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영월군

영월...청령포

임병기(선과) 2017. 9. 20.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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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최근에는 금년 5월 답사 동호회원들과 답사, 작년에는 고교동창 모임,그 이전에도 여러번 다녀왔고 글도 여러편 올렸다.

하지만 청령포는 30살이 넘은 우리아이들 초교시절 이후 그냥 건너 뛰었었다.

오늘은 초교동기들과 1박2일 여행중에 잠시 들렸다.

 

 

청령포

 

"창덕궁 대조전에서 유배교서를 받고 1457년 음력 6월 22일 돈화문을 출발한 단종임금의 유배행렬은 약 천리 길을 걸어 꼬박 일주일 후인 6월 28일 마침내 유배지인 영월의 청령포에 이르렀다.

이곳은 송림이 빽빽이 들어차 있고 서쪽은 육육봉이 우뚝 솟아 있으며 삼면이 깊은 강물에 둘러싸여 한눈에 보기에는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출입할 수 없는 마치 섬과도 같은 곳이었다.서강의 강줄기가 북쪽, 동쪽, 남쪽의 삼면을 말발굽에 박는 U자 모양의 편자처럼 휘감아 돌고, 서쪽은 험준하게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육지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외딴 섬 같은 절해고도(絶海孤島)였다.이곳에 누구든 가둬놓고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다면, 꼼짝달싹할 수 없는 지형이었으니 유배지로서는 최적의 장소였던 셈이다. 어린 단종은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이곳에서 외로운 유배생활을 시작하였다."...영월군청

 

 

단종어소와 행랑채

 

 

행랑채.
행랑채는 단종을 따라 온 궁녀와 관노가 생활하던 곳이다.2000년 4월 복원

 

 

 

단종어소端宗御所

단종이 두 달 동안 유배생활을 했던 집으로,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근거로 2000년 4월 복원했다.

 

단종. 적통이면서도 가장 비운의 삶을 산 왕이었다.

 

"1441(세종 23)∼1457(세조 3). 조선 제6대 왕.

재위 1452년(단종 즉위년)∼1455년(단종 3).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홍위(李弘暐). 아버지는 문종이며, 어머니는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權氏)이다. 비는 여산부원군(礪山府元君)송현수(宋玹壽)의 딸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宋氏)이다.1448년(세종 30) 8세 때 의정부의 청으로 왕세손에 책봉되고, 1450년문종이 즉위하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왕세자 책봉이 있던 해, 문종은 왕세자를 위해 처음으로 서연을 열고 사(師)·빈(賓)들과 상견례를 하였다. 이때 문종은 좌빈객 이개(李塏)와 우사경 유성원(柳誠源)에게 왕세자의 지도를 간곡히 부탁하였다. 1452년 5월문종이 재위 2년 만에 경복궁천추전(千秋殿)에서 죽자 그 뒤를 이어 근정전(勤政殿)에서 즉위하였다.

즉위에 즈음해 나이가 어려 정치하는 일에 어두우니 모든 조처는 의정부와 육조가 서로 의논하여 시행할 것과, 승정원은 왕명 출납을 맡고 있으므로 신하들의 사사로운 일은 보고하지 말도록 교서를 내렸다.

 

문종의 고명을 받은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이 측근에서 보좌하였다. 또한 집현전 학사 출신인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신숙주(申叔舟)·이개·유성원 등은 지난날 집현전에서 세종으로부터 보호를 부탁받았으므로 측근에서 협찬하였다.이 해 윤9월 『논어(論語)』를 강론할 때, 왕이 ‘사무사(思無邪)’라는 문구의 뜻을 물었다. 이에 박팽년은 “생각에 간사함이 없고 마음이 바름을 이른 것이며, 마음이 바르게 되면 일마다 바르게 되는 것”이라 대답하였다. 10월 박팽년을 집현전부제학으로 삼았는데, 학문이 정밀, 심오해 경연에서 강의할 때마다 깨달은 바가 많았으므로, 특별히 통정대부에 가자시켜 임명했던 것이다.

 

이 해 고려의 개국공신 배현경(裵玄慶)·홍유(洪儒)·복지겸(卜智謙)·신숭겸(申崇謙)과 유금필(庾黔弼)·서희(徐熙)·강감찬(姜邯贊)·윤관(尹瓘)·김부식(金富軾)·조충(趙沖)·김취려(金就礪)·김방경(金方慶)·안우(安祐)·김득배(金得培)·이방실(李芳實)·정몽주(鄭夢周) 등을 왕씨(王氏) 묘정(廟庭)에 종사(從祀)하도록 하였다. 1453년(단종 1) 4월 경회루에 나가서 유생들을 친히 시험 보이고, 또 모화관에 가서 무과를 베풀었는데 권언(權躽) 등 40명이 뽑혔다. 온성과 함흥 두 고을에 성을 쌓고, 나난(羅暖)·무산(茂山)의 두 성보(城堡)를 설치하였다. 악학제조 박연(朴堧)이 세종의 『어제악보(御製樂譜)』를 인쇄, 반포하기를 청하자, 허락하였다. 왕이 대신 황보인·김종서·정분(鄭苯) 등에게 자문해 박중림(朴仲林)을 대사헌에 임명하였다.

 

한편, 양성지(梁誠之)에게 『조선도도(朝鮮都圖)』·『팔도각도(八道各圖)』를 편찬하게 하였다. 1454년 정월에 송현수(宋玹壽)의 딸을 맞이 해 왕비로 삼았다. 이 달에 집현전직제학 양성지가 『황극치평도(皇極治平圖)』를 찬진하고, 3월 춘추관에서 『세종실록(世宗實錄)』을 찬진하였다. 그 해 5월 좌승지 박팽년이 경연에서 왕에게 안일과 태만을 경계하도록 진언하였다. 왕이 대궐 안에서 자주 활쏘기를 구경하면서 경연을 여러 차례 정지시켰기 때문이었다.8월에는 각 도의 관찰사에게 유시해 효자(孝子)·순손(順孫)·의부(義夫)·절부(節婦)와 공평, 청렴하고 현저히 공적이 있는 수령을 상세히 기록해 알리도록 했는데, 이는 그들을 발탁, 등용하여 권장하기 위해서였다.보루각(報漏閣)을 수리하고 『고려사(高麗史)』를 인쇄, 반포하였다. 12월 각 도 관찰사에게 유시해, 둔전(屯田) 설치 계획을 수립해 알리도록 하였다.

 

1453년 10월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정권을 빼앗고자 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 등 측근들의 계책에 따라 좌의정 김종서를 그의 집에서 죽이고, 영의정 황보인, 병조판서 조극관(趙克寬), 이조판서 민신(閔伸), 우찬성 이양(李穰) 등을 대궐로 불러와서 죽였다. 그들의 죄명은 숙부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추대해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다.

 

일의 시비를 가리기도 전에 정권은 수양대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요구에 따라 수양대군을 영의정으로 삼아 군국의 중대한 일을 모두 위임시켜 처리하게 하였다. 또, 당시 거사에 참가한 사람들을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인정하여 모두 공신 칭호를 주기까지 하였다.그리고 그들이 지칭한 난리의 장본인인 안평대군과 그 아들 이우직(李友直)을 조신들의 주청에 따라 강화교동현(喬桐縣)에 이치(移置)했다가 안평대군은 사사되고 이우직은 진도로 옮겨 안치되었다. 이 일련의 조처는 집권자인 수양대군의 주변 인물들에 의해 결정된 것으로서 왕의 의사는 무시되었다.

 

이 해 하위지를 좌사간, 성삼문을 우사간, 이개를 집의, 유응부를 평안도도절제사로 각각 임명하였다. 실권을 잡게 된 수양대군은 지방에도 자기 세력을 심기 위해 지방관을 교체시키던 중, 이징옥(李澄玉)의 난을 겪기도 하였다.1455년 윤6월 수양대군이 조정의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여 왕의 측근인 금성대군(錦城大君) 이하 여러 종친·궁인 및 신하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각 지방에 유배시키기를 요구하자, 하는 수 없이 그대로 따랐다.이러한 주변 정세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단종은 마침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어 수강궁(壽康宮)으로 옮겨 살았다.

 

1456년(세조 2) 6월 상왕을 복위시키려는 사건이 일어났다. 복위 사건의 주동 인물은 지난날 집현전학사 출신인 몇몇 문신과 성승(成勝)과 유응부(兪應孚) 등 무신들이었다.이들은 세종과 문종에게 특별한 은혜를 입었으며, 또 원손(元孫: 단종)을 보호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은 인물들이었다. 때문에 어린 상왕을 복위시키는 것이야말로, 곧 국가에 대한 충성이며 선비의 의무라 생각하였다.

이들은 명나라 사신을 창덕궁에 초대해 연회하는 날, 그 자리에서 세조를 죽이고 측근 세력도 제거한 뒤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계획이 실행되기도 전에 동모자인 김질(金礩)의 고발로 결국 실패하고, 이 사건의 주동 인물 중 많은 사람이 사형을 받게 되었다.

 

단종은 이 사건이 있은 뒤 더욱 불안을 느끼고 있었는데, 조신 가운데 상왕도 이 사건에 관련되었으므로 서울에서 내쫓자는 주청이 있었다.이에 1457년 6월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영월에 유배되었다. 영월에서 유폐 생활을 하는 동안, 매일같이 관풍매죽루(觀風梅竹樓)에 올라 시를 지어 울적한 회포를 달래기도 하였다.

 

이 해 9월 경상도순흥에 유배되었던 노산군의 숙부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다시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었다. 이에 다시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강봉되었다가 10월 마침내 죽음을 당하였다.1681년(숙종 7)에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1698년 전 현감 신규(申奎)의 상소에 의해 복위가 결정되었다. 시호를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으로, 묘호를 단종으로 추증하고, 능호(陵號)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단묘유지비각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

단종의 옛 유배지 터를 기념하기 위해 영조 39년에 세웠다.

화강석 기단 위에 오석으로 된 비신을 세웠으며 영조의 글씨이다.

뒷면에는 황명숭정무진기원후삼계미계추읍체경서영원영수석세 歲 皇明崇禎戊辰 紀元後三癸未 季秋泣涕敬書 令原營竪石"의 명문으로 1763년 9월에 원주감영으로 하여금 쓰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단종어소를 향해 자라고 있는 소나무

 

 

 

관음송觀音松

천연기념물 제349호.수령 600여년

단종이 노산군이 되어 유배생활을 할 때 이 나무에 걸터앉은 비참한 모습을 보았으며(觀), 오열하는 소리(音)를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관음송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 중에서 키가 가장 큰 나무이며, 주변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는 이 나무의 종자에서 퍼져나간 나무들이라고 본다.

 

 

 

 

망향탑望鄕塔

어린 단종이 한시도 잊지 못했을 그리운 얼굴들

 

부인 정순왕후.할버지 세종. 아버지 문종

안평대군. 금성대군. 사육신...

 

 

 

무심히 흘러가는 서강을 바라보며 왕방연의 시조를 떠올린다.


천만리 머나 먼길 고운 님 여의옵고
내마음 둘대 없어 냇가에 앉았어니
저물도 내맘 같아 울어 밤길 예놋타

 

 

 

노산대魯山臺

단종이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던 장소

 

 

 

 

청령포금표비淸冷浦禁標碑

1726년 영월부사 윤양래가 세웠다고 전한다.

 

 

금표비禁標碑

동서삼백척 남북사백구십척東西三百尺 南北四百九十尺

차후니생역재당금此後泥生亦在當禁」 

숭정구십구년병오십일崇禎 九十九年丙午十日 


출입금지 구역

동서로 300척 남북으로 490척이고, 이후에 진흙이 쌓여 생기는 곳 또한 마땅히 출입을 금지한다
영조2년(1726년)병오 10일 

 

 

 

 

 

올 수 있으려나?

 

아래 사진과 글은

단종이 사약을 받은 영월시내 관풍헌과 왕릉으로 옛답사기에서 발췌하였다.

 

2016년

 

관풍헌觀風軒

조선시대 관아 건물로 1392년 지어졌다고 한다.

현재는 보덕사 포교당으로 활용되어 중앙에 약사전. 좌측에 객사였던 관풍헌, 우측 부속건물 이 남아 있다.

세조 2년(1456) 6월 28일, 단종이 청령포에 유배되었다가 홍수 때문에 이곳으로 옮겨와 머물던 중, 세조의 명으로 금부도사 왕방연이 가지고 온 사약을 먹고 1457년 10월 24일 사사된 곳이라 전한다.

 

 

약사전에 걸린 벽화. 그림은 운보 김기창화백 작품 같다.

예전 보덕사 답사기에 올렸던 글을 가져 왔다.

 

그림은 단종과 추익한의 이야기로 묘사한 내용으로 추익한과 더불어 단종의 시신을 우습한 엄흥도, 정사종의 글을 다음에서 검색했다.

 

한성부윤을 지낸 추익한은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어 외로운 나날을 보낼 때, 산머루를 따다 드리고 자주 문안을 드렸다한다. 세조가 금부도사 왕방연을 시켜 관풍헌에서 사약을 내리던 그날도 추익한은 산머루를 따가지고 단종임금에게 바치려고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연하리 계사폭포에서 단종을 만났다. 추익한이 단종에게 어디로 가시느냐고 묻자 곤룡포에 익선관으로 정장을 하고 백마를 탄 단종은 태백산으로 간다하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이상하게 여긴 추익한이 급히 단종의 처소로 와보니 이미 변을 당한 뒤였다. 추익한은 단종과 만났던 계사폭포에 와서 단종을 따라 죽었고, 그리하여 추충신은 단종임금과 함께 태백산의 신령이 되었다고 한다.

 

2016년

 

자규루子規樓.
영월군수 신숙근이 세종 10년(1428)에 창건하여 매죽루라고 하였으나, 후에 단종이 이곳에 거처하면서 누각에 올라 자신의 고뇌를 ‘자규사’ 및 ‘자규시’로 읊은 것이 계기가 되어 이름이 자규루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 후 선조 38년(1605)의 대홍수로 폐허가 되었는데, 강원도관찰사 윤사국(1728-1809)이 정조 15년(1791)에 영월을 순찰할 때 옛 터를 찾아 중건하고 단종의 시를 봉안하였다.

 

 

단종...자규시      

 

            피눈물 흘러서 봄꽃은 붉다                                             血淚春谷落花紅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을 떠난 뒤로                           一自寃禽出帝宮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속을 헤맨다                 孤身隻影碧山中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假面夜夜眠無假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窮恨年年恨不窮

 

두견 소리 끊어진 새벽 멧부리에 지새는 달빛만 희고          聲斷曉岑殘月白

피를 뿌린 듯한 봄 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血流春谷落花紅

 

하늘은 귀머거린가? 애달픈 하소연 어이 듣지 못하는지?     天聾尙未聞哀訴

어찌하여 슬픔 많은 이 사람의 귀만 홀로 밝은고...              何奈愁人耳獨聽

 

2017년 5월

 

장릉莊陵.

 

숙종실록 32권, 숙종 24년 11월 6일 정축 2번째기사 1698년 청 강희(康熙) 37년

노산군의 시호를 추상하다


대신(大臣)·육경(六卿)·의정부의 서벽(西壁)과 관각(館閣)의 당상(堂上)들을 빈청(賓廳)에 모이라 명하였다. 노산 대군(魯山大君)의 시호(諡號)를 추상(追上)하여 ‘순정 안장 경순 대왕(純定安莊景順大王)’이라 하였는데, 중정 정수(中正精粹)함을 순(純)이라 하고, 대려 자인(大慮慈仁)을 정(定)이라 하고, 화합을 좋아하고 다투지 않음을 안(安)이라 하고, 올바른 것을 실천하여 뜻이 화(和)한 것을 장(壯)이라 하고, 의(義)로 말미암아 구제하는 것을 경(景)이라 하고, 자애롭고 화목하여 두루 복종하는 것을 순(順)이라 한다 하였다.

 

묘호(廟號)는 단종(端宗)이라 하니, 예(禮)를 지키고 의(義)를 잡음을 단(端)이라 한다. 능호(陵號)는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부인의 시호(諡號)를 ‘정순(定順)’이라 하니, 순행(純行)하여 어그러짐이 없음을 정(定)이라 하고, 이치에 화합하는 것을 순(順)이라 한다 하였다. 휘호(徽號)를 단량 제경(端良齊敬)이라 하니, 예를 지키고 의를 붙잡는 것을 단(端)이라 하고, 중심(中心)으로 일을 공경하는 것을 양(良)이라 하고, 마음을 잡아 능히 엄정할 수 있음을 제(齊)라 하고, 밤낮으로 공경하고 삼감을 경(敬)이라 한다 하였다. 능호(陵號)는 ‘사릉(思陵)’이라 하였다.

 

2017년 5월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여 상왕이 되고, 사육신의 복위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 청령원에 유배되었다가, 1457년 17세에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두었다. 사람들은 후환이 두려워서 시신을 거두지 못했고 시신은 그대로 강물에 떠다녔는데, 호장 엄흥도가 을지산 현 위치에 암장하였다. 이에 따라 장릉은 추존왕의 왕릉을 제외하고, 한양으로부터 100리 이내에 모셔야 한다는 《경국대전》의 규정을 따르지 않은 유일한 왕릉이 되었다.

 

그 후 59년이 지난 중종11년 여러 사람의 증언으로 묘를 찾아내 지키게 했으며, 12월 15일 처음으로 치제(致祭)가 이루어졌다. 치제를 맡은 것은 우승지 신상(申鏛)으로, 김안국과 함께 파견되어 단종의 묘에 제사를 지내고 돌아온 신상은 당시 노산군(단종)의 묘는 영월군에서 서쪽 5리쯤 떨어진 길 옆에 있었는데, 봉분 높이가 겨우 두 자밖에 되지 않았고 주변에는 민간의 여러 무덤들도 가득했지만 영월 사람들은 그 무덤을 군왕의 묘라 부르며 어린아이들까지 다 알고 있었다고 한다.

 

선조13년(1580년) 상석, 표석, 장명등, 망주석을 세웠으며,숙종24년(1698년) 단종(端宗)이라는 묘호가 올려지고 신위가 종묘에 모셔지면서, 영월에 있던 무덤도 장릉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능의 양식은 왕명에 따라 간단하게 조성되었다. 능앞에 혼유석, 장명등이 있으며, 망주석 2개, 문석 2기, 석양 1쌍.석마 1쌍.석호 1쌍이 있다. 다른 능과 달리 단종에게 충절을 한 여러 신하들을 장릉에 배향하기 위해 장릉 밑에 충신단을 설치하였다...다음에서 발췌

 

2017년 5월

보덕암. 단종 원찰이다.

 

아래 글은 단종비 정순왕후가 머물렀던 서울 정업원터 답사기(2013년)에서 발췌하였다.

 

정업원? 원래는 양반 출신의 여인들이 머물던 절이라고 한다.  단종이 영월에서 죽음을 당하자, 정순왕후가 정업원에 머물며 평생동안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 이곳 맞은편에는 동망봉 봉우리가 있는데 왕후가 단종을 더 잘 보기 위해 올랐던 바위라고 한다. 훗날 영조가 정순왕후가 이곳에 머물렀던 것을 알고 영조 47년(1771) 정업원 구기淨業院 舊基 비석을 세워 표시로 삼도록 했다고 한다.비석 뒷면에 ‘옛 터 신묘년(영조 47년) 9월 6일에 눈물을 머금고 쓰다(淨業院舊基辛卯九月六日飮涕書)’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전봉후암어천만년 前峰後巖於千萬年 앞산 뒷바위 영원하리라.

영조의 친필이라고 한다

 

 

정업원 터 옆에는 청룡사가 있었다.

정순왕후와 청룡사는 어떤 관련이 없을까?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뒤 왕권을 찬탈한 수양대군 세조에 의해 영월로 유배 갔다가 비참하게 죽은 단종의 애사는 역사의 뒤안에서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 준다. 그러나 처형되지는 않았어도 단종을 잃은 슬픔으로 이곳에서 외롭게 살다간 정순 왕후의 애달픈 사연도 또한 속인들의 마음을 저미게 한다.

 

단종과 정순 왕후의 비극은 왕위에서 물러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폐위되어 수강궁으로 나온 지 1년만에 단종복위 계획이 발각되고 사육신이 전부 처형당하면서 모의에 연루되었다 하여 노산군으로 강봉되고 강원도 영월 청량포로 귀양 가게 되었다. 이때 정순 왕후도 수강궁에서 청룡사에 오게 되었다. 귀양길에 오른 단종도 청룡사에 함께 들러 청룡사우화루에 잠시 머무르며 왕비와 최후의 작별을 하였고, 왕비는 다시 영리교까지 따라 나와 단종의 유배길을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단종과 정순왕후가 영원한 이별을 나눈 우화루를 영리정永離亭으로 불렀다고 한다.

 

정순 왕후는 단종과 이별하던 곳에서 단종을 기다리기로 작정하고 영월 쪽이 가장 잘 보이는 낙산 상봉의 이곳 청룡사로 올라가 머물게 된다. 왕후는 출가하여 허경虛鏡 법명을 받았으며 왕후와 함께 온 일행 5명도 전부 비구니가 되었다.왕후는 청룡사에 온 뒤 바깥세상과는 인연을 끊고 일념으로 기도하는 한편 절의 어려운 생활을 돕기 위해 댕기, 저고리, 깃, 고름, 끝동 등의 옷감에 자주물을 들여서 내다 팔았다. 자주물을 들일 때 바위 위에 널어 말리곤 하였으므로 그 바위를 "자주바위"라 하고, 바위 밑에 있는 우물을 "자주우물"이라 하며 또 그 마을이름을 "자주동"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한양의 아낙네들은 이를 팔아 주기 위해 일부러 자주끝동을 달아 입었다고 한다.

 

정순 왕후는 청룡사에서 수도 정진하는 한편 하루도 빠짐없이 날마다 청룡사 앞에 있는 산봉우리에 올라가 단종이 유배 간 동쪽을 바라다보았으므로 사람들은 이 봉우리를 동망봉東望峰이라고 불렀으며, 훗날 영조는 동망봉이라는 글을 써서  바위에 새기도록 했다고 하는데, 현재 바위에 새겼다는 글씨는 일제강정기에 비행장을 닦으면서 깨져 없어졌다고 한다.

 

왕후는 청룡사에서 65년간을 수도하다 82세의 나이로 열반에 들었다. 1698년(숙종 24)에 단종이 복위되면서 왕후도 함께 복위되었고 능도 사릉思陵이라 추상되었으며 신위도 종묘로 옮겨지게 되었다.  영조는 정순왕후가 지낸 청룡사 경내에 "정업원구기"라는 친필을 내려 비각을 세우게 하는 등 정순 왕후의 슬픔을 위로하기도 했다."...전통사찰관광정보

 

그나저나 보호각이 왜 저럴까?

 

2013.11.14

 

 

어제시御製詩...단종              

 

천추무한원千秋無限寃   천추에 끝없는 원한으로

만고일고혼萬古一孤魂   만고에 외로운 혼이 되었네.

적령황산리寂寧荒山裡   적막한 영월땅 거친 산속에

창송요구원蒼松繞舊園   푸른 솔은 옛동산을 감싸고 있네.

영수삼천로嶺樹三天老   고개 위 나무는 하늘에 우거졌고

계류득석훤溪流得石喧   냇물은 돌에 부딪쳐 시끄럽네.

산심다호표山深多虎豹   산이 깊어 호랑이 표범이 많으니

불석엄시문不夕掩柴門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아거네

 

2017.09.09

(단종에 관한 글은 블로그 강원도 영월편에 몇 편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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