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의성군

의성...용요산 지장사

임병기(선과) 2018. 10. 1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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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입부터 눈에 익은 전경이 길게 이어지며

15년 저편의 기억도 모락모락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용요산 지장사 龍腰山 地藏寺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오나 사적은 전하지 않는다..

창건 당시에는 극락전, 응진전, 의향각, 청풍루, 산신각, 칠성각, 일주문과 10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사찰이었다고 한다.


이후 조선시대
1637년(인조 15) 세완 대사가 중건하였고, 1652년(효종 3)에는 영인 대사가 극락전을 중창하였다. 1666년(헌종 7)에 영산전, 1677년(숙종 3)에는 청풍루가 중창되었고, 1680년에는 법선이 영산전을 중수했다. 1752년(영조 28) 희묵(熙默)이 영산전을 관음전이 있던 자리로 옮겨서 건축했고, 1765년에는 신열(神悅)이 청풍루를 중수하였다. 1838년(헌종 4) 성우(性宇)와 영일(永一) 등이 법당과 누각을 중수하였으며, 1847년 영송(影松)이 극락전을 중건하였다. 1861년(철종 12)에는 운악(雲岳)이 영각을 세웠고, 1872년(고종 9)에 혜운(惠雲)이 응향각을 중창하였다. 1996년에 명부전을 새로 지었다. 1722년(경종 2)에 용안(龍眼) 성징(性澄)이 작성한 상량문 「복장문(腹藏文)」에 의하면 그 해에 법선(法禪)[廣湜] 스님이 불화를 조성하였다고 한다. 

 

 

하마비 

숙종 어필과 명성황후 축원문이 보관되어 있어 입구에 하마비를 세웠다.


숙종의 친필인 지장사 편액이 전한다.1699년 전국적으로 전염병이 돌 때 이곳으로 피했을 것으로 짐작되며 숙종대왕이 다녀간 후 하마비와 어각이 세워졌으나 현재는 하마비 만 주차장 입구에 남아 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명성왕후가 외진 이곳  지장사로 난을 피해있다 무사히 한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한다. 명성황후의 축원문이 1970년대까지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극락보전


(2005년 9월 25일)

 

옛글을 가져왔다.

어느듯 하루가 고갯마루를 넘고 있어 마음은 바쁘지만 갈 길은 멀다. 문화재청 자료를 토대로 쌍호초교를 뒤졌지만 비로자나 석불은 보이지 않는다. 마침 교정에 계시는 촌로에게 여쭈었더니 분실 후 회수하였으며 현재는 지장사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지장사 가는 목 동네 동구에 소나무가 보인다. 이런 경우는 아주 드문 경우가 아닌가? 일반적으로는 동구의 당수는 느티나무가 주종이다.안내문에 의하면 광해군에 입향한 평산 신씨들이 200년 전에 심었다고 한다. 당산목에는 땅의 기운 즉 음기가 일년중 가장 강한 정월보름에 한해의 풍년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동제를 올리나, 월소리 소나무에는 금줄이 보이지 않으니 오랫동안 마을 축제인 제의가 없었는 듯 하다.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닌 것이 오늘날 우리 농촌의 현실이며, 아이 울음소리 끊어진지 오래인 동네에 누가 제주가 되어 보름동안 몸을 정갈하게 다루고, 부부관계를 금하며, 마을을 위해 희생양이 되겠는가?

아무리 농경사회의 풍속이라 하지만 씁쓸한 맘 지울길 없다.

 

지장사 길은 입구부터 돌탑이 분주히 맞아준다. 돌덩이로 쌓아올린 탑이 길을 마주보고 도열해 있어 잠시도 눈 돌릴 여유를 주지 않는다.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웠더니 산이 울릴 정도로 요란하게 짖어대는 아직 성불하지 못한 멍멍이의 에코가 어지롭다.

 

새롭게 조성한 영지 둑에 비구니스님의 손놀림이 분주하여 예만 올리고 지장사에 들려 마치 가정집 행랑채(?) 같은 전각에 모셔진 비로자나불을 뵈었다.표면은 전체적으로 마모가 심해서 구체적인 모습은 확인이 어려운 상태이다. 신체에 견주어 큰 머리, 좁은 어깨, 얇은 신체, 나발의 모습이다.

 

제자리를 떠나 수없이 거주지를 옮겼지만 아직도 안식처 없이 임시로 보관되어 있으니, 어찌 양로원에 계시는 노인들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서글프진다. 깊은 산골임에도 극락전을 주전각으로 큼직한 노주석이 이채롭고, 중정 아래에는 석조부재가 지장사의 사연을 품고 있다.

 

내려오는 길에 잠시 일손을 접은 비구니 스님의 말씀을 들었다. 엄청난 불사를 혼자 하셨다고 하시며 현재 5단인 석축도 9단으로 조성하여 극락전 아마타 부처님 세상을 시현하시겠으며, 비로자나불도 조만간  군예산으로 전각을 세울 예정이니 내년쯤 꼭 다시 오라신다.혼자 계시는 산골 절집 생활이 적적하셨는지 길손의 발걸음을 쉽게 나주지 않으셔셔 다시오리라 다짐하며 3층 석탑으로 발길 돌렸다.

 

지장사 아래 한쪽 산속에 방치(?)된 듯한 3층탑은 마모가 심하나 의성지역의 사암으로 조성된 신라 유형에서 많이 약화된 고려의 석탑임을 알수 있다. 석탑이 가람배치에서 벗어난 경우는 비보 목적이 대부분이며, 주불이 아미타불일 경우도 석탑을 조성 않는 경우가 많았다고 알고 있어서 그러러니 지레짐작을 했다.

 

하지만, 탑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스님께 여쭈었더니 탑 본래 위치는 좀더 아래 무덤에 있었으며,  무덤 주인의 요구에 의해선지 강압에 의해선지 현재 위치로 옮겼단다. 답사 막판에 욕이 튀어(?) 나올려 한다.

 

南無是佛 ()

 

답사후 다음 답사객의 동선을 고려, "월소리 비로자나불은 쌍호초등학교가 아니고 지장사에 있다"라고 문화재청에 수정을 요구한 글을 올렸더니 묵묵무답이더군. 유홍준 청장 재야에 계실 때 그렇게 제도권을 깔아 뭉개더니 이래도 되는건지? 오늘(10.30) 답사기를 준비하려고 문화재청 자료를 검색했더니 눈물 겹도록 고맙게 수정(첨가)을 했더군요.

 

맨마지막에 한 문장  "현재 지장사에 모셔져있다."

 

2005.09.25

 

 

청풍루

 

 


2005년에는 우측 산록에 자리잡고 있었다.


단층기단의 삼층석탑

육각 지대석은 산록에서 발견된 부재이며, 석탑재로 알 고 계시는 스님의 말씀과 달리 석탑 부재는 아닌 것 같다.


기단 중석에는 양우주와 탱주를 모각 하였다

스님은 초층 탑신으로 말씀하셨으나 기단 중석이며 제자리에 자리 잡았다.


기단갑석은 물매가 없으며, 부연도 생략되었다.


탑신석

통돌로 삼층탑신은 말실되었으며 양우주를 모각하였다.

기단중석과 더불어 우주, 탱주 너비가 좁아진 모습이다.


옥개석

낙수면 윗부분 물매가 급하나. 하부는 깊지 않다

상부에 각형 1단 굄을 조출하였고, 층급받침은 아래로부터 5*4*4이다.

전각의 반전은 급하지 않다.


상륜부는 남아 있지 않으며, 현재 부재는 탑재가 아니다.


고려 중기이전 석탑으로 추정된다.

 

 

지대석 부재


 

탑신부

 

 

 

 

 

노주석.

상부 대좌는 2005년 석탑 사진 상륜에 올려져 있었던 부재 같다.

 

 

비로자나좌상

지장사 산내암자에서 쌍호 초등학교로 옮겨 갔다가 지장사로 다시 돌아오신 님이시다.

광배와 중대석이 결실된 방형연화대좌 위에 봉안되어 있다.


마모가 심하여

나발, 희미한 삼도, 통견의 투박한 법의, 지권인 수인을 제외하고는 거의 형태를 알아 볼 수 없다.

상호가 불신에 비해 큰편이며,어깨는 좁다

고려 중기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방형 대좌

 

  

 

 

 

 

따뜻한 율무차를 내어 주신 스님.

15년전에 뵈었던 오늘의 지장사를 재건하신 그 분이셨다.


부도 2기

스님 말씀 듣는 동안 까먹고 위치, 존재유무를 확인하지 못 했다.

다시 들려야 할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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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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