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해남군

해남...미황사 상부도전(남승탑원)

임병기(선과) 2018. 3. 4.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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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황사

2005년, 그리고 그 이후 다녀왔지만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았다..

더구나, 많은 순례객들이 스쳐 지나가는 부도전, 특히 하부도전을 담기 위해 이번 남도 동선에 포함시켰다.

 

아래는

2005년, 우리카페 장돌뱅이. 유현이랑 다녀 온 설래발을 정리한 글이다.

 

"『저것이 무엇일까?』
『배지 뭐야. 여보게 아무리 봐도 배처럼 생기지 않았나?』
『그렇기는 하지만 배 같으면 사람이 보일 터인데 사람이 안 보이지 않은가?』
『사람이야 보이거나 말거나 밸세, 배야. 바다에 떠서 움직이는 게 배가 아니고 뭐겠나?』

때는 신라 성덕왕 가절. 지금의 전라도 해남지역 사자포(속칭 사재 끝, 땅끝) 앞바다에 돌배 하나가 나타났다.
이상히 여긴 어부들이 이런 말을 주고받으며 배 가까이 다가가니 배에서는 아름다운 천악(天樂) 범패소리가 울려 퍼졌다.

배는 사람을 피하여 둥실둥실 바다 가운데로 떠나가더니 사람이 돌아서니 다시 육지로 떠오곤 했다.

관원들의 보고를 들은 촌주는 말했다.

『그렇다면 그 배는 외국에서 우리나라 사정을 탐지하러 온 배가 아니겠느냐?

배 위에 사람이 없다는 말은 그들의 위장술에 속은 것일 것이니라. 사람이 숨어서 나타나지 않을 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달아날 이치가 있겠느냐?

그 배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황당한 배라고 아니할 수 없으니 수군을 풀어서 나포토록 하여라.』

촌주의 명을 받은 관원들은 즉시 수군에게 첩보하여 정체 모르는 배를 잡아들이도록 했다.

무장한 수군 수십 명이 목선을 나눠 타고 돌배를 추격했다. 그러나 그 돌배는 바람 한 점 일지 않는 바다 위를 날쌔게 달아났다.
아무리 추격해도 쫓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달아나 그림자도 보이질 않았다.추격하던 수군들은 헛수고만 하고 돌아왔다.

『그것 참 알 수 없는 일일세. 어찌 그렇게도 빨리 달아날 수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이 부리는 배는 아닐 성싶은데… 바닷가에 가끔 신선이 내려와서 배를 부린다더니 아마 신선이 내려와 노니는 걸까?』
『오라, 그래서 배 안에서 풍악소리가 울려 나오나 보군.』
『그것 참 이상한 일일세. 그 배가 정녕 나무로 만든 배는 아니지. 바위를 파서 만든 돌배가 틀림없지?』
『돌배가 어떻게 물에 떠 다닐까?』
『그러기에 신선이 타고 노는 배거나 귀신의 조화라는 것이 아닌가.』 

이토록 괴이한 소문은 이웃 마을에까지 널리 퍼졌다.

의조 스님도 이 소문을 들었다. 스님은 곧 촌주, 우감과 장운 두 사미승, 그리고 불자 1백 명을 거느리고 바닷가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재를 올렸다. 드리어 배가 서서히 육지를 향해 오기 시작했다. 배가 바다 언덕에 닿자 스님을 필두로 일행을 배에 올랐다. 일행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배 안에는 사람이라곤 그림자 하나 볼 수 없는데 금물을 입힌 쇠사람이 노를 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옆에 놓인 금함을 열어 보니 그안에는 《화엄경》,《법화경》, 비로자나불, 문수·보현보살 등 40성중, 53선지식, 16나한 탱화 등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이들은 모두 금으로 되어 있어 눈이 부시도록 휘황찬란했다. 그 중에는 금환(金環)과 흑석(黑石) 각 1매가 있었다.

스님은 이 법보들을 조심스럽게 하선시켰다.

불자들이 불상과 경을 언덕에 내려놓고 봉안할 땅을 의논할 때 흑석이 갑자기 벌어지더니 그 속에서 검은소 한 마리가 나타나 삽시간에 커져 큰 소가 됐다. 이날 밤, 의조화상 꿈에 금인이 나타났다.


『나는 우전국이란 나라의 왕이오. 금강산에 만불을 모시려고 불경과 불상을 배에 싣고 왔더니 곳곳에 크고 작은 사찰이 들어서 있어 봉안할 곳이 마땅치 않았소. 해서 그냥 돌아가는 길에 이곳 달마산 산세를 보니 그 형세가 금강산과 대동소이해 가히 경상(經像)을 모실 만하여 배를 멈추고 때를 기다린 것이오.

그래서 이곳이 부처님의 인연토가 되었으니 경전과 불상을 이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크게 울면서 누웠다 일어나는 곳에 절을 짓고 경상을 안치하면 국운과 불교가 흥왕할 것이오.』금인은 이렇게 이르고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이튿날, 의조화상은 금인의 지시대로 소에 불경과 불상을 싣고 길을 떠났다. 검은소는 경치 좋은 곳에 이르러 한 번 누웠다 일어나더니 다시 걷기 시작했다. 산협(山峽)에 이르러 검은소는 크게 울며 눕더니 다시는 일어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죽어 버렸다. 이 자리에 절을 창건하고 불상과 불경을 모신 후 절 이름을 미황사라 명했다.


이는 그 소의 울음소리가 극히 아름다워 「미」자를 취하고 금인의 황홀한 빛을 상징하여 「황」자를 택해 미황사라 칭했다 한다.또 처음 소가 누웠던 곳에도 절을 세우니 이 절 이름은 통교사라 한다."--불교신문에서 발췌

사료가 없으면, 사실이 아니면 어때?

남방불교 전래설과 관련된 설화에 젖어 1300년 전의 사자포를 지금의 어란포로 여기면서,경계가 불필요한 숲길을 걸어가는 맛도 답사의 일미임에 틀림없으리...

머리속을 감도는 화려했던 영화,  남도의 금강산이라 불리우는 달마산 풍광은 탐승객에게 한가한 여유를 부릴 수있는  분위기를 허용치 않는다. 뒷산의 화강암 색깔과 닮은 배흘림 기둥의 하이얀 자태, 퇴색된 단청에서 품어나는 위엄,  주초에서 당장 뛰어나올 것 같은  바다동물의 역동적인 유영이, 숨가프게 탐승객을 몰아치지만 대웅전 부처님은 무심한 눈으로 우리를 맞이하고 계신다.

대웅보전을 나와 멀리 어란포를 바라보지만 대책없이 높이 올라온 루대로 인하여 조망이 어려월, 대웅전을 중수한 도편수가 환생한다면 분명 일조권 소송를 제기할 것 같다. 선원의 정겨운 흙담과 무늬,  요사 툇마루에 걸터 앉은  외할머님 같은 촌로들의 봄볕아래 정담이 중정 뜰안에 가득하고,크고 오래된 듯한 돌확에서 넘쳐나는 감로수로 인해 마음이 편안해 온다.

새롭게 불사한 범종각을 바라보다말고 가건물 유리의 괘불사진으로 눈을 돌렸다.
약사불인지 아미타불인지 궁금해 젊은 스님에게 여쭈었더니 "아미타불" 이라고 말씀하시어,

저는 약사여래불로 보이는데요 했더니 "처사님이 그렇게 믿으면 약사여래불 입니다" 하시며 건방진 중생을 깨우쳐 주신다.

사찰 답사를 하면서도 부도전은 소홀히 했었는데  이제는 놓칠 수 없는 즐거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늙어감(?)은 반증일까?

아직은 아닐테고, 주위에 넘쳐나는 답사기, 여행기에 부도전이 빠짐없이 과분하게 묘사되어 오래전에 답사한 나를 멍청이로 만드는
경우를 간혹 접했기에 이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부도밭은 들린다.


미황사 부도전은 많은 책에서, 올라가는 느낌, 부도전의 느낌, 돌아오는 느낌 들을 세세한 아름다움으로 표현하여 그 길을 올라갔다.

하지만, 자태을 숨기고 있는 동백꽃, 키 작은 산죽의 소란스러움에 멀리 바다마져 낙조를 감출 것같은 느낌 지울 수 없더라!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우측으로 내려서면 문학적인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孤鴨堂 선사의  부도와 나란히 선 몇기의 부도를 만난다.

특히  고압당 부도는 옥개석에 수막새,암막새는 물론 중대석의 사사자, 물고기 ,거북,게,다람쥐,옥개석의 용두 등 화려함의 극치이다.

조금더 산길을 걷다가 막 땀이 날 무렵 사람의 시선을 잡아매는 부도암 옆에 옹기종기,무질서의 조화로움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부도군이 얕은 울타리를 넘나들면서 이른 산중의 봄볕을 쬐고 있다.

부도마다 새겨진 다양한 문양을 살펴보는 맛도 좋았지만, 햇볕 고운 날에 한잠 늘어지게 자고싶은 욕심이 앞서는 것은 왜일까?

부도암 아래 자연석 위의  영남지방에서는 흔치 않은  용마루, 내림마루의 용과 지붕 중앙의 홈이 이채로운 비석이 모두에 언급한 창건설화가 기록된 사적비다.

누가 그랬던가?
부도밭을 내려올 때는 돌아보지 말라고... 헌데 이놈은 자꾸만 고개가 돌려진다.

애초에 문학적 감성과는 거리가 한참이나 먼 놈인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목포 출신의 김지하의 '애린'은 아니더라도,이곳 출신 김남주,고정희,황지우의 시 하나 기억해내지 못함을 자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까부터  보성에서부터 몇번이나 전화를 주시던 울카페의 이쁜여우님이 대둔사에서 기다리시다 집안의 일로 급히 서울을 가야한다며 민박집을 마련해두었다고 알려주셔서, 미안함에 더더욱 어쩔줄을 모르겠더라.

달마산 산자락 위에 낮에 마실 나온 하얀 반달이 산문을 나서는 답사객의 마음을 심란하게했지만,
이놈은 오래전  어란포을 떠나 궁구치러 가셨던 스님들이 하루빨리 돌아오시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2005.03.20

 

 

 

 

 

 

상부도전

사진으로 대신한다.

(추정년대는 한국의 사찰문화재에 기록을 기준으로 했다)

 

행장을 살피지 못 해 못내 아쉽다.

 

 

"묘향산 원적암에서 열반에 드신 서산대사의 유지를 받들어

직계상좌인 소요대사와 법을 이은 손상좌 편양선사가 서산대사의 의발을 모시고 대둔사에 내려오게 된다.

 

소요대사는 서산대사의 의발을 대둔사에 모시고

편양선사로 하여금 법을 펼 수 있도록 도량을 만들어 준  후

함께 내려온 서산대사 직계상좌 들과 미황사에 모여 살게 된다.


그래서

대둔사 부도전에 모셔진 대부분 스님들은 편양선사의 법맥을 이으신 분들이고

미황사 부도전에 모셔진 대부분 스님들은 소요대사의 법맥을 이으신 분들이다."


*미황사 홈페이지에서 발췌

 

 

낭암대사비 朗巖大師碑.1840년

 

 

 

 

사봉당 獅峯堂

 

 

응운당 應雲堂

 

 

오봉당 午峯堂.1788년

 

 

정연당 井蓮堂

 

 

연담당 蓮潭堂.1799년

 

 

벽하대사사리탑비 碧霞大師舍利塔碑.1764년

 

 

벽하당 碧霞堂.1764년

 

 

 

 

벽하당 碧霞堂.1764년

 

 

미봉당 眉峯堂

 

 

송월당 松月堂

 

 

완해당 琓海堂

 

 

정암당 晶巖堂.1799년

 

 

설봉당대사탑비 雪峯堂大師塔碑. 1738년

 

 

설봉당 雪峯堂.1738년

 

 

 

 

 

설봉당 雪峯堂.1738년

 

 

설월당 雪月堂.1891년추정

 

 

백월당 白月堂.1842년

 

 

송암당 松巖堂

 

 

응화탑 應化塔.1885년

 

 

혼허당 渾虛堂

 

 

죽암당 竹庵堂.1821년

 

 

영허탑 靈虛塔.1874 년 추정

 

 

붕명당 鵬溟堂

 

 

영월당 靈月堂

 

 

송파대사비 松坡大師碑.1764년

 

 

금하대선사비 錦河大禪師碑.1764년

 

 

이봉당탑 离峯堂. 1890년 추정

 

 

미황사사적비 美黃寺事迹碑.1692년

 

조선국 전라도 영암군(靈巖郡) 달마산(達摩山) 미황사(美黃寺) 시적비명(事迹碑銘)과 서(序)
숭정대부(崇政大夫) 행병조판서(行兵曹判書) 겸 지경연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知經筵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 지춘추관성균관사(知春秋館成均館事)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 민암(閔黯) 장유(長孺) 지음
현록대부(顯祿大夫) 낭선군(朗善君) 겸 오위도총관부도총관(五衛都摠官府都摠管) 이우(李俁) 쓰고 아울러 전액을 씀

내가 불교의 책을 읽다가 『화엄경(華嚴經)』 제보살주처품(諸菩薩住處品)에 이르러 저도 모르게 책을 덮고 감탄하기를 “아아. 우리 동방의 정토(淨土)의 사업이 대개 그윽히 합치되는 것이 있었던가.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 화엄경에서 금강산에 상주한다고 하는 보살, 곧 법기(法起)보살)이 1만 2천 반야에 자리한 몸이 이와 같고, 달에 강물에 비치고 53개 철종(鐵鐘)의 자취가 또한 이와 같다. 금강산이 산이 이루어진 것이 장엄겁(莊嚴劫, 과거 현재 미래를 말하는 대겁 중에서 과거) 성수겁(星宿劫, 과거 현재 미래를 말하는 대겁 중에서 미래) 사이였으니 인간과 새와 더불어 수미산(須彌山, 불교에서 말하는 세계의 중앙에 높이 솟은 산으로 그 둘레에 4대주가 있는데 인간은 그중 남방 염부제(남섬부주)에 산다고 함)과 같아서 무상의 깨달음의 경지가 된 것이 그 영험을 나타낸 것이다. 마땅히 그 밝은 옥이 크게 빛나도다.”라고 하였다.


호남의 달마산(達摩山) 미황사(美黃寺)의 창건 사적은 어찌 그리 기이한가. 당(唐)나라 개원(開元) 13년 을축년(신라 성덕왕 22, 725년) 신라 경덕왕(景德王) 8년(749년) 8월 12일에 갑자기 한 석선(石船)이 산 밑의 사자포구(獅子浦口)에 와서 닿았는데 하늘과 같은 범패소리가 뱃속에서 나기 시작하여 어부들이 정박시키려고 살펴 보았더니 배가 갑자기 멀어져버렸다. 의조(義照) 화상(和尙)이 이를 듣고 장운(張雲)과 장선(張善) 두 사미(沙彌)와 함께 촌주(村主, 지방을 다스리는 책임자) 우감(于甘)에게 이르러 향도(香徒, 향을 매개로 이루어진 불교의 신앙 공동체. 여러 사람들이 조금씩 재물을 내서 불상을 만들거나 향을 묻거나 하는 등의 불사를 함) 1백인과 같이 가서 목욕 재계하고 경건하게 빌었더니 석선이 다시 해안에 이르렀다.

 

주조한 금인(金人, 금으로 만든 불상) 한 구(軀)가 노를 잡고 서 있고 수놓은 돛이 날리고 있었다. 가서 보니 가운데에 금으로 만든 함(函)이 있어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데 옥축(玉軸)의 금으로 쓴 『화엄경』(華嚴經, 불법의 이치를 방대한 구성으로 설하여 보살도의 수행을 역설한 경전) 80권과 『법화경』(法華經, 대승의 신앙과 공덕을 설한 경전) 7권과 비로자나(毘盧遮那) 문수(文殊) 보현(普賢) 40성중(聖衆) 53선지식(善知識) 16나한(羅漢) 등의 탱화가 있고 또 금고리와 검은 돌이 각각 하나씩 있었다.


향도 등이 경을 가지고 해안에 내려와 봉안할 곳을 의논하였더니 검은돌이 갈라지며 검푸른 암소 한 마리가 생겨나더니 얼마 안 있어 장대해졌다. 이날 저녁 금인이 화상의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본래 우전국(于闐國, 중앙아시아 호탄)의 왕입니다.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며 경전과 불상을 안치할 곳을 찾았는데 산 꼭대기를 보니 1만 부처가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 있어 이런 까닭에 여기에 왔습니다. 경전을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일어나지 않는 곳이 경전을 봉안할 곳입니다.”라고 하였다. 화상이 이에 경전을 소에 싣고 가는데 처음에 한곳의 땅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산골짜기에 이르러 다시 눕더니 크게 소리쳐 “좋도다” 하고는 넘어져 죽어버렸다. 처음 누웠던 땅에 한 절을 세우니 지금의 통교사(通敎寺)가 이것이요, 뒤에 누웠던 골짜기에 한 절을 세워 경전과 불화를 봉안하고 이름하여 미황사라 하니 ‘미(美)’자는 소의 소리에서 따온 것이요 ‘황(黃)’자는 금인(金人)의 빛깔에서 따온 것이다.


아아 기이하도다. 세상에서 신산(神山)이라 것으로 말하면 우리나라에서 달마산(達摩山)은 방장산(方丈山, 지리산)의 지맥으로 본래 좋은 경치가 많고 신성한 행적과 신령한 자취의 내응이 많다. 그때의 돌소[石牛]와 금사람[金人]의 일은 황홀하고 아득하여 세상 사람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것이다. 연대를 고증하는데 여덟 글자로 타개해야만 하겠는가. 또한 경전과 금불상 불화 등의 물건은 예부터 그대로이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제불(諸佛)이 세상에 나오심은 모두 하나의 큰 일[一大事]이라 하는데 일대사라는 것은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이에 집착하는 것이 어찌 스스로 공이 머리를 끄덕이는 것이며 도중에 와서 뿔이 된 것이 어찌 설산의 회상에서 온 것이겠는가. 이는 가섭마등(迦葉摩騰, 축법란과 함께 후한 명제 때인 서기 67년에 중국에 불교를 처음 전했다는 사람)과 축법란(竺法蘭)이 말에 실어온 고사를 본딴 것일 뿐이다. 금신(金神)이 꿈에 감응한 것은 또한 아난(阿難, 석가의 십대제자 중 한 사람으로 석가를 항상 시종했던 수제자)이 가르침의 바다를 널리 편 유의(遺意)가 있다.

 

지원(至元) 연간(1264~1293년)에 이르러 만송[南宋]의 현달한 관리와 군자(君子)들이 멀리 바라보며 생각을 치달려 그림으로 그려내게 하니 이를 없앤다면 총림에서 기를 토하게 할만한 것이다. 이를 모두 비석에 새겨 영원히 나타낼 만하다. 나는 장천각(張天覺, 송의 문인 장상영(張商英))의 도리와 백향산(白香山,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 자는 낙천(樂天), 호가 향산)의 문필을 모두 업신여기나 상인께서 멀리서 온 뜻을 중히 여겨 그가 말한 바에 따라 말을 잇고 또한 사물에 따르고 사물을 빈 데서 감응을 얻은 뜻을 말할 뿐이다. 명에 이른다.

돌이냐 소냐 불가사의하도다
금이냐 사람이냐 알 수 없도다
정신은 모나지 않고 교화는 무궁하도다. 아아.

숭정기원후 65년 임신(숙종 18, 1692년) 9월 일 비를 세움.
두인(杜忍)

 

출처...한국금석문종합영상시스템

 

 

옥암당 玉巖堂

 

 

부도밭을 지나며...정 호 승

사람은 죽었거나 살아 있거나
그 이름을 불렀을 때 따뜻해야 하고
사람은 잊혀졌거나 잊혀지지 않았거나
그 이름을 불렀을 때 눈물이 글썽해야 한다
눈 내리는 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걸으며
누군가 걸어간 길은 있어도
발자국이 없는 길을 스스로 걸어가
끝내는 작은 발자국을 이룬
당신의 고귀한 이름을 불러본다
부도 위에 쌓인 함박눈을 부르듯
함박눈! 하고 불러보고
부도 위에 앉은 작은 새를 부르듯
작은 새! 하고 당신의 이름을 불러본다
사람들은 오늘도 검은 강물처럼 흘러가
돌아오지 않지만
더러는 강가의 조약돌이 되고
더러는 강물을 따라가는 나뭇잎이 되어
저녁바다에 가 닿아 울다가 사라지지만
부도밭으로 난 눈길을 홀로 걸으며
당신의 이름을 부르면 들린다
누가 줄 없는 거문고를 켜는 소리가
보인다 저 작은 새들이 눈발이 되어
거문고 가락에 신나게 춤추는 게 보인다
슬며시 부도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내 손을 잡아주는
당신의 맑은 미소가 보인다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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