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포항시

포항...안국사지 부도전

임병기(선과) 2017. 12. 11.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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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안국사.북구 기계면 남계리 301-1

안국사지 옛터에 자리한 사찰이다.

 

안국사지

사지에 세워진 포항 대동중 김희준 선생님의 글과 문화재청 한국의 사지에서 발췌하였다..

 

"창건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으나 상안국사에 있는 안내판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창건되 사찰로 추정한다.

 

조선시대 기록에서는 경주시 기계현에 안국사가 운영되고 있으며, 1800년대 무렵의 광여도의 경주부지도에는 안곡사가 운주산雲住山에 위치하고 있어 안국사의 원 사명이 안곡사였음을 알 수 있다. 사명이 변경된 시기에 대해서는 안곡사로 기록되어 있는 1669년에 간행된 동경잡기, 1800년 무렵의 범우고, 《광여도》등과 안국사로 기록된 성대중成大衆(1732~1812)의 안국사중수기安國寺重修記, 1845년(헌종 11)에 증보, 간행된 『동경잡기』의 권말券末 경주북면운주산 안국사유나소“慶州北面雲住山安國寺維那所” 기록 등으로 보아1800년 전후 무렵에 변경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안국사중수기」에는 1786년 가을에 화재로 소실되어 이듬해에중수하였다고 한다.폐사에 대해서는 을사조약 이후1906년 창설된 의병부대인 산남의진山南義陳의 근거지로 안국사가 이용되다가 1908년 일본군에 의해 소실되어 법등이 끊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안국사 대웅전

단촐하고 오붓한 전각. 화려한 절집 금당보다 오히려 더욱 정감이 간다.

 

 

석가여래. 후불탱

 

 

절아래 부도전

 

 

문화재청 한국의 사지에는 3기 부도로 설명하고 있다.

 

 

부도(1)

한국의 사지에는 원형기단, 탑신, 옥개석을 갖춘 진대사"震大師" 부도로 기재되어 있다.

하지만,개인적으로는 2기 부도 조합이라고 생각되었다.

 


부도(1-1) 

종형 탑신,방형 옥개석의에 보주가 올려져 있다.

완전한 탑신 모습이다.

 

 

뒤편으로 돌아가서 보면

세로로 반파된 모습이다. 상부에 사리공이 남아 있다.

 

 

탑신 하부에는 앙련이 조식되어 있다.

즉 별도의 부도이다.

 

 


부도(1-2) 

한국의 사지에서 원형대좌로 본 부재이다.

나는  탑신이 가로로 잘린 부도로 보였다.

왜냐하면 상부의 탑신과 암질이 다르며 우리나라 부도에서 기단부에 세로로 당호를 새긴 경우는 기억나지 않는다.

더군다나 현재 보이는 진대사震大師 상부에 글씨 한 자가 더 있었다고 판단된다.

 

 

즉.  이 부도는 2기 부도재로 생각된다.

 


부도(2)

2중의 탑신,앙련이 새겨진 상대석과 팔각 중대석복련이새겨진 기단부는 일석이다.

아래 탑신에는 운송가산거사雲松嘉山居士’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 부도도 2기 부도재의 조합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부도(2-1)

종형의 소형 부도재로 연봉형 보주와 일석이다.

 


부도(2-2)

왠지 근자, 또는 일제강점기의 부도처럼 느껴진다?

 


1기 부도가 맞을까?



부도(3)

한국의 사지에는  "연봉형 상륜, 멸실된 연화문 옥개와  한 돌로 조성된 탑신, 원형 연화문기단부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과 기단부 상면에는 각각  원형 사리공이 있다. 승탑은 대부분 멸실이 심해 원형 확인이 어렵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부도 설명도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즉, 상부 보주는 부도재로 보아도 문제는 없지만 방형탑신과 옥개석은 부도재라고 확신이 가지 않는다. 

어쩌면 부도(2-2)와 동일 부재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래 부재는 상부의 사리공이 너무 커서 일견 돌확으로 생각했으나 하부의 앙련이 조식되어 있는 까닭에 부도 탑신이 맞을 듯하며 사리공은 후대에 확장하여 돌확으로 사용했던 것 같다.

 

 

하부 부재는 부도(1-2)처럼 탑신하부에 앙련을 갖춘 부도로 동일 장인 계열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공덕비편

상면에  가로로 보사공덕비補寺功德碑가 음각되어 있어 중수공덕비로 추정되며, 가선嘉善은 시주자의 벼슬 같다.

하부 비편 제일좌측의 수승首僧 명문도 남아 있어 여러명의 스님이 주석했음을 알 수 있다.

 

  


비좌

 


왜 이런 산골 절집 부도가 큰 상처를 입었을까?

사지에 세워진 안내문 글을 지은 포항 대동중 김희준선생님의 경북일보(2011년08월12) 기고문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1905년 2월 22일, 일본은 독도를 도둑질하였다. 이 해에 을사 강제 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주권을 강탈하였고,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1906년 3월, 영천·포항의 1천여 명의 사람들이 참가하여 의병부대, 산남의진을 창설하여 치열한 항쟁을 벌였다. 총수는 동엄 정환직(鄭煥直, 1844-1907) 선생이고 대장은 그 아드님 단오(丹吾) 용기(鏞基, 1862-1907)였다. 영덕 이북에서는 신돌석 의병부대가 맹활약을 펼쳤다. 영국제 스나이더 연발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상대하여 의병은 산악 지형을 이용하는 게릴라 전투를 하였고 산중의 사찰들은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1907년에는 전국의 의병이 연합하여 서울 수복 전쟁을 펼쳤다. 이 무렵, 서울에서 동해안을 타고 포항으로 내려온 동엄 선생은 평시 항일전의 근거지가 된 포항시 기계면의 운주산 안국사(安國寺)에서 단오 대장을 비밀리에 만났다. 산남의진이 낙동정맥을 타고 북상하여 서울 수복 전쟁에 합류하는 작전을 의논하기 위함이었다.


얼마 후 일어난 죽장면 입암리 전투에서 단오 대장과 이한구 중군장, 손영각 참모장을 비롯하여 본진의 많은 의병들이 산화하였다. 1907년 9월 1일에 일어난 한국독립운동사상 대혈전이었다. 백발노장 동엄 선생이 아들의 주검을 거두고는 2대 의병장이 되어 항쟁을 계속하다가 동대산에서 체포되어 영천 서세루 아래 남천 가에서 총살되고 말았다.


뒤를 이어 18세기 당대 최고의 저항 시인이었던 농수 최천익(崔天翼, 1712-1779)진사의 방손으로 을미의병을 지휘하기도 하였던 흥해의 선비 농고(農膏) 최세윤(崔世允, 1867-1916) 선생이 영천 거동사(巨洞寺)에서 3대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선생은 장기 용동에서 체포되어 형산강을 건널 때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을 시도 했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다가 나라가 망하자 11일 간의 단식 끝에 순국하였다.


일본군은 친일파를 앞세워 의병 항쟁을 돕고 그 근거지가 되는 전국의 사찰들을 폐허로 만들었다. 전각들은 불 지르고 석조물은 부수었다. 산남의진의 항일 전쟁 중에 보현산 비상사, 비학산 법광사, 운주산 안국사가 일본군의 표적이 되어 초토화 되었다."


2017.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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