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안성시

안성...죽산리 삼층석탑.죽산리석불입상.죽산리 석탑

임병기(선과) 2018. 8. 7. 08:18
728x90

 

 

 

죽산리 삼층석탑

1976년 복원되었으며, 최근 발굴조사에서 원위치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하층기단 갑석 이하는 매몰되었다.

하층기단 갑석에는 3단 굄이 조출되어 있다.


상층 기단 갑석 하부에는 부연이 깊고 얕게 표현되었다.

 상층기단 면석에는 우주가 모각되었고, 갑석 상면에는 복련의 연화문이 조식되어 있으며, 위쪽에 2단 굄을 두었다.

 

초층탑신이 높으며, 상층 탑신은 급격하게 체감되었다.

전층 탑신에 양우주를 모각하였다.

옥개석 낙수면 물매는 급하며,  4단 옥개받침을 갖추고 있다.

처마의 반전은 경쾌하며 상부에 2단 굄을 조출하였다.

 

상륜부는 망실된 상태이다.

 

 

 

기단부

 

 

기단 갑석 연화문

 

 

깊고, 낮은 부연

 

 

 

 

죽산리 삼층석탑.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안성 죽산리 삼층석탑이 위치한 봉업사지 일대는 통일신라 말기의 혼란과 전쟁을 거치는 동안 폐허가 된 지역이다. 죽산리 삼층석탑은 상층기단 면석에 탱주가 없고 기단 갑석 상면에 복련문이 시문 된 점 등을 통해 볼 때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삼층석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2004년 경기도박물관에서 실시한 봉업사지 3차 발굴조사를 통해서 이 석탑의 조성에 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이 규명되었는데, 죽산리 삼층석탑은 9세기 통일신라 석탑의 하층 기단을 그대로 재사용하여 고려시대에 새롭게 조성된 탑이라는 점이 확인되었다. 또한, 석탑의 하부 토층에서는 ‘태화 6년(太和六年, 832)’ 명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이 지역에 통일신라의 사찰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죽산리 삼층석탑 주변의 발굴조사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현재 이 석탑이 세워져 있는 지역에는 통일신라 때 조성된 평면 방형의 일반형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었다. 이 석탑은 신라 말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석탑의 기단을 제외한 다른 부재는 재사용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깨지거나 파손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유로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삼층석탑의 기단부만을 재사용하고 나머지 부재는 새로 만들어 고려시대에 죽산리 삼층석탑을 건립하였던 것이다.

 

안성 죽산리 삼층석탑이 위치하고 있는 봉업사지가 통일신라 말기의 폐허를 딛고 다시 중수되기 시작한 것은 925년(태조 8) 고려 태조의 명으로 청주 출신 능달이 봉업사를 중창하기 시작한 때부터이다. 그러나 능달에 의한 중창이 이루어진 시기는 여전히 후삼국이 대립하고 있던 시기였다. 따라서 광대한 봉업사지 일대의 사역을 모두 중창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능달의 중창은 중심 사역이었던 현재의 봉업사지 오층석탑 주변 일원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봉업사지 오층석탑 북쪽, 즉 죽산리 삼층석탑 주변의 폐허가 된 사역은 중창에서 제외되었다.

 

안성 죽산리 삼층석탑 주변의 사역은 이후 광종대가 되어서야 대대적인 중창을 시작하였다. 이는 사역에서 발견되는 명문 기와와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다. 죽산리 삼층석탑 주변지역을 조사한 봉업사지 3차 발굴조사에서는 다량의 명문 기와가 출토되었다. 가장 수량이 많은 기와는 ‘태화 6년’명 명문기와이다. 이 기와는 죽산리 삼층석탑 하부와 삼층석탑 주변 건물지에서 많이 출토되었다

 

한편, 죽산리 삼층석탑 주변지역에서는 인근 봉업사지 오층석탑 주변에서 출토된 나말여초기의 기와는 출토되지 않았다. 반면에 고려 광종대와 그 이후의 명문  기와는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특히 956년(광종7)부터 967년(광종18) 사이에 제작한 기와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이상과 같은 점을 통해 볼 때 죽산리 삼층석탑 주변의 사역은 신라 하대인 832년(흥덕왕 7)에 초창 내지 크게 중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후삼국의 혼란 속에서 사찰은 폐허가 될 정도로 크게 피해를 입었다. 폐허나 다름없는 사찰을 중창한 것은 925년 능달에 의해서였다. 이때는 봉업사지 오층석탑 일원의 사역이 중수되었다. 이후 고려 초인 광종대에 이르러 봉업사지는 다시 중창되었는데, 이 시기에 죽산리 삼층석탑 주변 사역이 대대적으로 정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죽산리 삼층석탑은 이때 통일신라시대 조성된 삼층석탑의
하층 기단을 재사용하여 새롭게 조성된 석탑으로 볼 수 있다.

 

 

죽산리 석불입상

죽산리 삼층석탑 뒤편 산자락에 위치하며, 본래 봉안된 장소는 삼층석탑 부근이었다고 한다.

불상의 조성시기는 죽산리 삼층석탑이 처음 조성되었던 동시대인 통일신라 후기로 추정한다.


 

죽산리 석불입상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에서 발췌)

소발, 육계가 높다. 육계를 갖고 있다. 눈은 반개하였으며 입술은 단정하게 다물고 있다. 귀는 어깨까지 흘러내린다.

목에는 삼도가 있으나  보수 문제로 육안으로 거의 보이지 않는다. 통견 대의를 입고  목 아랫부분에 겹쳐진 옷자락이 세 줄의 옷 주름으로 표현되어 있다.  주름 밑으로 ‘U’자 형의 옷 주름이 아랫배까지 흘러내리고, 허리부터 ‘Y’자 형으로 갈라져 양다리 위에 타원형의 주름을 남기고 있다. 오른손은 여원인, 왼손은 손바닥을 몸 쪽으로 한 채 자연스럽게 내려놓고 있다.


정면에서 보면 다리 사이와 가슴 부근의 양감이 두드러지지 않고 평면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측면에서 보면 등이 뒤로 젖혀진 채 몸이 부드럽게 활처럼 휘어져 있어 입체적인 볼륨감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불상의 뒷면은 어깨가 넓고 둥글게 다듬어져 있다. 허리 아래쪽은 좁게 다듬어져 있고 허리 쪽이 안으로 휘어져 있다.


죽산리 석불입상이 밟고 있는 대좌는 원래의 것이 아니다. 이 대좌는 상면 지름이 약 90cm이고 오목하게 파여 있다. 불상이 올라가 있는 대좌 앞에는 비슷한 지름으로 윗면이 파여져 있는 하대석이 있다. 이 하대석은 죽산리 석불입상의 대좌와 짝을 이루어 좌상 형태의 불상을 받치고 있었던 대좌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석불입상의 대좌가 아니다.


 


석불입상의 하대좌로 추정


 

 

 

 

 

(2003.03.13)


당시에는 길상사이었는데...


 

 

죽산리 석탑

석불입상 옆에 위치. 삼층석탑부재로 추정되며 본래 위치 여부 불투명 하다

 

여러매로 구성된 지대석

기단면석은 흔치 얺은 통돌이며 우주가 모각되어 있다.

 

기단갑석은 오목형 부연이 깊게 표현되어 있다.

상부에는 각호각 3단 굄을 조출하였다.

 

초층 탑신은 통돌로 양우주를 모각하였고 상층 탑신은 결실되었다.

 

옥개석

3단 층급받침, 낙수면,음각의 추녀 표현,

낙수면 물매는 깊고, 내림마루의 현수곡선이 보이며, 전각의 반전은 경쾌하다.

상부에는 1단 고미을 마련하였다.

 

매산리 오층석탑을 모본으로 조성한 고려 초기 탑으로 추정된다.

 

 

 

기단

 

 

기단상부

 

 

옥개석

 

 


2018.07.21

 

728x9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