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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해남군

해남...두륜산 대흥사

by 임병기(선과) 2018.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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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

30대초반이 우리아이들이 초교 생 시절 첫인연

그리고 2005년 우리카페 유현이랑.장동뱅이랑 남도 순례길

이후

북미륵암 마애불, 탑.만일암지 탑, 마지막으로 4~5년전 남미륵암 마애여래입상을 뵈으러 왔었다.

2~3번째는 대흥사는 참배하지 않았으니 엄밀히 말하면 13년만이다.


오늘은

옛사진이 없어 대웅전 영역과 천불전 박물관, 부도전을 동선으로 계획했지만 비도 오고, 박물관에는 세미나가 열리고 있었으며, 순례객이 많아 나홀로 부도전을 들리고픈 욕심을 버려야했다.


지난 2005년 3월 장돌뱅이.유현이랑 다녀온 사진 없는 글이 가장 순수해 보인다.

이제 세상 풍파에 밀려 산전수전 다 경험한 놈의 글은 우수마발 사족에 불과할 듯 하다.


옛글을 가감없이 리바이벌 한다.


"새벽잠이 없는 탓에 일찍 눈을 떠서 뒤척이고 있는 중에 가까이서 닭울음 소리가 들린다. 너무도 오랫만에, 아니 잊고 지냈던, 닭울음 소리에 젖어 유년의 고향집 긴 겨울밤이 머리속에 파노라마처럼 전개되며 향수를 자극한다.


정채봉 시인이 그랬었지?

고향의 붕알친구가 새벽녘에 "친구야! 닭이 운다"라며 전화를 하여 전화기를 타고 오는 그 진한 고향내음과 소식에 눈물 흘렸다고...


그런데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닭울음 소리와 함께 휴대전화기의 진동음이 요란스럽게 요동을 친다. 내게도 그런 친구가 있었단 말인가?

수화기를 타고오는 목소리 큰 화상 "헹님! 6시20분에 삼산 농협으로 오이소" 광주 찜질방에서 밤을 샌 幽玄이란 화상이었다.

이른 아침의 산사는 무료 입장의 즐거움 보다는, 한적함과 신선한 공기의 청량함을 만끽할 수 있는데,그런 여유로움이 이제는 사치로 여겨질 만큼 나자신도 많이 타락했다.


더구나 九林里 長春洞이라는 예사롭지 않은 지명에서라도 알 수 있듯이 온갖 나무가 울울히 도열한 숲길은 이른 봄내음과 여린 푸르름을 가득 머금었을텐데... 그런 마음이나 알기나 한듯 影池의 느낌보다는 유교에서 원림 느낌의 無染池가 보인다.

아마 연화를 상징하는 處染常淨과 의미가 통하리라는 생각을 하며 가허루를 통과하여 꽃살 분합문이 고운 천불전에 들어선다.


천불전의 현판은 원교 이광사 특유의 흘림의 글임을 알 수 있지만 골기가 묻어난다는 느낌은 어찌 내가 알 수 있으련만, 또한 가허루의 현판이 창암 이삼만의 글이라니 추사가 귀양도중에 천은사에서 창암의 후학과, 이 곳 대둔사에서 원교 글씨와 관련된 일화가 떠올라 웃음을 머금으며 나오는 뒤에서, 쓸데없는 생각을 버리자며 동의를 구하는 듯 처마를 바라보며 유현이"오늘은 이상하게 직선이 눈에 가득 들어 오네요"란다.


가허루를 나와 표충사로 발길을 옮기니 찻집이 보인다 '동다실' 이곳에 주석했던 茶僧 초의선사의 동다송에서 유래되었겠지만 품차는 고사하고, 음다에도 익숙하지 않은 까닭에 이른 아침 문이 열려있지 않음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모든 답사기에 천편일률적으로 대둔사를 네개의 구역으로 구획했지만 엄밀히는 박물관도 포함 다섯개 구역일거야 라며 가람배치의 부조화에 대해 불편한 심사를 속으로 삭혔지만, 한편으로는 무상출입의 반대급부로 성보박물관의 고려동종을 볼 수 없는 아쉬움을 달래며, 윤고산이 장군을 낳을 샘이라고 하여 매일 길러다 먹으며 장군수로 명명하였다는 샘을 거쳐 서산대사를 배향하는 유교식 사당의 솟을 삼문을 들어섰다.


군사정권 시절 무신우대의 성역화는 스님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 영향으로 우리나라의 초등학생만 되어도 아는 스님이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아니던가? 만약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서산대사가 계셨을까?.

대둔사는 서산대사의 후광없이도 사세를 펼칠 수 있었을까? 라는 잡다는 생각을 접어며 시대적 편년은 차치하고 창건설화의 주인공인 아도화상을 비롯 16분의 조사를 모신 조사전과 정조임금이 사액한 금물이 찬란한 표충사 현판 아래 사명대사와 뇌묵스님을 좌우로 하여 서산대사가 모셔져 있어 동행한 님들과 퇴계와 학봉 후손간에 펼쳐진 병호시비를 입에 올리며 사명당이 서산대사의 적통임을 되새겼다.


표충사당 뒤 동쪽은 대광명전 구역으로 선원이라 출입을 하지 않았지만 제주도에 유배중인 스승 추사의 방면을 축원하며 제자인 위당 신관호와, 소치 허련이 지었으며 초의가 단청을 하였다는데 볼 수 없어 아쉬움이 남지만 사도가 땅에 떨어진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하지 않을 수 없다.


올망졸망 짜집기된 듯한 가람배치의 대둔사에서도 중심영역은 남향하고 있는 북원이겠지만 어찌 남원보다 낮게 위치하고 있어 과연 동시대에 건립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무지개 다리가 놓인 진입공간 침계루가 의문을 해소시키며 넓지 않은 대웅보전 중정으로 답사객의 동선을 유도한다.


아~ 저 글씨가 원교와 추사 그리고 초의 선사의 일화를 간직한 대웅보전, 무량수각 현판이란 말인가! 좁은 중정을 가득 채울 듯한 느낌의 대웅보전,무량수각 서체를 보며 잠시 老阮의 호로 인해 시대적 편년를 더듬어 보았지만, 젖살이 통통한 애기의 볼처럼 느껴진 것은 건방진 심사인가?


장대석 3벌대의 기단으로 보아 조선중하대 이후 중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지만 계단 소맷돌의 도깨비에게 건방진 서체에 대한 감상을 접고, 팔상도와 흔치 않은 사천왕벽화가 그려진 대웅전에서 삼존불 탱화에 대해 유현의 유려한 설명을 듣는다. "본존불 탱에 비해 아미타와 약사여래불의 후불탱은 자기(유현)를 닮아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라는 표현이 압권이었다!


오늘날 제자리를 잡고 있지 못 한 것이 인간이나, 절집이나 뭐 그리 문제일까만은 대둔사 범종각은 건방이 넘쳐 대웅보전 옆에 떡하니 버티고 있다. 더구나 좌체우용을 희롱이나 하듯 좌측에서 눈을 부아리고 큰집(대웅보전)에 드나드는 식객을 감시하는 모습에 기가죽은 듯, 나한전과 산신각은 한 집안에 조용히 고개 숙인 채 말이 없다.


그러고 보니 신라말의 형식을 두루 갖춘 약화된 삼층탑도 제위치를 못찾고 비켜나 있다. 창건시기의 시대적 배경을 거슬러 올라가는대 방해가 되었기에 대접을 못 받았는지 어찌 처량해 보인다.


대둔사 금당 영역을 뒤로하고 부도전으로 내려와 능숙한 솜씨로 진의문(?) 자물통을 열고 잠입해 성공 어려운 한문투성이에서 눈에 익은 몇몇의 단어로 부도의 주인공을 더듬는다.

금강산에서 입적하신 서산대사의 의발을 수습후 대둔사에서 꽃을 피운 고승들의 부도라지만 우리에게는 추사,다산과 더불어 늘 함께 등장하는 혜장, 초의 선사 정도인데 .


허허참! 가장 확실히 알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중수비에 새겨진 이름 이후락!!!


대둔사 부도전도 사찰 서쪽에 모셔진 것은 틀림이 없으나 진입공간에서 치우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나만의 욕심이겠는가?라고 자문해 보지만, 부도전에서 나오라고 소리치는 대둔사를 너무도 사랑하는 트럭기사 보살을 본 순간, 시대는 다르지만 인간의 끝없는 현시적인 욕망이 차이가 없다는 명쾌한 결론을 내리며 달구지에 몸을 실었다. "


2005.03.21                     


 

대웅보전 구역


 

침계루

 

 

 

원교 이광사  圓嶠 李匡師 글씨 


 

대웅보전


 

무량수각 無量壽閣

노완老阮. 추사의 호.


제주 귀양길에 원교의 대웅보전 현판을 내리게 하고 쓴 글 이다.

삼존불을 모신 법당을 전殿이 아니라 객閣으로 격하시켰다.

대단한 객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백설당 白雪堂

해사 海士  김성근 글씨


백운당 白雲堂 아니라 백설당 白雪堂  당호가 이채롭다.

선방 당호 아니었을까?


 

노주석


 

괘불지주


 

대웅보전

원교 이광사  圓嶠 李匡師 글씨

추사가 제주도 귀양에서 해배되어 돌아오는 길에 백설당에 걸려있던 이 현판을 다시 걸게 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대웅보전 측면


 

대웅보전 후면


 

목조석가여래삼존.조선 후기

 


아미타불.아미타탱(1901)

 


석가여래.영산회상탱(1901)

 


약사여래.약사탱(1901)

 

 


닫집


봉황위에 동자가 터고 있다.

 


수미단

 

 

 

 

 

 


삼장탱 (1901)

 


감로탱(1901)

 


칠성탱(1901)

 


신중탱(1901)

 

 

 

 


9개 악기가 그려져 있으나 연등으로 인해 촬영이 어렵다.

 

 


윤장대

예전에 이자리에 범종각이 있었는데... 

 

 

 

해사 海士  김성근 글씨


 

응진전

천장의 용벽화가 이채롭다.


1901년 금어 석옹철유(石翁喆侑) 외 5인이 조성한 석가모니후불탱과 16나한탱ㆍ 사자탱을 봉안하고 있으며, 불단 상부에는 관음과 세지의 보살패를 두고 있다.



나한상. 나한탱(1901)

 

 

나한상

 


인왕

 


인왕

 


산신각

1901년 조성한 산신탱.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삼층석탑

백제고토이지만 신라계 양식을 고스란히 계승한 석탑

 

  


지대석


하층기단

저석과 중석이 일석, 중석에는 탱주 2주와 양우주를 목각

별석의 갑석에는 물매가 있고 호각의 2단 굄을 조출하였다.


 


탑신

전층 양우주를 모각하였고

초층에 비해 상층의 체감률이 크다.


옥개석 층급은 전층 4단이며, 처마의 반전이 경쾌하다.

 

 

상층기단

갑석에 부연을 깊게 새겼다/


 

  

 

상륜

노반.복발.앙화.보륜이 남아 있다.


 


대명광전 구역은 출입금지 전각도 있지만.

강진.보성의 사진에 담고픈 옛님들이 있어 천불전 답사 후 발길을 돌렸다.

 

 

 

가허루

창암 이삼만 蒼巖 李三晩의 글씨

 


천불전

원교 이광사 圓嶠 李匡師 글씨

 

가허루 편액을 쓴 창암과 원교는 사제지간이다.

 


용화당

천불전 향우측 

 


봉황각

 


"대흥사의 천불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48호)에 봉안된 천불상은 경주의 옥석을 가지고 정성스럽게 조각한 정교하고 신비스러운 천개의 불상이다. 천불은 각각 서로 다른 형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중앙의 삼존불은 나무로 만들어진 목불이다. 대흥사의 유물·유적은 수도없이 많이 있지만 세인의 관심을 끄는 유물은 천불이라 할 수 있다.

 

천불이란 다불사상(多佛思想)에 근거하여 과거, 현재, 미래의 삼겁(三劫)에 각기 이 세상에 출현하는 부처님이며, 단순히 천불이라 할 때는 현겁(現劫)의 천불을 말한다. 즉 이세상 어느 때나 무한한 부처가 존재하며, 어느 곳에서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 천불의 표현이다. 


전설에 의하면 초의선사의 스승인 완호(玩虎)대사가 1813년(순조 13)에 천불전을 중건하고 경주의 옥석으로 조각을 하게 했다. 10명의 조각사가 6년에 걸쳐 완성한 천불을 3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울산과 부산 앞바다를 지나 해남 대둔사(대흥사)로 향했다.
항해 도중 한 척의 배가 울산진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일본 장기현(長岐縣)에 밀려갔다.


장기현에서 300여개의 옥불을 실은 배를 발견한 일본인들은 옥불(玉佛)을 보고 서둘러 절을 짓고 옥불을 봉안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불상들이 일본인들의 꿈에 나타나 ‘바닷가에 떠밀린 옥불은 조선국 해남 대둔사로 가는 중이니 이곳에 봉안해서는 안 된다'고 현몽하자 일본인들은 하는 수 없이 옥불을 해남으로 돌려보내면서 그곳에 왔던 옥불상들 밑바닥에 ‘日'자가 새겨 보냈다고 전해진다.  

 

천불전에 봉안된 옥불상은 근세에도 그 영험함을 보였는데 경상도 신도들의 꿈속에 불상들이 현몽하여‘가사를 입혀달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신도들은 서둘러서 가사를 만들어 입히고 4년 마다 항상 새 가사로 갈아 입히고 있다. 천불상의 헌 가사는 모두 신도들이 가지고 가는데 이 가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근심과 걱정에서 벗어난다고 전해진다."...대흥사 홈페지

 

 


성보박물관 청동관음보살좌상

2016년 불교미술박불관 특별전에서 뵈었다.


 

 


부도전.

서산대사를 비롯 비롯하여 풍담(楓潭)ㆍ취여(醉如)ㆍ월저(月渚)ㆍ설암(雪巖)ㆍ환성(喚惺)ㆍ호암(虎巖)ㆍ설봉(雪峯)ㆍ연담(蓮潭)ㆍ초의(草衣) 등의 대종사와, 만화(萬化)ㆍ연해(燕海)ㆍ영파(影波)ㆍ운담(雲潭)ㆍ벽담(碧潭)ㆍ완호(琓虎) 등의 대강사, 그밖에 고승대덕들의 부도이며, 부도 54기와 탑비 27기가 모셔져 있다.

 

 

 

 

오랜시간 부도전에 머물 수 있을 그날은 언제일까?


2018.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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