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창원시/창원시

창원...창원대 석탑부재

임병기(선과) 2018. 4. 2.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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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대학교 박물관 야외


 

옥개석과 탑신석.


모두 처음 뵈었지만 옥개석은 오랫동안 나의 미답사 목록에 기록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제외하였다가 작년에 다시 목록에 포함시켰었다.


2010년 아래 기사를 보고 찾아갔었으나 밭에 일하시던 어떤 분도 옥개석 존재를 모르고 계셨다.


경남도민일보...2010년 4월 5일


"봉림동 재잘단 우리마을 탐험기" 최종 회의를 하던 중 박태성 선생님이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커다란 옥개석 하나가 창원CC입구 개울에서 보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있다며 가보자고 했습니다.

봉림사지에서 직선으로 700m 정도 떨어진 창원 봉림동의 하우스 농장 옆 개울에 거꾸로 놓여 있는 옥개석(석탑의 지붕돌 역할을 하는 것)은 바깥 길이가 154㎝, 탑신과 연결되는 내부 길이는 96㎝이다. 이 옥개석의 크기로 보아 상당히 큰 규모의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위에는 석탑의 다른 부분이라고 할만한 것들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현재는 개울의 물이 흙을 파지 않도록 하는 바닥재로 사용하고 있어 발굴 후 잘 보관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어떻게 이곳에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8세기경 전형적인 옥개받침 수가 5개인 옥개석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창원CC 10번 홀 아래에 있는 부처고개 '창원 봉림동 마애석불', 봉림사지 등과 관련이 있는 것일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런데 작년 경남도민일보에 다시 목개석 기사가 게재되었다.

맨처음 인지 했던 장소에서 2~300미터 하류에서 발견되었다는 내용이었으며, 오늘 인연을 지었다.

2010년과 2017년에 발견된 동일 옥개석으로 추정되지만 확신할 근거는 없다.


경남 도민 일보...2017.06.12


"창원 지역 한 수해복구 현장에서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석탑 옥개석이 발견됐다.

이번에 발견된 옥개석은 너비 155㎝, 높이 60㎝로 연꽃 문양이 새겨진 것이 특징이다. 옥개석은 지붕 형상을 한 석조물 일부를 말한다.

옥개석이 발견된 곳은 창원 의창구 봉림동 창원한들초등학교 부근 소하천 복구공사 현장이다. 이곳은 지난해 수해를 입어 복구공사가 한창이었다. 의창구청은 문화재로 추정되는 옥개석이 발견됨에 따라 지난 5일 자로 공사를 중단했다.

발견자인 주민 안희상 씨는 "이 돌이 몇 년 전부터 수로에 박혀 있어 눈여겨보고 있었다"고 말했다.

 

김주용 창원대 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석탑 1층이나 2층에 썼던 옥개석으로 추정한다"며 "크기로 미뤄 큰 탑의 일부였던 것 같다"고 전했다.

이어 "연꽃 문양이 한쪽 면에만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미완성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김 학예연구사는 창원 지역과 관련된 문화재인 것이 확인되면 그 역사적 의미가 상당할 것으로 보면서도 그 가능성은 낮게 점쳤다. 해당 터 소유주가 2003년 축대를 쌓고자 돌을 타 지역에서 사온 적이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곳이 절 터가 아니었던 데다 터 소유주에게 사연을 들어보니 다른 지역에서 돌을 들여온 적이 있다고 해 지역과 관련성이 없을 수도 있다"면서 "그러나 이 지역 산세에 성주사부터 봉림사까지 사찰이 많았던 점을 고려하면 창원 지역에서 역사적 의미가 큰 문화재 존재가 확인될 수도 있어 주변 지역을 조사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강조했다. ...(하략)"


 

옥개석 낙수면의 연화문

믿어지지 않았다.

통도사 성보박물관 야외전시장에도 연화문이 조식된 1매가 있지만, 그 부재는 층급받침을 표현한 작례이다.

 

 

낙수면 물매가 급하고

상부에 2단 각형 괴임을 조출하였고, 절수구는 생략되었으며  하단의 옥개석 층급받침은 5단이다

즉, 통일신라시대 이후 고려초의  석탑부재가 분명해 보였다.



5단 층급받침


 

그런데

통일신라 시대 옥개석에 조식된 연화문이 성글지 않았다.

물론, 깊게 새기면 옥개석이 파손되는 위험도 따르겠지만 정치한 표현은 아니어 의문이 들었다. 

 


더구나

4면의 연잎 표현도 각기 달랐다.


4개를 새겼다.

 


3개

 


1개

 


연잎을 새기지 않았다.

 


참 알 수 없었다.

 


옥개석 상부

홈을 판 자리에 시멘트를 채웠다.

 


일견 비신의 비좌 홈으로 판단되지만

무엇 때문에 다시 시멘트로 매꾸었을까?

특별한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왜 비를 세운 사람들이 연잎 숫자를 달리하여 새겼을까?


그래서

혼자만의 근거 없는 설說


가설(1)

통일신라시대 삼층 석탑이 도괴

훗날 누군가에 의해 비석의 비좌로 사용

다시 또 시간이 지나  비석 훼손

무속인이 비좌를  봉합하고 특정한 상징성을 갖고  면마다 연잎  숫자를 다르게  새긴 후 상부에 신체神體를 모셨을 것이다. 


가설(2)

비석이 아니라 처음부터  무속인이 미륵불, 입석 등을 세웠을 가능성도 배제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장흥 의령남씨 팔충비, 경주 호림정 비석, 경주 박무의공 비석 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비석의 비좌는 옥개석을 뒤집어 사용하는 것이 외관상 정연하고 안정감이 들기 때문이다.



장흥 의령 남씨 팔충비


 

경주 박무의공 비



경주 호림정 비



탑신석

초층 탑신석으로 추정되며 양우주를 모각하였고 상부에 장방형 홈이 있다.

일견, 비석의 비좌를 꼽았던 홈으로 생각되었지만

뒤에 합류한 달넘새님은 사리공으로 추정하였으며, 작례도 여러 기 있다고 했다.


옆의 옥개석과 별도의 부재이다.

 

 

 


봄날

옛님을 앞에 두고 소설 한 편 탈고 하는 것도 답사의 묘미이리라.


2018.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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