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안성시

안성...매산리 석불입상(태평미륵). 오층석탑

임병기(선과) 2018. 8. 6.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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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마지막으로 인연 지은 후

두어차례 문안 여쭈지 않고 지나쳤더니 화가 나신듯 불신을 감추었다.


(2007.03.13)

(2007.03.13)


매산리의 석불입상은 일명 태평미륵이라고 불리는데 고려시대 몽고군을 물리친 송문주 장군과 김윤후 장군의 우국충정을 기리고 그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건립하였다고 전해진다.


『고려사』 권 103 '박서 송문주전'의 의하면 1236년(고려 고종 23년) 몽고군이 침략하여 죽주산성까지 도달하자 죽주방호별감(竹州防護別監) 이던 송문주 장군이 신출귀몰한 전술로 몽고군을 대파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처인성(지금의 용인)에서 김윤후 장군이 몽고의 장수 살례탑을 사살하였다고 한다.

한편 석불입상이 있던 자리가 太平院의 북쪽이었으니 사람이 빈번하게 나타나는 자리에 국가사업으로 미륵을 세워 국가권력의 위용을 과시하려는 의도로 세웠다는 의견도 있다. 그리고, 조선 영조때 최태평이란 사람이 인생무상을 깨닫고 無學修德의 極樂道를 열고자 조성했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달빛에 젖은 이야기는 그대로 두자.


고려초라는 이야기는 교과서에 담아 두고...


(2007.03.13)

 

오층석탑

2층기단의 오층탑으로 4츹 탑신과 옥개석이 결실된 상태이다.


석불입상과 더불어 동시대인 고려초기에 봉안된 석탑으로 추정된다.


 

기단부

하층기단 갑석이하는 묻혀 있다.

상부에는 각호각 3단 굄을 조출하였고, 내림마루를 또렷하게 새겼다.

중석은 4매로 엇물림으로 결구하였다.


상층기단

갑석은 하층기단 갑석과 유사하며, 하부에 오목형 부연을 새겼다.


 

초층탑신은 통돌로 양우주를 모각하였고, 2.3층 탑신. 4층 탑신,옥개석은 결실되었으며, 5층 옥개과 탑신은 일석으로 조성하였다.


옥개석

낙수면 물매는 깊고, 절수구를 새겼으며, 층급은 전층 3단

상부에 굄을 생략하였으며, 상하 전각 반전은 경쾌하다.


상륜은 망실된 모습이다.


 

5층 탑신과 옥개석


 

옥개석

절수구와 층급받침


 

 

오층석탑 탑지.

아래 탑지 기록에 의하면 석탑 건립은 766년,993년 중수하였다.

현재 석탑은 통일신라 절정기의 양식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훼손된 석탑을 993년에 거의 새롭게 조성한 것 같다.

 

"(옆면)
永泰二年丙午」
三月卅日朴氏芳」
序令門二僧謀」
一造之先▨行能」
(밑면)
鴈塔始成永泰二年丙」
午到更治今年淳化四年癸」
巳正月八日得二百二十八」
年前始成者朴氏又更治者」
朴氏年代雖異今古頗同益」
勵丹誠重修寶[塔]也」
造匠長老」
[塔]造主朴廉」


(옆면)
영태(永泰) 2년(766) 병오년 3월 30일에 박씨와 방서(芳序) 영문(令門) 두 승려가 먼저 한번 만들고자 한 것을 이루었다.
(밑면)
탑이 이루어진 영태 2년 병오년으로부터 (탑을) 고친 금년 순화(淳化) 4년(993) 계사년 정월 8일까지 헤아려보니 228년이 된다. 전에 처음 만든 이가 박씨(朴氏)이고 또 다시 고친 이도 박씨이니 연대는 비록 다르나 지금과 옛날이 자못 동일하여 참된 정성을 더욱 힘써 보탑(寶塔)을 중수하였다.
만든 장인(匠人)은 현곽장로(玄長老)이고 (탑을) 만든 주인은 박염(朴廉)이다."

(출처/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여기에 등장하는 박씨는 누구일까?

(출처/중부일보 김성환.2016년 05월 01일 )


(전략)

고려 중기에 죽산 박씨의 활동을 알 수 있는 금석문 자료로는 12세기 전·중기에 제작된 ‘박경인 묘지명’과 ‘박경산 묘지명’이 있다. 여기에서는 그들의 선조가 죽산으로 들어오게 된 배경을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본래 신라시조인 혁거세의 후예로 계림인이었던 북경도위를 지낸 박적오(朴赤烏 또는 朴積古)가 개산군(죽산)으로 들어와 찰산후(察山侯)가 돼 죽산 박씨의 시작이 됐다고 한다. 아마도 박적오는 개산군 태수로 임명돼 이곳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개차산군이 개산군으로 바뀐 때는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을 전후한 시기일 것이다. 즉 박적오는 죽산 박씨의 시조 정도의 위치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신라 혜공왕 2년(766년)에 죽주산성 아래의 매산리 미륵당 석탑을 조성하는데 적극 참여했다. 이후 그들은 이 지역의 토착세력으로 자리했다. 또 박적오의 아들로 알려진 박직윤(朴直胤, 또는 朴智胤)은 이곳에서 고구려의 장군 명칭 중에 하나였던 대모달(大毛達)로 불렸다. 그는 또 황해도 평주(평산)로 옮겨가 이후 평산 박씨의 시조가 됐다. 죽산 박씨와 평산 박씨는 그 선조가 같은 계통이었다.

 

(중략)

현재 죽산 박씨의 시조는 고려 태조의 창업을 도와 삼한벽상공신이 된 박기오(朴奇悟)로 알려져 있다. 사실 개산군이 고려 초에 ‘죽주’, 즉 ‘군’에서 ‘주’로 확장된 것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운 박씨 세력에 대한 포상의 의미가 크다. 하지만 박기오 이전의 선계(先系)가 분명하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잊혀졌다. 이것은 당시 궁예와 밀착된 청주권역에 속해 있던 죽산의 박씨가 궁예의 세력권에 들어가 있다가, 왕건의 후삼국 통합과정에서 궁예를 떠나 왕건에게 의탁했음을 의미한다. 죽산의 박씨는 평산과 갈라진 이후 자손이 번창해 왕건이 후삼국 통합할 때부터 죽산을 본관으로 삼아 12세기 중반을 지나 고려 말까지 그 후손이 계속되고 있었다. 혜종 1년(994년)에 박기오는 원윤이라는 관직을 가지고 죽주에 있으면서 후에 왕이 된 정종(定宗)·광종, 역시 원윤이었던 박기달, 죽주에서 사간(沙干)의 관직을 가진 덕영·제종 등과 함께 영월 흥녕사의 ‘징효대사보인탑비’를 조성하는데 참여했다. 또 성종 12년(993년)에 매산리 미륵당 석탑의 중수에 박씨가 계속 참여하고 있음도 밝혀졌다. 이런 사실은 8세기 중반 이후 12세기 중반까지 죽주에서 박씨가 토호로 그 세력을 지속했음을 보여준다.

(하략)


 

2018.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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