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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용진사지 부도

임병기(선과) 2017. 9. 27.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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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진정사湧珍精舍

용진사 옛 절터에 건립한 용진정사는  한말의 도학자 후석後石 오준선吳駿先(1851∼1931)이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자 망국의 한을 달래면서 용진산에 강당을 짓고 후진 양성에 힘쓴 곳으로서 한말 호남 의병활동의 본거지이기도 하였다.

 

절이 허물어진 뒤 청안이씨들이 그 터를 가지고 있었으나, 후석이 정사를 짓는다는 말을 전해듣고 옛 절터의 상대와 중대를 희사함으로써 정사를 지을 수 있었다. 후석이 별세한 뒤 문인들이 정사 동쪽에 3칸의 용진영당湧珍影堂을 세우고 1924년 석지 채용신이 그린 초상화를 모셨다. 영당의 좌우벽에는 큰아들 북파 오헌수와 둘째 아들 도호 오동수의 영정이 함께 걸려있다.

 

 

후석 오준선

후석은 본관이 나주이며 광산구 도덕동 도림마을에서 오하규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백부 향규에게 입양 되었다. 8세 때부터 이웃에 사는 친척 오태규로부터 사서와 근사록을 배웠다. 이어 18세 때부터 노사 기정진에게 배웠으며, 이를 계기로 송사 기우만, 식재 기재, 현와 고광선 등과 사귀었고, 전재 임헌회, 입재 송근수 등에게서 학문의 폭을 넓혔다. 그의 학문 체계는 경학, 성리학, 예학, 의리론 등의 영역에서 찾을 수 있다.
 
1910년 일제는 명사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은사금이라는 금품을 지급하여 하였는데, 이를 거절하자 헌병대로 끌려 가 갖은 협박을 받았으나 끝내 받기를 거절하였다. 이후 1917년 용진산에 들어가 193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후학을 가르치니, 문하생이 600여명에 이르렀다. 1919년 고종이 승하 하자 문하생들과 용진정사 앞의 바위에서 통곡하였는데, 그뒤 이 바위를 읍궁암泣弓岩이라 불렀고, "원수를 갚기 전에는 상복을 벗을 수 없다."하여 일생동안 백립을 쓰고 지냈다. 명정에 조선유민이라 쓰도록 유언하였다. 1934년에 그의 학문적 체계를 정리한 문집 25권 12책이 간행되었다.

 

 

석촌 윤용규의 글

 

 

수조

용진정사 측면에 위치

 

 

용진영당湧珍影堂

1924년 석지 채용신이 그린 초상화를 모셨다. 영당의 좌우벽에는 큰아들 북파 오헌수와 둘째 아들 도호 오동수의 영정이 함께 걸려있다.

 

 

용진사의 사적은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14세기에 작성된 삼봉 정도전의 삼봉집三峯集의 극복루기克復樓記와 극복루기후克復樓記後 기록을 통해 고려후기 이전에는 창건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후 신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범우고梵宇攷에 존속하고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용진사터에 1917년 용진정사가 세워지는데 이를 통해 용진사는 19~20세기 사이에 폐사되었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용진사지 부도

조선후기의 부도로 한국의 사지 사진에는 영당 입구에 바로 서 있었으나 현재는...

 

대좌와 상륜이 결실된 상태이며 하부에 사리공이 있다.

상륜도 별석으로 조성되었을 것이다.

 

한국의 사지에는 채련당採蓮堂 당호가 음각되어있다고 했으나 확인할 수 없었다.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이 나주 회진에 유배되어 있는 동안 용진사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남긴 오언율시가 삼봉집 2권에 실려있다.

 

등용진사극복루 登湧珍寺克復樓 용진사 극복루에 오르다

증독산인기曾讀山人記 일찍이 산인의 기를 읽고서

사등극복루思登克復樓 극복루에 오르리라 생각했다오

시심태경세試尋苔徑細 이끼 낀 오솔길을 더듬어 찾아

래입동묺유來入洞門幽 깊숙한 동문에 들어를 왔네

고목천장수古木千章秀 천 길이라 고목은 빼어나 있고

심계팔월추深溪八月秋 팔월이라 계곡은 가을이로세

쇄연척번려灑然滌煩慮 번거로운 생각이 씻은 듯하니

련가차엄유聊可此淹留 여기서 오래 오래 머물렀으면

 

그런데

산지중정의 루대이름이 극복루克復樓

어쩐지 논어의 극기복례克己復禮에서 유래된 느낌이 든다.

 

2017.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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