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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탑동마을 석탑재

임병기(선과) 2017. 9. 28. 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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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구 지산동 탑동마을.탑동길 105

마을 옆에 정려각과 비석이 자리잡고 있다.

고려 중후기(?) 석탑 아니었을까?

 

 

평택임씨 삼강유허비平澤林氏三綱 遺墟碑

(저의 본관이기에 자료를 찾아 보았다)

 

학자. 의병장인 송사 기우만 짓고, 후손 철주의 글씨. 1915년에 세웠다.

 

"선무랑(宣務郞) 임영수(林英秀)가 중심인물이다. 그의 가계에 대해 언급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려 때의 명신(名臣)인 충정공(忠貞公) 임언수(林彦脩)가 그의 선조이고, 조부인 임백근(林百根)은 현령(縣令)이었으며, 부친 임휴(林畦)는 의행(義行)으로 천거되어 침랑(寢郞)에 제수되었으나 정국이 어지러워 벼슬길을 달가워하지 않고, 손수 소나무, 대나무, 잣나무를 심고는 '삼청(三淸)'으로 자호(自號)하였다.

무관(武官)인 임영수(林英秀)는, 계사년(1593년)에 경성(京城)에서 순국하게 되고, 그의 아들 임계(林桂)는 복수를 생각하던 차에, 정유재란(1597년)이 발발하자 이복남(李福男)의 막하에 들어가게 된다. 결국 그는 용성(龍城 남원)에서 왜군을 막다 성이 함락되어 전사한다. 임계(林桂)의 어머니가 이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남편이 죽었는데도 죽지 않은 건 자식이 있기 때문이었다. 자식도 아버지를 이어 죽었는데 나 또한 남편을 따르겠다."하고는 자진(自盡)하였다.

며느리도 같은 날 자진한다. 이후 '이괄(李适)의 난' 때 임계(林桂)의 아들인 임광윤(林光胤)의 명으로 그의 두 아들 임은(林嶾)과 임두(林㞳)는 공주(公州)까지 인조(仁祖)를 호종(扈從)하였으며, 병자호란(1636년)이 일어나자 임광윤(林光胤)은 군사를 모집하여 가던 중에 화의소식을 듣고 돌아왔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풀뿌리미디어 기사 발췌(2015년 05월 25일)

 

 

마을 뒤편 사적이 알려지지 않은 폐사지 대나무 숲에 방치되어 있던 부재를 가져와 정려각 초석으로 사용하였다.

 

 

연화문이 조식된 부재

콘크리트로 하부가 묻혀있어 석탑 옥개석(?) 또는 석불대좌 여부인지 단언 할 수 없다.

 

 

석탑 옥개석

1단의 괴임, 낙수면 물매가 깊고 우동이 분명하다.

역시 하부가 매장되어 층급받침은 확인하지 못했다.

 

 

석탑 갑석(?)

갑석이 맞다면 소형의 석탑으로 추정가능 하다.

 

 

2017.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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