세웠다. 비신 측면에는 덩굴문을 조각하고 상부는 양측면을 모죽임한 이른바 규수(圭首)형으로 고려중기 이후에 나타나는 비신 형태이다. 상부에 원진국사비명(圓眞國師碑銘)이라고 쓴 해서체의 제액을 음각하였다. 규수형 비신 서봉사지현오국사비(1185).보광사대보광대선사비(1358).억정사대지국사비(1393)에서도 볼 수 있다.
비신 후면
귀부 정면
측면 아가미가 많이 약화 된 모습이다.
측면 앞발에 물갈퀴를 새겼다.
등과 꼬리 규수형 비신의 작례
원진국사비(1224) 용인 서봉사지 현오국사비(1185) 부여박물관.보광사대보광대선사비(1358) 충주 억정사 대지국사비(1393)
2018.12.05 |
아래는
송광사 16국사 부도
1.보조국사 지눌(송광사 관음전 뒤)
2.진각국사 혜심(송광사 광원암)
3.청진국사 몽여(송광사 청진암지) 4.진명국사 혼원(불명)
5.자진국사 원오(보성 대원사)
6.원감국사 충지(송광사 묘적암지와 은적암지 중간)
7.자진국사 일인(송광사 불일암)
8.자각국사 도영(송광사 감로암) 9.자오국사 담당성징(불명) 10.혜감국사 만항(불명) 11.자원국사 경린(불명) 12.혜각국사 경총(불명)
13.각진국사 자원(영광 불갑사) 14.정혜국사 복암(불명) 15.홍진국사 선현(불명)
16.고봉국사 법장(송광사 광원암과 보조암지 사이)
2018.11.27 |
'경상북도 > 포항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포항...도음산 천곡사 (0) | 2019.01.27 |
---|---|
포항...보경사 서운암 부도전 (0) | 2018.12.12 |
포항...보경사 오층석탑 (0) | 2018.12.10 |
보경사에서 (0) | 2018.12.08 |
포항...도암사 석조관음보살좌상 (0) | 2017.1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