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봉서원 전체적으로 3단의 구획이며 외삼문, 동서재, 묘정비는 하단에 위치하며, 중단영역에는 강학공간인 빙월달, 장판각, 전사각이 있으며, 상단에는 내삼문, 제향공간인 숭덕사가 자리한 전학후묘의 배치이다.
고봉 사후 7년만인 1578년 호남유생들이 망천사라는 사당을 세워 배향하였으나, 1592년 임진왜란의 전화를 입어 현재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이후 1654년 효종이 월봉서원 명을 사액하여 서원의 면모를 갖추었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문을 닫았다가 1941년 빙월당을 짓고, 1978년 사당.장판각,내,외삼문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기대승奇大升 본관은 행주.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존재(存齋). 아버지는 진(進)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증(贈) 이조판서 문민공(文愍公) 준(遵)의 조카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며, 김인후(金麟厚)·정지운(鄭之雲)·이항(李恒) 등과 사귀었다. 1549년(명종 4)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1년 알성시(謁聖試)에 응해서 시험에 합격했으나, 준의 조카라는 사실을 안 당시의 시험관 윤원형(尹元衡)의 방해로 낙방했다. 1558년 문과에 응시하기 위하여 서울로 가던 도중 김인후·이황 등과 만나 태극설(太極說)을 논하고 정지운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얻어 보았다.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다 그해 10월 이황을 처음으로 찾아가 태극도설(太極圖說)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1562년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1563년 3월 승정원주서에 임명되었다. 그해 8월 이량(李樑)과의 불화로 삭직되었으나, 종형 대항(大恒)의 상소로 복귀하여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이 되어 청직(淸職)에 들어섰다. 이듬해 10월에 병조좌랑을 지내면서 지제교를 겸임했다 이어 1565년 이조정랑을 거쳐, 이듬해 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사헌부헌납·의정부사인을 두루 지냈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사헌부 집의·전한(典翰)이 되어 기묘사화와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윤원형 세력이 반대파를 숙청한 사건)으로 죽음을 당한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을 건의했다. 1568년(선조 1) 우부승지로 시독관(侍讀官)을 겸직했고, 이듬해 대사성에 올랐다. 1570년 을사위훈(乙巳僞勳)을 논할 때, "을사(乙巳)의 녹훈(錄勳)이 위훈(僞勳)이 아닐 뿐더러 또 선왕이 이미 정한 것이니 삭탈할 수 없다"고 하여 삭탈을 주장한 사람들의 반발을 사 벼슬에서 물러났다. 1571년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수찬관·예문관직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72년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고, 이어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임명되었다. 공조참의를 지내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그해 11월 고부에서 병으로 죽었다. 이기일원론 그는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기준 등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고 있다 그의 주자학설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은 이황·정지운·이항 등과의 논쟁을 통하여 체계가
이어서 "사단칠정이 모두 다 정(情)이다"라고 하여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에 입각한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했다. 성(性)과 정(情)은 미발(未發)·이발(已發)의 다름이 있을 뿐 불가분의 표리관계에 있음을 강조하고, 그 성(性)은 선(善)하지 않은 것이 없고 정(情)도 그 성(性)이 발하여 된 것이므로 불선(不善)이 있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사단칠정을 이기(理氣)에 분속(分屬)시킨다면 이(理)와 기(氣)를 독립된 별물(別物)로 보게 되어 사단 속에 기(氣)가 없고 칠정(七情) 속에는 이가 없게 된다고 했다. 이러한 주장은 사단과 칠정을 대설(對說)이 아닌 인설(因說)로 파악하는 것으로 결론짓게 된다. 그는 사단이 칠정 중의 사단인 것처럼 본연지성(本然之性)으로서의 순리(純理)도 겸기(兼氣)인 기질지성(氣質之性) 중의 것임을 의미한다고 하여 심성론적(心性論的)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러나 사단과 칠정의 구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기의 주재자(主宰者)요, 기는 이의 재료인 것이다. 이 둘은 본래 나누어져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사물에 존재할 때는 본래 혼륜(混淪)되어 분개(分開)할 수 없다. 단 이약기강(理弱氣强)하고, 이는 조짐이 없으나 기는 흔적이 있으므로 그것이 유행(流行)·발견될 때 과불급의 차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칠정이 발할 때 혹은 선하고 혹은 악하여 성(性)의 본체도 혹 완전할 수 없게 되는 까닭인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이기(理氣)는 논리적으로 구별되지만 실제에서는 떨어져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편, 심성론을 중심으로 사단과 칠정의 차이를 중절(中節)과 부중절(不中節)로써 설명했다. 이러한 관점은 태극도설에도 반영되었다. 태극(太極)은 이(理)로서 주재자요, 음양(陰陽)은 기(氣)로서 재료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이약기강설(理弱氣强說)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 <주자학자> 정치사상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 사상을 이어받아, 전제주의 정치를 배격하고 민의에 따르고 민리(民利)를 쫓는 유교주의적 민본정치(民本政治)·<왕도정치</A>(王道政治)를 이상으로 삼았다. 그의 정치사상은 명종과 선조에 대한 경연강의(經筵講義)에 담겨 있다. 〈논사록 論思錄〉</A>에 제시된 이는 거현(擧賢)이야말로 양민(養民)하기 위한 지름길이라고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현자들이 화를 입으면 소인배들이 득세하고, 그들의 사치와 사욕으로 말미암아 민재(民財)가 약탈되므로 민심이 흩어지게 된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임금은 재용(財用)을 선처하여 민생들로 하여금 그 혜택을 입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러한 이재양민이 정치의 요체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국가정치의 일차적인 근본인 군덕(君德)의 증진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덕치(德治)의 두 기둥인 존현(尊賢)과 이재(理財)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예<(禮)가 강조되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예란 "천리(天理)의 절문(節文)이오 인사(人事)의 의칙(儀則)"이었다. 특히 예는 "천명(天命)의 성(性)에서 나왔으므로 범인(凡人)은 이를 알지 못하고 성인(聖人)만이 이를 안다. 그리하여 예법을 만들어 일세(一世)를 교화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하면서, "임금이 지성으로 현자를 신임하지 않는다면 현자 또한 어떻게 쓰여질 것인가, 오직 임금의 현자를 쓰려는 성의가 있느냐에 있을 따름이다"라 하여 신하의 상향적인 예뿐만 아니라 임금의 신하에 대한 예도 강력히 요구했다. 또한 그는 "언로(言路)는 국가의 대사(大事)이다. 언로가 열리면 국가는 안정되고 언로가 막히면 국가는 위태롭다"라고 하여 임금이 언로를 막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만 시비(是非)를 명확히 가려 소인배의 득세를 방지할 수 있다는 제자로는 정운룡(鄭雲龍)·고경명(高敬命)·최경회(崔景會)·최시망(崔時望) 등이 있다. 1590년(선조 23) 종계변무의 주문(奏文)을 쓴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덕원군(德原君)으로 추봉되고,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논사록〉·〈주자문록 朱子文錄〉·〈고봉집〉 등이 있다. 광주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출처/다음.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외삼문 망천문 望川門
빙월당 월봉서원의 강학공간으로 빙월당은 효종이 내린 제문에 고봉의 고결한 학덕을 상징하는 精金潤玉(정금윤옥) 水月氷壺(수월빙호)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송준길의 글씨.
이산로의 작품 원본은 장판각에 보관
후면에 쪽마루
전면 툇마루
묘정비廟庭碑 월봉서원 묘정비문 月峯書院廟庭碑文 조선조 명종선조 년간에 문운이 빈빈하고 사류가 성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전대에 겪은 사화의 남은 불씨가 아직도 척신과 같이 간인의 사이에 남아 있어서 은밀히 선비를 해치는 재앙을 빚고 있기도 했다. 이런 때를 당해 힘써 독류를 배척하고 청의를 끌어당기며 의리를 밝혀 학문이 이룩되고 도가 높아 우뚝하게 유종이된 분은 가로되 고봉 기선생이시다. 일찍이 사헌부 집의가 되어 경연에 입시하여 아뢰기를 `천하의 일에 옳고 그름이 없을 수 없사옵니다. 옳고 그름을 밝힌 뒤에야 사람들이 마음으로 복종하고 정부의 명령도 순조롭게 진행이 되는 것이옵니다. 대저 옳고 그름은 비단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실상 천리에서 나오는 것이 옵니다. 한때 비록 가리우고 베어내 버린다 하더라도 그 옳고 그름을 아는 본심은 끝내 없어지지 않사옵니다.`하셧고 또 아뢰기를 `언론창달은 국가에 중대한 일이 옵니다. 언로가 열려 있으면 국가가 평안하고 언로가 막혀 있으면 국가가 위태롭습니다.`하셨으며 또 어진이를 등용하는 도를 논하기를 한강으로 나와 하룻밤 묵는데 서울의 사대부들이 조정을 비우다시피 전송을 나왔다. 5월에 고마산아래에 자그만 집을 지어 낙암이라 이름 붙였으니 퇴계의 글 가운데 `가난 할수록 더욱 도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었다. 이보다 앞서 선생께서는 청량봉아래 자그마한 집을 지어 은거하며 공부할 곳으로 삼았는데 귀전이라 이름하였다. `부모가 온전히 낳으심에 자식이 온전히 몸을 보존하여 돌아간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문인으로 좇아 배우는 자가 더욱 많았으며 사림의 중망이 선생에게로 돌아왔다. 여러번 소명이 있었으나 상소를 올려 사퇴했다. 만약 공부한 이들 사이에서 옛 성현의 진면목을 헤아려 논한다면 나도 또한 부끄러울 것이 없지만 다만 한 일들이 옛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니 그것이 두렵습니다.` 하셨다. 다음날 길을 재촉해 김공의 집에 이르러 이틀만에 돌아가시니 11월 1일이었다. 때에 밤이 사경인데 갑자기 바람이 거세게 불고 우뢰와 번개가 치므로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향년 46세이었다. 임금이 선생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특별히 어의에게 약을 갖고 달려가 치료하게 하고 또 위문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지만 다 미치지 못하였다. 때에 황강 김계휘공이 본도의 감사로 있어 힘을 많이 썼고 또한 강진의 언답 30여석지를 서원으로 넣어 주었다. 그 후에 송강 정철공이 감사가 되어 또한 많이 돌보아 주었고 노비와 전토도 지급해 주었다. 1592년 임진왜란 후에 망월봉아래 동천위로 이건 하였으며 효종 5년 1654년에 월봉서원으로 사액이 되었으며 1655년 4월에 편액을 맞이 하였고 예랑 원격이 제문을 받들고 와서 치제했다. 현종 10년 1669년에 중창을 했고 1671년에 문간공 눌제 박선생 문충공 사암 박선생을 추향하였으며 숙종 9년 1683년에 문원공 사계 김선생을 추향하였고 문경공 신독제 김선생을 종향 하였다. 정조 12년 1788년 4월에 예조좌랑 박흥복이 명을 받들고 와서 치제하였다. 고종 5년 1868년 훼철 되니 사림과 자손이 모두 슬퍼하고 통탄해 마지 않았다.
서기 1998년 무인 5월 상한
서재 존성재 存省齋 자기를 살핀다는 의미
동재 명성재 明誠齋 밝은 덕을 밝히는데 성의를 다하라.
내삼문 정안문 靜安門
숭덕사 崇德祀 3월과 9월 향사를 올린다.
망료단 望燎檀 축문을 태우는 곳
관수대 盥水臺 향사를 올리기전 손을 씻는 물을 준비 해둔다.
전사각 典祀閣 대부분전사청이라고 하는 각閣으로 하였다.
장판각 藏板閣
백우정 白牛亭
혼자 이었다면 천천히 걸어 묘소도 둘러보며 좀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을텐데 단체 답사라는 제약 때문에 충분히 둘로보지 못 한 것이 아쉽다. 더불어 현장의 문화유산해설사님에게 감사드린다.
2019.03.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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