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 총장공관 출입이 통제된 곳으로 멀리서 바라보고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보리사菩提寺 창건,폐사에 관한 사적은 전하지 않는다.
절터에는 석축과 기와 조각, 도자기 조각이 산재해 있다. 또한 보물 제361호로 지정된 대경대사현기탑비大鏡大師玄機塔碑와 보물 제351호로 지정된 석조부도가 있었는데, 1920년 무렵 일본인이 절터에서 모두 반출해 갔다. 939년(태조 22)에 세워진 대경대사현기탑비는 서울 경복궁에 옮겨져 보관되고 있으며, 석조부도는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석조부도는 대경대사현기탑비와 견주어 볼 때 여엄의 부도로 추정된다...출저/한국의 사지
가까이서 뵙지 못했지만...
"보물 제351호. 높이 2.7m. 신라 말, 고려 초에 활동하였던 대경대사 여엄(麗嚴, 862∼930)의 사리를 모신 승탑으로 추정된다. 승탑은 바닥돌은 없어졌지만, 단면 8각의 받침돌 위에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전형적인 8각원당형이다. 아래받침돌은 마치 연꽃으로 안상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윗면부터 옆면 윗부분까지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옆면의 기둥에도 연꽃무늬가 조각되었으며, 안상 안에는 사자가 1마리씩 돋을새김되었다. 단면 8각의 가운데받침돌은 위아래 2단으로 이루어졌다. 옆면에는 두 날개를 활짝 펴고서 두 손을 합장한 상상의 새인 가릉빈가가 조각되었고, 윗단 가운데부분에는 앉은 채로 천의를 날리며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주악천인상이 돋을새김되었다. 윗받침돌은 밑면에 꽃잎이 위로 솟은 앙련이 새겨져 있고, 옆면에도 연꽃무늬가 돋을새김되었는데, 8각의 모서리는 꽃다발 무늬의 기둥인 화속주로 장식되었다.
몸돌은 단면 8각인 하나의 돌로 조성되었다. 각 면마다 좌우에 모서리 기둥이 새겨져 있다. 앞면과 뒷면에는 문비를 새겼으며, 나머지 면에는 신장상을 돋을새김하였다. 지붕돌은 윗면인 낙수면에 기와를 덮은 기왓골과 추녀 마루가 표현되었고, 처마에는 부연가 조각되었다. 특히 추녀 밑면의 받침에는 꽃 무늬와 함께 주악비천상이 교대로 배치되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지만, 4장의 꽃잎을 가진 겹꽃의 연꽃무늬를 찰주 구멍 주변에 장식하고서 상륜부를 받도록 하였다. 현재 머리장식인 상륜부는 대부분 없어지고 보주 하나만 놓여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부도비(2014년)
양평군 용문면 연수리 보리사 터에 있던 대경대사 여엄(大鏡大師 麗嚴 : 862(경문왕 2년)~930(태조 13년))의 비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에 옮겨져 있다. 비문은 여말선초에 활동한 대표적 문인인 최언위(崔彦撝)가 지었고 이환추(李桓樞)가 썼으며 최문윤(崔文尹)이 새겨서 대사가 돌아간 지 9년 후인 939년(고려 태조 22년)에 세웠다. 음기(陰記)는 다시 3년 후인 942년(태조 25년)에 새겼다. 비문은 31행에 1행 58자의 구성으로 해서로 쓰여 있다.
한국금석문종합영상시스템에서 가져왔다.
태상(太相) 검교(檢校) 상서(尙書) 좌복야(左僕射) 겸 어사(兼御史) 대부 상주국(大夫 上柱國) 臣 최언위가 王命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문인(門人) 정조(正朝) 상주국 단금어대(上柱國 丹金魚袋)를 하사받은 臣 이환추가 왕명에 의하여 비문과 전액을 쓰다.
이로 말미암아 曹溪의 直下에 쌍벽의 두 제자가 있었으니 하나는 남악회양(南岳懷讓)이고, 다른 하나는 청원행사(靑原行思) 이다. 行思의 제자는 석두희천(石頭希遷)이고, 希遷의 제자는 마곡보철(麻谷寶徹) 이며, 寶徹의 제자는 운암담성(雲岩曇晟), 曇晟의 제자는 동산양개(洞山良价), 良价의 제자는 운거도응(雲居道膺), 道膺의 제자가 바로 대경대사 여엄(大鏡大師 麗嚴) 이다. 이와 같이 대대로 相承하였으니, 그들의 근본정신을 살펴 보건대 사람이 능히 도를 넓힌다고 한 것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대사의 법휘는 여엄(麗嚴)이요, 속성은 金氏이니, 그의 선조는 계림사람이었다. 먼 조상은 화주 출신으로 왕성에서 번연(蕃衍)한 귀족이었다. 그 후 관직의 임지를 따라 서쪽으로 가서 살다가 남포로 이사하였다. 아버지의 이름은 思義인데 조상의 덕을 추모하였고, 五柳 선생과 같이 명예를 피하고 은거하였다. 어머니는 朴氏로, 어느 날 낮잠을 자다가 이상한 꿈을 꾸고 깜짝 놀라 깨어 보니 靈光이 방 안에 가득하였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대사를 임신하였는데 스님은 태어나자마자 능히 말을 하였을 뿐 아니라, 어려서부터 장난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아홉 살이 되었을 때 이미 출가하여 수도하려는 뜻이 간절하였으니 부모도 그의 뜻을 막지 못하여 문득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無量壽寺로 가서 住宗法師에게서 처음으로 화엄경을 배웠고, 그로부터 여러 괴류(槐柳)를 지났으니, 참으로 귀중한 바는 반년만에 화엄경의 百千偈頌을 외웠는데, 하루에 외운 량이 다른 사람이 30일 동안 걸려야 외울 수 있는 것이었다. 광명 원년에 비로소 戒를 받고, 그 후 夏安居를 하면서 초계비구(草繫比丘)와 같이 굳게 戒를 지켰다.
그러나 마침내 교종이 최상승의 진실이 아님을 깨닫고, 드디어 마음을 현경으로 기울이고 눈을 보림사로 돌렸다. 이 때부터 서쪽을 향하여 숭엄산를 바라보다가 멀리 보령 성주사에 선지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곧바로 행장을 정돈하여 달려가서 친견하니, 광종대사가 스님으로부터 뜻하는 바를 자세히 듣고 허락하여 入室시켰다.
당나라에 도착한 스님은 강표를 거쳐 洪府를 지나 계속 서쪽으로 상행하여 마침내 운거선사를 친견하였다. 대경대사를 본 雲居는 “그대와 이별한지 그다지 멀지 아니한데, 여기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구려! 내가 운근(運斤)하고 있을 때에 자네가 찾아온 것을 기뻐한다”라고 말하였으며, 오사(吾師)가 법을 물어오니 “내 그대를 위하여 대답을 아끼지 않으리라”하였다. 그로부터 수 년을 지나면서 갖은 고통을 참은 것을 내 이미 驪囦에 이르러 탐주(探珠)할 계기를 만났다 생각하고, 이로 인하여 조경(鳥徑)을 밟아 採玉할 부작을 만나게 되었다. 스님께서는 ‘내 비록 국경이 없는 관공(觀空)의 경지에 있는 종교인이긴 하나, 어찌 본국을 잊을 수 있으리오’하고, 귀여지영(歸歟之詠)을 생각하며 모의지수(暮矣之愁)를 머금고 선고(禪尻)를 떠나고자 먼저 운거에게 고하였더니, 대사가 이르길 “네가 나면서 울 곳은 바로 고국이니 인순(因循)하여 지체하지 말고 빨리 떠나라”고 하였다. “따라서 내가 바라는 바는 眞空을 부연 진작하여 우리의 선종을 빛나게 하며 法要를 잘 보존하는 책임이 바로 너희들에게 있음을 명심하라. 그렇게 할 수 있어야 비로소 용이 천지에서 뛰고, 학이 일역(日域)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으리라”하며, “이와 같이 왕래함에 있어 그 적당한 시기를 놓치지 말라”하였다. 이로써 대각의 마음을 전해 받고 운거의 心印을 전승하여 거듭 경수(鯨水)를 넘어 다시 제잠(鯷岑)으로 돌아오니, 이 때가 바로 천우 6년 7월이었다. 무주 승평에 도달하였다. 이후 배를 버리고 동해안으로 북상하여 충주 월악산에 이르렀는데, 세상이 시끄러워 편안히 宴坐할 곳이 없었다. 세상을 살펴보니 모두가 도탄에 빠져 있고, 인간을 돌아보니 너 나 할 것 없이 슬픔에 잠겨 있었다. 비록 水石에 의지하나 어느덧 연진(煙塵)에 가까워지므로 다시 나령(奈靈 : 경북 영주)으로 갔는데,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미봉을 바라보면서 은거하다가 다시 소백산으로 가서 지내게 되었다. 여기에 기주 의 諸軍 지휘권을 맡은 上國인 강훤(康萱)이 불심이 돈독하여 보수(寶樹)에 교풍을 흠모하여 선림(禪林)에 깊이 심취하였다.
돌이켜 보건대 스님이 위태로운 곳을 떠나 편안한 악교(樂郊)로 찾아왔다 하여 정성스럽게 맞이하여 편안히 모시고, 공양을 올리면서 법문을 들었다. 그리하여 스님의 선덕(禪德)에 귀의하여 깊이 현풍 에 감득하였으니, 마치 명학재음(鳴鶴在陰) 즉 학이 새끼를 부화할 때 어미 학이 유음(幽陰)한 곳에서 울면 새끼가 알로부터 화답하면서 나와 서로 만남과 같았다. 비유컨대 白雲이 해를 붙들고, 아름다운 氣가 있어 상서로움을 나타내는 것과 같았으며, 동쪽으로 바라볼 때 자주 영서(靈瑞)가 여러 날 동안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자세하게 임금께 아뢰었더니 왕이 스님의 도덕이 중화에 으뜸으로 그 이름이 양국에 높았음을 감탄하여 봉필을 보내어 용지(龍墀)로 초빙하였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 산골 바위의 빗장을 나와 옥연(玉輦)에 도착하니 왕이 반갑게 맞이하였다. 깊이 찬앙(鑽仰)하는 마음이 다른 때보다 더욱 간절하였으니, 숙무제가 불교를 신봉한 것과 동등하게 비교하여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중간에 잠깐 本山으로 돌아가서 遺址에 다시 사찰을 중수하고 있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특명으로 사신을 보내서 다시 입조해 달라고 청하므로 차마 지니(芝泥) 를 거역하기 어려워서 다시 난전(蘭殿)으로 오르게 되었다. 어느 날 설법할 때 용안을 대하여 이르되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해지려면 긍정(肯庭)의 경우도 사양하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하면서 “요임금의 仁과 순임금의 德이란 것도 오직 華夏의 禹임금만이 짝할 뿐이었습니다”하니, 왕이 대답하되 “三皇과 五帝 때의 태평성세를 허박(虛薄)한 과인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동광 7년(929) 11월 28일에 약간의 병세를 보이다가 그 다음 해 2월 17일에 법당에 앉아 입적하시니, 춘추는 69세요, 승랍은 50이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햇빛은 처참하고 바람은 쓸쓸하였으며 구름은 탄식하는 듯 시냇물은 오열하였고, 天人은 애도하며 道俗은 모두 창자를 도려내는 듯 통탄하였을 뿐만 아니라, 감마(紺馬)가 하늘로 날아오르고 청오(靑烏) 또한 터를 점복하였으니 입적에 따른 상서가 前古로 듣기에 드물었다. 임금께서 스님의 니원(泥洹) 소식을 들으시고 가만히 슬픔에 잠겼다. 특히 조서(弔書)와 부의(賻儀)를 보내어 국사에 대한 예의를 다하였다. 문인인 스님들이 그 달 19일에 함께 영감(靈龕)을 메고 ▨▨▨의 서쪽 모퉁이 3백여 보 지점에 입감(入龕)하였다. 학업을 전해 받은 제자 융천(融闡)과 흔정(昕政) 등 500에 가까운 사람들이 공손히 스님의 遺德을 펴고자 비석을 세울 것을 윤허해 달라는 表를 올렸다. 그리하여 왕은 시호를 대경대사라 하고, 탑명을 현기지탑(玄機之塔)이라 추증하였다. 슬프다! 대사는 박옥(璞玉)에서 상서를 나타냈고, 혼금(渾金) 으로부터 경사로움을 연출하였다. 뜻은 저속함이 없고 말은 꾸미지 않았으며, 죽을 때까지 포납 이라는 이름을 가졌고, 후세에는 온포의 영예를 지녔다. 諸方으로 다니면서 교화를 베풀었고 중국에 가서는 그 나라의 불법과 문물을 배우고 돌아왔다. 그러므로 楚나라에서는 강평 의 뿌리없이 물 위에 떠 있는 것에 비견하여 동요의 발생 원인을 묻는데 대답하였고, 齊나라에서는 해조 를 묻고서야 바야흐로 국어에 대한 대답을 얻게 되었다. 때때로 귀의한 것이 모두 이와 같은 것들이다.
이 때에 他山의 돌로는 고상한 비문을 새길 수 없으므로 문도들이 비 돌을 구하기 위해 눈물을 흘리면서 상심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한탄스러운 바는 스님이 열반하신 지 이미 十春에 가깝다. 下臣 彦撝가 수년 전 요계를 배알하였더니, 上께서 사직을 수리하는 일을 감독하고 계셨다. 봉표에는 바람이 급하고 계로에는 서리가 잠겼으니 어찌 봉요 할 기회가 있으리요. 비문을 돌에 새겨 연우에 세우려 하였다. 외람되게 비문을 짓는 책임을 맡았지만 손을 상할 근심을 끼칠까하여 두려움이 앞서니 실로 이엉을 엮는 것과 같이 하여 해이(解頤)의 비방을 감수하려 하노라. 비록 경개(梗槩)의 자료를 갖추어 실로 스님의 높고 깊은 도덕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비문을 짓되, 대강의 개요만 추려서 억지로 유한(柔翰)을 잡았으니,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銘하여 가로되
釋尊은 교단을 창립하시고
2018.0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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