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합천군

합천...가야산 봉천대 비로자나좌상

임병기(선과) 2016. 10. 22.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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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해인사 부도 순례에 이어 두번째 방문

 

오늘은

5월1일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비로자나불을 뵙기 위해 산행길에 올랐다.

 

"해인총림 해인사가 내려다보이는 가야산 정상부 절터에서 석조비로자나불좌상<사진>이 발견됐다. 국립공원관리공단 가야산국립공원사무소(소장 윤용환)는 “최근 공원 내 해인사 일원 폐사지 모니터링 중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발견했다”며 “가야산에서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혔다.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은 불두는 훼손됐고 석조좌대를 제외하고 높이는 약 45cm이다. 주변에는 석축과 기와파편이 흩어져 있었다. 불상이 발견된 곳은 가야산 정상부로 고지 약 1200m 지점이며, 해인사가 내려다보인다. 등산로가 폐쇄돼 있어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조사에 참여했던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유적연구실장은 “조선시대 문헌인 <가야산유록>에 상소리암, 중소리암이란 명칭이 나오는데, 중소리암으로 비정한다”며 “이번에 발견된 비로자나불은 지역 불교사와 불교미술사 연구에 있어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가야산국립공원사무소 김진태 자원보전과장은 “이번 석조비로자나불 발견은 그간 꾸준히 진행된 역사문화자원 모니터링 사업의 성과이며, 앞으로도 더욱 효과적이고 체계적인 모니터링을 추진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불교신문3200호/2016년5월7일자]

 

 

기사 보도 후

국립공원측에 확인 결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해인사 석불입상 근처로 위치가 파악되었지만 쉽게 찾을 수는 없을 것 같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가 얼마전 현장을 답사한 오분향님에게 개략적인 정보를 확인하여 달넘새님과 길을 나섰다.

 

 

쉽게 뵐 자신이 있었지만

약 2~30분 동안 뵙지 못하고 먼저 민생고부터 해결.

점심 후에도 둘이 좌우로 흩어져 뒤진 끝에 인연을 짓게 되었다.

 

 

 

30여분 헤매다가 얻은 노루궁댕이 버섯.

 

 

 

중소리암지(?)

 

한강 정구 선생의 가야산 산행 글을 보자.

지금은 사라진 절집이 등장하지만 성주 백운동 심원사를 경유하여 중소리사,상소리사,봉천대, 가야산 정상길을 택한 듯 보인다.

비로자나불이 발견된 절터가 중소리사로 비정한다면 해인사 석불입상이 있는 절터는 상소리사일까?

 

1579년 9월14일, 맑음.
새벽에 일어나 앞마루에 앉아「근사록」몇 장을 읽다가 눈을 들어 구름 긴 산을 보니 온갖 상념을 지워 유훈(遺訓)의 전일한 뜻과 의미를 깨닫지 못하겠다. 밥을 먹은 후, 지팡이를 짚고 몇 리를 갔다. 정각암(淨覺庵)이란 곳이 있는데 위치가 높아
내원사보다 경치가 좋은 것 같다.

어제 내원사에서 양정(養靜)이 그 깊숙하고 그윽한 경치가 마음에 들어 훗날 다시 와서 글을 읽겠다고 맹세하더니, 이곳을 그곳보다 더욱 좋아한다. 그래서 공숙(恭叔)이,"양정(養靜)은 이곳에서 또 글을 읽겠다는 맹세를 해야겠군."하였다. 어린 동자(童子) 하나가 안방 쪽에서 나오더니 절을 한다. 모습은 촌티가 나지만 과히 추하지 않은데, 어눌한 말로 스스로 자기의 고향과 가문을 상세하게 댄다. 그는 바로 나의 중표제(中表弟 -내외종 아우) 송씨(宋氏) 집 아이였다. 어머니를 여의고 배운 것이 없어 중을 따라 온 것이라 한다.

책을 펴놓고 시험삼아 읽게 했더니 글의 뜻을 모를뿐더러 구두(句讀)도 떼지 못한다. 이렇게 배우다가는 비록 10년을 배워도 글을 아는 사람이 못될 성싶다. 아, 한훤 선생의 후예가 어찌 이 지경이 되었는가 싶어 한참 동안 탄식하였다. 조금 쉬면서 피로를 풀려는데 중이 급히 와서 해는 저물고 갈 길이 멀다고 독촉이다. 그래 우리는 놀라 채찍을 들고일어났지만 날이 저물고 갈 길이 먼 경우가 어찌 이 산에서만 그러랴?

1리쯤 가서 성불암(成佛庵)에 도착했다. 백 유(伯愉)는 먼저 앞에 있는 대(臺)에 오르고 나는 곧바로 절로 들었더니 절은 정각암(淨覺庵)만하고 역시 오래되지 않았다. 중이 없어 마루와 방에 먼지가 뿌옇게 쌓여 잠시도 머물 수가 없다. 어제 심원암(深源庵)에도 중이 없어 들어가지 못했는데 이제 이곳도 이러니 이는 흉년인데다가 부역이 번거로와 산승(山僧)조차 견디지 못함인가? 어찌 그들로 하여금 곳곳마다 거처를 비우게 한단 말인가? 산의 중들이 이러하니 시골 백성들은 알 만하다. 궁벽한 시골 곳곳마다 비어 있는 집이 얼마나 될 것인가?

원명사(圓明寺)에 이르렀다. 산봉우리를 걸터 새로 지어 산뜻한 단벽(丹碧)이 내원사에 비길 바 아니어서 양정이 글을 읽겠다는 맹세를 또 해야 할 것 같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데 출발했다. 또 중소리사(中蘇利寺)·총지사(叢持寺) 등이 바위 절벽에 있으나 모두 중들이 살지 않는다.
상소리사에 들어가 잠깐 쉬었다. 봉천대(奉天臺)란 곳이 있는데 위치가 더욱 좋아 안목이 트이며, 수많은 골짜기와 봉우리들이 주위에 작은 언덕처럼 늘어서 있어 아득한 인간 세상이 마치 개미집 같고 곳곳에 보이는 촌락을 하나하나 셀 수 있다. 옥을 다듬어 놓은 듯한 산과 소나무 숲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이 완연하여 허리를 구부리면 손에 움켜쥘 듯하다.

 


그 가운데서 복건(輻巾)을 쓰고 조용히 지내면서 자기의 주견을 지키고 마음 속에 터득한 것을 즐긴다면 오늘 내가 대강 본 그 기상(氣像)이 또한 어떻겠는가. 안타까운 건 나에게 손이 있어도 친구들을 이끌고 함께 와서 구경하지 못한 것이다. 지해는 비록 억지로 따라 왔으나 이곳 경치가 이렇게 좋은 줄을 믿지 않으니 제 각기 분수가 있어 붕우의 힘으로도 억지로 할 수 없다. 그러니「논어(論語)」에 '인(仁)을 행하는 것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지 남을 말미암아 행하는 것이 아니다' 한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 제군이 각각 노력하여 게으르지 않아 후에 안계(眼界)가 넓어진다면 오늘 봉천대에 올라 본 안계만이 아닐 것이다.

양정(養靜)이,
"이곳 위치가 높기는 하지만 더 높은 상봉이 있으니 어찌 마음의 지위(地位)가 높아야 한다는 게 아닙니까? 여기에 한정시켜서는 안되겠습니다. "한다.
또, 주자의 운곡기(雲谷記)를 읽으니 가슴이 더욱 트여 몸이 주자가 노닐던 노봉(蘆峯)이나 회암(晦庵)사이에 와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겠다. 죽을 수어 점심을 먹고 출발했다. 이곳부터 길이 더욱 험준해서 걷기가 힘들어 절벽을 부여잡고 험한 고개를 마치 고기 꿰미처럼 한 줄로 늘어서 넘었다. 앞서 가는 사람은 두시사람의 이마 위로 가고 뒷사람은 앞사람의 발꿈치를 밟으며 갔다.

이렇게 6∼7리를 가 제일 높은 봉우리에 올랐다. 사방이 탁 트여 끝이 없고 다만 하늘과 구름이 먼 산 저쪽에서 맞닿은 게 원명사나 봉천대의 경치는 비교되지 않는다. 산 안팎에 푸르고, 붉고, 누렇고, 희게 펼쳐진 색이 무늬를 이루었는데 조물주의 지시에 따라 생성(生成)의 이치를 얻었다. 처음에는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더니, 어지러운 빛깔들이 서로 혼합되고 비쳐 유람객의 구경거리에 이바지하기 위한 것으로 인자(仁者)가 산을 보고 자성(自省)하는 것과 주자(周子 -송의 학자 주돈이(周敦 ))가 뜰의 화초를 베지 않고 완상하고 맹자(孟子)가 우산(牛山)의 나무를 보고 탄식한 것과는 비록 크고 작은 차이와 성쇠가 다르지만 군자가 물(物)을 보고 느끼는 생각은 처음부터 같지 않음이 없다.

 

 

중소리암 에관한 글은

1781년 4월21일 정위가 쓴 유가야산기에 구체적으로 등재되어 있다.

일행은 성주 회연서원에서 만나 홍유동을 경유 가야산에 올랐다.

 

"학사대로 부터 15리를 갔다.폐허가 된 산속암자터를 가리키며 승려가 '이곳은 폐사된 중소리의 옛터입니다. 언제 폐사된지는 알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깨진 기와와 무너진 돌들이 있었고, 또한 옛우물이 있었으며, 우물옆에는 팥배나무가 있었다.그앞에는 기이한 바위가 있는데 여러길 될만큼 우뚝하였다."

 

정위의 글을 더 읽어 보면

중소리암지를 경유하여, 수십보를 가니 도솔암터가 있고, 주변 분위기도 중소리암과 비슷하며,  더욱 험하고 위태로운 길을 몇리를 가서 폐사된 상소리사에 도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불상은

가파른 능선 큰 바위 아래 넓지 않은 터에 계시며

사지에는

석축이 무너져 있고, 산죽이 널리 산포되어 있으며, 와편, 도자편이 발견된다.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상호는 결실되었지만 땅에 묻혀 확인되지 않은 하대석,중대석, 상대석을 갖춘 불상이다.

불상, 대좌 상대석에 촉공 등의 광배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특별한 조식이 없는 8각 중대석은  2면은 좁고 6면은 넓은 거의 작례가 없는 유형이다.
상대석에는 단판 앙련과 간엽을 표현하였고, 하부에는 2단 괴임을 두었다.

비로자나불

불두는 가야산에 돌려 주었고, 삼도를 새겼다.

법의는 우견편단이며 수인은 지권이다.

 

고려중기(?)에 조성된 불상 아닐까?

도하 각 언론에 발표된 가야산에서 최초로 발견된 석조비로자나불은 옳지 않다.

9세기 말에 조성된 해인사의 목조비로자나불을 포함하지 않더라도 가야산주변에는 김천 수도암, 성주 금봉리,성주 법수사지, 성주 심원사에 석조비로자나불이 계신다.(옛님의 숨결방 답사기 참조)

 

 

대좌

중대석 좌우면의 넓이가 다른 6면에 비해 좁다.

 

 

 

 

하루바삐

실존하는 여러편의 옛선현들의 가야산 유산기를 면밀히  조사하여

올바른 안태고향을  밝혀주었으면 좋겠다.

 

 

 

 

 

 

 

불상을 뵙고 봉천대로 향하였다.

 

 

꽃향유

 

 

구절초

 

 

 

10월 1일

산 정상 부근에는

가을이 무르익고 있었다.

 

 

 


봉천대

 

 

 

 

 

 

 

 

 

 

 

 

 

그래두

이 그림이 최고지예?

 

201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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