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영월군

영월...보덕암 부도. 옥개석

임병기(선과) 2017. 5. 29.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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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보전 옆 부도가 보이지 않아 보살님께 문의했더니 그자리에 단종어각이 들어서고 부도는 어각 향우측 산자락에 모셨다고 알려주었다.

 

 

부도 뒤편 예전에 보지못했던 옥개석이 눈에 들어왔다.

 

 

낙수면 경사가 심하고

층급받침과 탑신괴임은 생략되었다.

 

추녀와 처마의 반전이 경쾌하다.

 

 

 

 

부도

방형탑신 상부에 사리공이 있다.

보주는 본디부재 여부인지 불분명하다.

 

 

화엄대강사를 가로로 새기고

세로에는 설허당대선사탑 당호를 새겼다.

 

뒷면의 가경이십오년경진사월일嘉慶二十五年庚辰四月日 명문으로 미루어 1820년 조성된 부도임을 알 수 있다.

 

 

 

당호를 새기지 않은 석종형부도

 

 

 

보덕암 답사시에 놓치지 않기를...

 

2017.05.21

 

아래는 2010년 글 입니다.

 

   

 

 

영월. 세번째 발걸음이다. 첫번째는 인지하지 못해 건너 뛰었고 두번째는 일정에 쫒겨 인연을 맺지 못해 늘 그리든 보덕사는 바로 옆 장릉에 모셔진 단종 임금의 원찰이다. 산지가람으로 생각했는데 호남지방 평야지대에 자리한 사찰처럼 평지 가람으로 일주문에 들어서면 가람배치가 한 눈에 다가온다.

 

신라 문무왕 8년(668)에 의상조사가 건립한 사찰로서 처음 지덕사 (旨德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된 뒤 고려 의종(毅宗) 15년(1161)에 운허 선사와 원경국사가 극락보전, 사성전, 염불당, 고법당, 침운루 등을 중축하였다 하며, 1457년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 유배되어 사찰명 을 노릉사(老陵寺)로 개칭하였다가 숙종 31년(1705) 한의선사와 천밀 선사가 대금당을 이루었고, 영조 2년(1726) 6월 태백산 보덕사로 개 명한 장릉의 능사이다. 장릉의 조포(왕릉 근처에 자리한 사찰로 제를 봉행할 때 제수를 준비하는 사찰로 특히 두부맛이 일품이어서 造泡로 알고 있다.)사찰로 예조에서 온 문관이 있었다고 한다. 

 

숙연함으로 걸음걸이 마져 조심스러운 경내에는 수령 500여년이 된 느티나무 가족이 먼저 반긴다. 사진의 나무는 가장 어르신으로 600살이 넘었다고 한다. 보덕사의 부침과 영욕 한국동란의 참상을 지켜보았을 산증인으로 이제는 회한도 용서와 화해로 승화시킨 노거수다.

 

 

절집 경내를 벗어나 치우쳐 자리한 해우소.  첫눈에 창고로 보았는데 선암사, 김용사에 버금가는 고종 19년(1882)에 세워진  2층 건물로  다소 투박하지만 견고한 느낌이다. 내부에는 앞뒤를 2줄로 양분하여 각각 6칸씩 배치하면서 전후면 벽을 따라 통로를 설치하여 12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산골 절집 해우소의 규모로 미루어 단종 추모제 등  행사면면이 짐작된다.

 

 

 

해우소...도월스님

 

험! 하고 힘을 한번 주니
내 욕망덩어리가 저 멀리 떨어지네
또 다시 험! 하고 힘을 주니
내 번뇌 망상이 저 멀리 떨어지네 
 

앉으면 다 보이는 해우소에

너도나도 번뇌 욕망을 버리기 위해서
노스님  행자  스님네들 할 것 없이
모두가  앉아서 힘쓰고 수행하네

 

어제 밤에 욕심부려  식탐을 부렸더니
많은 양의 욕망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고생하네
적당히 챙긴 이는 쉽게 버리고 일어나는데
그것 좀 욕심 냈다고 오랫동안 앉아서 후회하네

 

으나 젊으나 할 것 없이 먹고 버린 것들은
다시 거름으로 돌아가서 식물들에게 영양소가 되고
다시 우리 입으로 들어와서 육신을 행복하게 해주고 
시간이 되면 또다시 이 자리에서 버리는 이치가 
 

부처님이 말씀하신 연기법이 아닌지
혼자서 무안하니 망상에 젖어보네 

 

그래서 해우소라 했던가
내일은 좀더 빨리 일어나야지 생각하네

 

 

진입동선이 짧아 천왕문과금당 중정이 거의 맞불려 있는 배치다. 일주문에서 시작된 공간이 천왕문을 경계로 한 단 높여 극락보전 영역을 구획했다. 산지가람의 오밀조밀한 口자 구조에 익숙한 눈에는 중정이 넓어 산만한 느낌이다.

 

 

극락보전, 산신각, 뒷편으로 사성전, 칠성전 좌우로 요사와 선방이 배치되어 있다. 석탑은 금당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 이런 경우는 비보탑, 이건해 온 탑, 탑은 본디의 자리지만 금당이 비켜 앉은 경우이다. 또한 극락보전 앞에는 탑을 세우지 않는다는 일설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보덕사 5층석탑은 조선시대 탑으로 보이지만,  불기 2534(1991년)년으로 각자되어 있는데, 1991년경 원래 있던 탑이 도난되어, 새로 조성한 탑이라고 한다. 탑은 지대석 위에 백제계 양식의 기단 면석 처럼 길쭉하게 기단을 세우고 옥개석 모양의 복련을 새긴 갑석을 올렸다. 기단과 몸돌에는 양우주가 보이며, 옥개 받침은 3단, 상륜에는 노반과 복발, 보주를 두었다.

 

 

보덕사 극락보전은 고려 의종 15년인 1161년 운허 선사와 원경국사가 증축한 것이라고 전해지지만 현재 건물은 조선 후기 양식으로 근자에 복원한 듯 옛모습은 남아있지 않다. 3칸·옆면 3칸 규모로,  겹처마  다포계 팔작지붕이다. 앞면 가운데 칸은 5개의 빗살문, 양 옆칸에는 각각 3개의 빗살문을 달았다.

 

 

해강의 글씨라고 하는데 내가 잘못 보았나?

 

 

 어칸 빗살 창살 

 

 

측벽의 심우도. 화려한 다른 절집 벽화에 비해 소박하고 정감이 간다.

 

 

 걸쇠. 이렇게 마음속으로 다가오기는 처음이다.

 

 

 아미타 삼존불

 

 

맨좌측 방형부도. 윗면에는 사리공이 있다. 앞면에는 오른편에서 왼편으로「화엄대강사」, ‘대’자 밑으로는「설허당대선사탑, 뒷면에는「가경이십오년경진사월일」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중앙 석종형 부도에는 특별한 문양이 없다. 극락보전 옆에 위치한 부도. 사찰 밖으로 이건하면 어떨까?

 

 

다른 절집 전각처럼 단촐한 산신각 

 

 

산신각 우벽

 

 

 산신각 좌벽

 

 

산신을 모신 것은 차이가 없다.

 

 

하지만 여느 산신각과 달리 곤룡포를 입은 백마를 탄 단종이 모셔져 있다. 진본인지 모사본인지 모르지만 운보 김기창의 그림이다. 강원도 산골지방에는 성황당에 단종 임금을 태백산 산신으로 모시는 사례가 많다. 이러한 믿음은 단종임금을 추모하고 숭상하는 신앙으로까지 승화된 결과로  단조임금은 예로부터 민초들의 가슴에 뿌리박혀 있는 것 같다. 우리 민속에서는 이승에서 한을 품고 살해당한 사람들의 넋을 모시면 가족의 안위와 벽사 재복이 든다는 믿음 때문에 지방에 따라 최영장군, 임경업 장군을 성황당에 모시고 있다.

 

                             단종...자규시      

 

                      피눈물 흘러서 봄꽃은 붉다                                    血淚春谷落花紅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을 떠난 뒤로                           一自寃禽出帝宮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속을 헤맨다                 孤身隻影碧山中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假面夜夜眠無假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窮恨年年恨不窮

 

두견 소리 끊어진 새벽 멧부리에 지새는 달빛만 희고          聲斷曉岑殘月白

피를 뿌린 듯한 봄 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血流春谷落花紅

 

하늘은 귀머거린가? 애달픈 하소연 어이 듣지 못하는지?     天聾尙未聞哀訴

어찌하여 슬픔 많은 이 사람의 귀만 홀로 밝은고...              何奈愁人耳獨聽

 

그림은 단종과 추익한의 이야기로 묘사한 내용으로 추익한과 더불어 단종의 시신을 우습한 엄흥도, 정사종의 글을 다음에서 검색했다.

 

한성부윤을 지낸 추익한은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어 외로운 나날을 보낼 때, 산머루를 따다 드리고 자주 문안을 드렸다한다. 세조가 금부도사 왕방연을 시켜 관풍헌에서 사약을 내리던 그날도 추익한은 산머루를 따가지고 단종임금에게 바치려고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연하리 계사폭포에서 단종을 만났다. 추익한이 단종에게 어디로 가시느냐고 묻자 곤룡포에 익선관으로 정장을 하고 백마를 탄 단종은 태백산으로 간다하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이상하게 여긴 추익한이 급히 단종의 처소로 와보니 이미 변을 당한 뒤였다. 추익한은 단종과 만났던 계사폭포에 와서 단종을 따라 죽었고, 그리하여 추충신은 단종임금과 함께 태백산의 신령이 되었다고 한다.

 

엄흥도 영정...영월 문화원

 

조선 제6대 단종대왕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을 때 충의공은 이 고장 호장직(戶長職)에 있었다.밤낮으로 대왕의 거소(居所) 청령포를 바라보고 대왕이 무사하기를 기원하던 중 어느날 달 밝은 고요한 밤에 청령포 대왕의 거소에서 슬프고 애끊는 비명의 곡성이 들려오므로 황급히 강을 건너가 진배하니 대왕은 울음을 멈추고 “이 심야엔 웬 사람이 나를 찾는가?” 하고 물으니, “소신은 이 고장 영월호장 엄흥도이옵니다”라고 대답하고 옥안을 바라보니 대왕은 “육지고도(陸地孤島)인 이곳 청령포에 유배된 이후 밤마다 꿈속에서 신하들을 보고 추억을 회상하며 탄식하고 지내던 중 비조불입인 이곳에서 너를 보니 육신을 상봉한 것 같구나. 그대는 실로 초야에 묻힌 선인이로구나!”하고 반갑게 맞이 하였다.

그후 호장 엄홍도는 매일 밤 풍우를 가리지 않고 문안을 드렸으며 그해 여름 큰 장마로 인하여 대왕은 청령포 어소에서 영월읍 영흥리 관풍헌에 침소를 옮기게 되어 밤마다 객사 동편에 있는 자규루(子規樓)에 올라 자규시르 읊으면서 지내던 중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가지고 온 사약을 받고 승하하니, 그 옥체는 동강물에 던져지고 시녀는 동강절벽(후일에 낙화암이라고 함)에서 투신절사(投身節死)하였는데 이 때가 매우 추운 겨울이었다.)

호장 엄흥도는 군수에게 성장(聖裝)을 청하였으나 세조를 두려워하므로 성사치 못하자 즉시 서강과 동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달려가 그곳에서 대기하였다 옥체를 인양하여 미리 준비한 관에 봉안하고 가족들과 같이 운구하여 영월군 서북쪽 동을지산(冬乙支山)에 암장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호장 엄흥도의 충성은 인정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늘이 내렸다하여 후세인들이 그를 항상 추모하였다.

1759년 (영조 34년) 그 벼슬을 공조판서로 추봉하여 사육신 정렬에 배향하고 육신사(六臣祠)에 봉안·치제케 했다. 그후 1516년 (중종 11년)에 어명으로 노산묘를 찾아 수축하고 능전사청을 후인 1791년 (정조 15년)에 어명으로 노산료를 찾아 수축하고 능전사청을 건립 1791년 (정조 15년)에 어명으로 장릉배식단(莊陵配食壇 )에 배합향배(配合享배)케 하고 정려치제(旌閭致祭)케 하였으며, 1833년(순조 33년) 공조판서에 추증되고 고종 13년(1876)에 충의공 시호를 내렸다. 지금의 묘소는 영월읍 팔괴리 창평산 186번지에 있다.

 

정사종 영정...영월 문화원

 

정사종은 봉선대부 전의감 부정 정극실(丁克實)의 아들이다. 정사종은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자 단종을 모시기 위해 영월로 내려와정거실(丁居實)이라 이름을 고치고 운둔생활을 하였다. 군위현감이던 정사종은 1455년(세조 원년)에 참판 박팽년(朴澎年)과 더불어 단종 복위운동을 하다가 복위모의가 발각되어 박팽년이 해를 입자 벼슬을 버리고 영월에 와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단종이 마침내 승하하니 그는 울분을 참지 못하여 스스로 죽으려 하자. 그 아들이 울면서 “임금을 위하여 진충(盡忠)하심은 당연한 길이오나 반드시 임금을 감장(勘葬)할 사람이 없을것이니 단종을 염장한 후에 세상을 떠나시더라도 기회는 있을 것이옵니다”라고하였다. 이때 그는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네 말이 옳다”라고 대답하면서 결심을 변경하였는데, 이때 세조는 “단종의 시체를 감장하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라고 명을 내렸기로 황망한 가운데 엄흥도와 더불어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낸후 그 아들에게 이르기를 ‘여귀전생 이 자손 위초목 불구공명(余歸田生 以子孫 爲樵牧 不求功名)’ (너는 농촌으로 돌아갈 것이며 이후 자손들은 나무나 하고 소 기르며 공명을 구하지 말라)고 유언을 한 뒤에 청령포에 나가 물에 빠져 죽었다.

 

동학지에는 또 “단종이 승하 하실 때 이조참의 덕식도정(德息覩正) 이종(李種)이 엄호장과 같이 단종을 염습하여 장사 지낸후 밀양으로 같다”고 하였으나, 이조참의 이종이 그때 어떻게 영월에 왔었는지 또 그후에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하여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영월 팔경의 하나인 보덕사 범종 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금부도사 왕방연의 싯귀가 경내에 나직히 들리는 듯하여  내내 숙연함으로 둘러 본 순례길이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2010.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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