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영월군

영월...장릉

임병기(선과) 2017. 5. 30.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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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적통이면서도 가장 비운의 삶을 산 왕이었다.

 

"1441(세종 23)∼1457(세조 3). 조선 제6대 왕.

재위 1452년(단종 즉위년)∼1455년(단종 3).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홍위(李弘暐). 아버지는 문종이며, 어머니는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權氏)이다. 비는 여산부원군(礪山府元君)송현수(宋玹壽)의 딸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宋氏)이다.1448년(세종 30) 8세 때 의정부의 청으로 왕세손에 책봉되고, 1450년문종이 즉위하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왕세자 책봉이 있던 해, 문종은 왕세자를 위해 처음으로 서연을 열고 사(師)·빈(賓)들과 상견례를 하였다. 이때 문종은 좌빈객 이개(李塏)와 우사경 유성원(柳誠源)에게 왕세자의 지도를 간곡히 부탁하였다. 1452년 5월문종이 재위 2년 만에 경복궁천추전(千秋殿)에서 죽자 그 뒤를 이어 근정전(勤政殿)에서 즉위하였다.

즉위에 즈음해 나이가 어려 정치하는 일에 어두우니 모든 조처는 의정부와 육조가 서로 의논하여 시행할 것과, 승정원은 왕명 출납을 맡고 있으므로 신하들의 사사로운 일은 보고하지 말도록 교서를 내렸다.

 

문종의 고명을 받은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이 측근에서 보좌하였다. 또한 집현전 학사 출신인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신숙주(申叔舟)·이개·유성원 등은 지난날 집현전에서 세종으로부터 보호를 부탁받았으므로 측근에서 협찬하였다.이 해 윤9월 『논어(論語)』를 강론할 때, 왕이 ‘사무사(思無邪)’라는 문구의 뜻을 물었다. 이에 박팽년은 “생각에 간사함이 없고 마음이 바름을 이른 것이며, 마음이 바르게 되면 일마다 바르게 되는 것”이라 대답하였다. 10월 박팽년을 집현전부제학으로 삼았는데, 학문이 정밀, 심오해 경연에서 강의할 때마다 깨달은 바가 많았으므로, 특별히 통정대부에 가자시켜 임명했던 것이다.

 

이 해 고려의 개국공신 배현경(裵玄慶)·홍유(洪儒)·복지겸(卜智謙)·신숭겸(申崇謙)과 유금필(庾黔弼)·서희(徐熙)·강감찬(姜邯贊)·윤관(尹瓘)·김부식(金富軾)·조충(趙沖)·김취려(金就礪)·김방경(金方慶)·안우(安祐)·김득배(金得培)·이방실(李芳實)·정몽주(鄭夢周) 등을 왕씨(王氏) 묘정(廟庭)에 종사(從祀)하도록 하였다. 1453년(단종 1) 4월 경회루에 나가서 유생들을 친히 시험 보이고, 또 모화관에 가서 무과를 베풀었는데 권언(權躽) 등 40명이 뽑혔다. 온성과 함흥 두 고을에 성을 쌓고, 나난(羅暖)·무산(茂山)의 두 성보(城堡)를 설치하였다. 악학제조 박연(朴堧)이 세종의 『어제악보(御製樂譜)』를 인쇄, 반포하기를 청하자, 허락하였다. 왕이 대신 황보인·김종서·정분(鄭苯) 등에게 자문해 박중림(朴仲林)을 대사헌에 임명하였다.

 

한편, 양성지(梁誠之)에게 『조선도도(朝鮮都圖)』·『팔도각도(八道各圖)』를 편찬하게 하였다. 1454년 정월에 송현수(宋玹壽)의 딸을 맞이 해 왕비로 삼았다. 이 달에 집현전직제학 양성지가 『황극치평도(皇極治平圖)』를 찬진하고, 3월 춘추관에서 『세종실록(世宗實錄)』을 찬진하였다. 그 해 5월 좌승지 박팽년이 경연에서 왕에게 안일과 태만을 경계하도록 진언하였다. 왕이 대궐 안에서 자주 활쏘기를 구경하면서 경연을 여러 차례 정지시켰기 때문이었다.8월에는 각 도의 관찰사에게 유시해 효자(孝子)·순손(順孫)·의부(義夫)·절부(節婦)와 공평, 청렴하고 현저히 공적이 있는 수령을 상세히 기록해 알리도록 했는데, 이는 그들을 발탁, 등용하여 권장하기 위해서였다.보루각(報漏閣)을 수리하고 『고려사(高麗史)』를 인쇄, 반포하였다. 12월 각 도 관찰사에게 유시해, 둔전(屯田) 설치 계획을 수립해 알리도록 하였다.

 

1453년 10월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정권을 빼앗고자 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 등 측근들의 계책에 따라 좌의정 김종서를 그의 집에서 죽이고, 영의정 황보인, 병조판서 조극관(趙克寬), 이조판서 민신(閔伸), 우찬성 이양(李穰) 등을 대궐로 불러와서 죽였다. 그들의 죄명은 숙부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추대해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다.

 

일의 시비를 가리기도 전에 정권은 수양대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요구에 따라 수양대군을 영의정으로 삼아 군국의 중대한 일을 모두 위임시켜 처리하게 하였다. 또, 당시 거사에 참가한 사람들을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인정하여 모두 공신 칭호를 주기까지 하였다.그리고 그들이 지칭한 난리의 장본인인 안평대군과 그 아들 이우직(李友直)을 조신들의 주청에 따라 강화교동현(喬桐縣)에 이치(移置)했다가 안평대군은 사사되고 이우직은 진도로 옮겨 안치되었다. 이 일련의 조처는 집권자인 수양대군의 주변 인물들에 의해 결정된 것으로서 왕의 의사는 무시되었다.

 

이 해 하위지를 좌사간, 성삼문을 우사간, 이개를 집의, 유응부를 평안도도절제사로 각각 임명하였다. 실권을 잡게 된 수양대군은 지방에도 자기 세력을 심기 위해 지방관을 교체시키던 중, 이징옥(李澄玉)의 난을 겪기도 하였다.1455년 윤6월 수양대군이 조정의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여 왕의 측근인 금성대군(錦城大君) 이하 여러 종친·궁인 및 신하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각 지방에 유배시키기를 요구하자, 하는 수 없이 그대로 따랐다.이러한 주변 정세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단종은 마침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어 수강궁(壽康宮)으로 옮겨 살았다.

 

1456년(세조 2) 6월 상왕을 복위시키려는 사건이 일어났다. 복위 사건의 주동 인물은 지난날 집현전학사 출신인 몇몇 문신과 성승(成勝)과 유응부(兪應孚) 등 무신들이었다.이들은 세종과 문종에게 특별한 은혜를 입었으며, 또 원손(元孫: 단종)을 보호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은 인물들이었다. 때문에 어린 상왕을 복위시키는 것이야말로, 곧 국가에 대한 충성이며 선비의 의무라 생각하였다.

이들은 명나라 사신을 창덕궁에 초대해 연회하는 날, 그 자리에서 세조를 죽이고 측근 세력도 제거한 뒤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계획이 실행되기도 전에 동모자인 김질(金礩)의 고발로 결국 실패하고, 이 사건의 주동 인물 중 많은 사람이 사형을 받게 되었다.

 

단종은 이 사건이 있은 뒤 더욱 불안을 느끼고 있었는데, 조신 가운데 상왕도 이 사건에 관련되었으므로 서울에서 내쫓자는 주청이 있었다.이에 1457년 6월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영월에 유배되었다. 영월에서 유폐 생활을 하는 동안, 매일같이 관풍매죽루(觀風梅竹樓)에 올라 시를 지어 울적한 회포를 달래기도 하였다.

 

이 해 9월 경상도순흥에 유배되었던 노산군의 숙부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다시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었다. 이에 다시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강봉되었다가 10월 마침내 죽음을 당하였다.1681년(숙종 7)에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1698년 전 현감 신규(申奎)의 상소에 의해 복위가 결정되었다. 시호를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으로, 묘호를 단종으로 추증하고, 능호(陵號)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장릉莊陵.

 

숙종실록 32권, 숙종 24년 11월 6일 정축 2번째기사 1698년 청 강희(康熙) 37년

노산군의 시호를 추상하다


대신(大臣)·육경(六卿)·의정부의 서벽(西壁)과 관각(館閣)의 당상(堂上)들을 빈청(賓廳)에 모이라 명하였다. 노산 대군(魯山大君)의 시호(諡號)를 추상(追上)하여 ‘순정 안장 경순 대왕(純定安莊景順大王)’이라 하였는데, 중정 정수(中正精粹)함을 순(純)이라 하고, 대려 자인(大慮慈仁)을 정(定)이라 하고, 화합을 좋아하고 다투지 않음을 안(安)이라 하고, 올바른 것을 실천하여 뜻이 화(和)한 것을 장(壯)이라 하고, 의(義)로 말미암아 구제하는 것을 경(景)이라 하고, 자애롭고 화목하여 두루 복종하는 것을 순(順)이라 한다 하였다.

 

묘호(廟號)는 단종(端宗)이라 하니, 예(禮)를 지키고 의(義)를 잡음을 단(端)이라 한다. 능호(陵號)는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부인의 시호(諡號)를 ‘정순(定順)’이라 하니, 순행(純行)하여 어그러짐이 없음을 정(定)이라 하고, 이치에 화합하는 것을 순(順)이라 한다 하였다. 휘호(徽號)를 단량 제경(端良齊敬)이라 하니, 예를 지키고 의를 붙잡는 것을 단(端)이라 하고, 중심(中心)으로 일을 공경하는 것을 양(良)이라 하고, 마음을 잡아 능히 엄정할 수 있음을 제(齊)라 하고, 밤낮으로 공경하고 삼감을 경(敬)이라 한다 하였다. 능호(陵號)는 ‘사릉(思陵)’이라 하였다.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여 상왕이 되고, 사육신의 복위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 청령원에 유배되었다가, 1457년 17세에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두었다. 사람들은 후환이 두려워서 시신을 거두지 못했고 시신은 그대로 강물에 떠다녔는데, 호장 엄흥도가 을지산 현 위치에 암장하였다. 이에 따라 장릉은 추존왕의 왕릉을 제외하고, 한양으로부터 100리 이내에 모셔야 한다는 《경국대전》의 규정을 따르지 않은 유일한 왕릉이 되었다.

 

그 후 59년이 지난 중종11년 여러 사람의 증언으로 묘를 찾아내 지키게 했으며, 12월 15일 처음으로 치제(致祭)가 이루어졌다. 치제를 맡은 것은 우승지 신상(申鏛)으로, 김안국과 함께 파견되어 단종의 묘에 제사를 지내고 돌아온 신상은 당시 노산군(단종)의 묘는 영월군에서 서쪽 5리쯤 떨어진 길 옆에 있었는데, 봉분 높이가 겨우 두 자밖에 되지 않았고 주변에는 민간의 여러 무덤들도 가득했지만 영월 사람들은 그 무덤을 군왕의 묘라 부르며 어린아이들까지 다 알고 있었다고 한다.

 

선조13년(1580년) 상석, 표석, 장명등, 망주석을 세웠으며,숙종24년(1698년) 단종(端宗)이라는 묘호가 올려지고 신위가 종묘에 모셔지면서, 영월에 있던 무덤도 장릉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능의 양식은 왕명에 따라 간단하게 조성되었다. 능앞에 혼유석, 장명등이 있으며, 망주석 2개, 문석 2기, 석양 1쌍.석마 1쌍.석호 1쌍이 있다. 다른 능과 달리 단종에게 충절을 한 여러 신하들을 장릉에 배향하기 위해 장릉 밑에 충신단을 설치하였다...다음에서 발췌

 

 

 

정자각을 비롯한 장릉 부속 건물

 

 

낙촌비각

단종묘를 찾아낸 박충원 비각

 

 

박충원 1507(중종 2)∼1581(선조 14).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중초(仲初), 호는 낙촌(駱村)·정관재(靜觀齋). 조(藻)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행주기씨(幸州奇氏)로 찬(欑)의 딸이다. 1528년(중종 23)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1년에 승문원에 올라 홍문관에 참예하였다. 다음해사국(史局)에 돌아가 검열(檢閱)이 되었고, 이어 설서·승정원에 전직되었다. 그 뒤 독서하라는 명으로 당후(堂後)에서 대기하다가 장악직장(掌樂直長)이 되었다.

 

1534년에 예문관봉교가 되었다가 전적(典籍)이 되고, 이어 정언이 되었다. 다음해이조정랑·사간원정언·이조좌랑·헌납·홍문관부교리가 되었다. 1537년에 병조정랑으로 있다가 이조정랑으로 옮기었다.조부상을 당해 3년 뒤 다시 승문원교검에 보직되었다가 영월군수로 발령되었다. 이때 이 군에 3태수가 죽어나가 요담(妖談)이 흉흉해 모든 사람이 이곳에 부임하기를 꺼렸으나, 박충원이 초연하게 행동해 기괴한 소문이 사라졌다.

 

1545년 인종이 중국사신 영접사로 부름을 받아 나가기도 하였다. 그 후 직강(直講)이 되었고, 이어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사성·성천부사를 거쳐 중시에 발탁되어 예빈시정(禮賓寺正)에 올랐고, 통례원우통례 겸 교서관판교가 되었다.1552년(명종 7) 좨주(祭酒)로 있다가 해서(海西)를 안무(按撫)하였다. 1554년 성절사로 중국에 다녀온 뒤 형조참의가 되었고 1556년 세번째 승정원에 들어갔다. 1558년 한성우윤·병조좌랑을 거쳐 밀원군 겸 홍문관제학(密原君兼弘文館提學)에 제수되었다. 이어 예조판서·사헌부로서 호남·호서를 안무하였다. 1564년 명종이 ‘大提學兵曹判書朴忠元(대제학병조판서박충원)’이란 10자를 친필로 하사하였다.

 

1567년(선조 1)대종백(大宗伯)으로 전직되었을 때, 중국에 국사를 검토하는 일로 빈상(儐相)의 명을 받아 기대승(奇大升)·이후백(李後白)·이산해(李山海)가 종사관이 되어 중국에 다녀왔다. 그 뒤 여러 중직을 거쳐 정승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며, 저서로 『낙촌유고』가 있다.

 

 

엄흥도 정려비각

엄흥도 생몰년 미상

본관은 영월(寧越). 영월의 호장으로, 단종이 세조에 의하여 상왕(上王)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안치되었다가 시해되자,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고 시신을 수습하였다. 단종이 승하한 이튿날 옥가(獄街)를 오가며 통곡하고, 관을 마련하여 아전과 백성들을 모아 영월의 북쪽 5리쯤 되는 동을지(冬乙旨)에 장사지냈다.

 

1585년(선조 18)에 종손인 정병(正兵) 엄한례(嚴漢禮)에게 호역(戶役)을 면제하고 노산군의 묘역을 수호(守護)하게 하였고, 현종 때 송시열(宋時烈)의 주청으로 자손을 등용하게 하였다. 숙종 때 공조참의에 증직(贈職)되었고, 영조 때 정문(旌門)을 내렸다. 뒤에 공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사육신과 함께 영월의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단종비각

 

 

장판옥藏版屋

장릉 장판옥(莊陵 藏版屋)은 1791년(정조 15)에 건립한 건물로 단종을 위하여 목슴을 바친 충신위(忠臣位) 32인, 조사위(朝士位) 186인, 환관군노위(宦官軍奴位) 44인, 여인위(女人位) 6인 등 268인의 합동 위패를 모셔 놓았다.

 

 

배식단

1791년(정조 15) 장릉(莊陵)에 충절을 바친 신하들을 기리기 위해 설치한 제단


배식단은 장릉(莊陵)의 정단과 별단에 배식한 268위의 제단이다. 단종이 복위된 이후, 1791년(정조 15)에 처음으로 정위 32인과 별단의 제위 198인을 지정하였다. 이 배식자 숫자는 그 후 순조 연간 이래 추가되어 268위로 증가하였다. 제사의 시일은 한식 때이며, 그 축문은 정조가 직접 지었다. 제단은 정단과 별단을 구분하였으며, 별단은 공로의 다소와 신분에 따라 셋으로 나누었다.

 

 

영천靈泉

장릉에서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우물
이 우물은 정조 15년인 1791년에 군수였던 박기정이 조정에 보고하여 장릉 제정(祭井)으로 칭하게 되었다.제정은 제사를 지낼 때 물로 사용하기 위한 우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보통 때는 조금씩 샘이 솟았으나 매년 한식 때 제사를 지낼 때 쯤이면 물이 많이 용출하였다.
우물의 구조는 사방이 돌담으로 둘러있고 우물의 깊이는 1.5미터 정도이고 화강석으로 정방형 모양으로 쌓아 올려져 있다.

 

 

홍살문.참도

다른 능과 달리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참도가 ‘ㄱ'자로 꺾여 있다

 

 

정자각丁字閣

능에서 제사지낼 때 사용하는 중심 건물로 그 모양이 ‘丁’자와 같아 ‘정자각(丁字閣)’이라고 불렀다. 정자각은 봉분 아래에 있으며, 정자각 앞으로는 박석을 깐 삼도(三途)가 있고 삼도 맨 앞에는 홍살문이 놓인다. 정자각 좌우로는 수라간과 수복방이 대칭으로 놓여 정자각 제례에 필요한 간단한 준비를 할 수 있다. 물론 본격적인 준비는 홍살문 밖에 있는 재실에서 이루어진다. 조선왕릉 정자각의 연원은 고려시대에서 찾을 수 있으나 그 이전의 정자각 형태는 아직 밝혀진 바 없다.

 

 

망료위望燎位?

 

 

수복실守僕室

능의 건물이나 재산 등을 지키기 위한 능지기의 거주공간이다.

 

 

수라간

음식을 준비하는 곳

 

 

단종 유배길

청령포.관풍헌.자규루.보덕사를 거쳐야만 장릉답사의 화룡점정이겠지만

주말에는 언감생심 기대난망이리라.


2017.05.21

 

아래는

2002년.2016년 다녀온 글과 사진이다.

 

 

2002년 7월 두번 째 영월 답사길에 관풍헌과 자규루에 관한 글이 남아 있다.

오류도 보이지만 그대로 옮겨온다,

그즈음에는 사진은 전혀 찍지 않았었고...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가 누웠는가
홍안을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 잡아 권할 이 없어니 그를 슬프하노라

소나기 재를 넘어며 예의 황진이 무덤가에서 읊었다는 조선제일의 풍류가 임백호의 시조가 떠오른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병들게 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고개를 넘을 때마다 나도 몰래 임제의 시조를 습관처럼 흥얼거린지가 꽤 오래 되었어니...

이게 아니지 17세에 삼촌으로부터 약사발을 받고 한 많은 생을 마감한 단종에게 사약을 가져온 금부도사 왕방연의 시조가 어울릴 텐데... 서강이 말없이 흘러가는 소나기재 정상 선돌을 내려보며 10수년 전에  다녀온 저 아래 청령포를 되새기며 기억을 더듬는다

천만리 머나 먼길 고운 님 여의옵고
내마음 둘대 없어 냇가에 앉았어니
저물도 내맘 같아 울어 밤길 예놋타(?)

이번 답사길 왕능이 보고 접어 정확히 단종의 장능과 세종의 영능을 비교해 보고픈 맘이었기에 가야고분군이 위치 함직한 야트막한 야산에 자리잡은 솔내음 풍기는 산길을 오른다. 목숨을 걸고 밤길 시신을 수습한 무장 영월 엄씨의 시조 엄흥도가 암장하고 후에 영월 사또 박충원이 단장하였다는 장능은 아쉽지만 왕능의 일반적 유형에서 크게 벗어 나지는 않았다

규모가 적고 곡장이 얕고, 세조에 대한 한 때문인지 무인석이 생략 되었지만 능 지킴이 사자상, 정의를 의미하는 양, 혼이 놀고 가는 혼유석 장명등이 갖추어져 있다. 다른 능과 달리 엄흥도, 박충원, 문종에게 단종을 보필하겠다고 맹세한 탓에 끝내 죽음을 당한 사육신, 생육신, 단종복위에 연루된 금성군을 비롯한 많은 인물의 제각이 있고 홍살문 정자각이 일직선 상에 있지 않다. 어찌된 연유인지 신도(神道)는 보이지 않고 정자각 마루에는 용두만 외롭게 앉아 있다.

운 좋게 재를 오리는 제례복을 입은 일단의 사람들을 만나 흔치 않는 볼거리를 보는 구나 내심으로 쾌재를 불렀건만 대학생 들이 역사의 현장을 찿아 퀴즈 풀이를 하는 KBS TV 촬영 중이란다.
제기럴 내 복에 무슨....

망자의 넋을 달래기 위한 장능의 원당 사찰인 보덕사는 들리지 않고 예전에 들리지 못했던 그 시절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세파에 몸을 내놓고 있는 관풍헌과, 영원히 자규의 울음 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 같은 자규루를 돌아보고 관풍헌 앞에서 무엇에 홀린 듯한 착각에 고개를 갸웃갸웃 거렸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건축의 정형이야 있어랴 마는 관풍헌은 3동의 건물이 나란히 일직선상에 있고 놀랍게도 가운데 동은 약사여래불이 모셔진 약사전이다. 보덕사의 포교당으로 활용중이라지만 왕능의 원당사찰에는 극락전 아미타불을 모셔야 옳지 않은가?

또 소설 한편.....
우리 민속 특히 무속에서는 신을 모신다. 당 신앙에도 그러하지만 세상에서 한을 품고 죽은 사람들이 약발이 잘 받기에, 기자 신앙의 효험은 최영장군의 혼이 최고이고, 임경업 장군 등이 무속에서는 추앙(?) 받는 귀신 들 이기에 강원도 지방을 중심으로 단종을 신각에 모신 곳도 많다는 것과 연결 해보면 중생의 소원을 들어주는 약사여래불이 모셔진 것도 크게 궤에서 멀어진 것은 아니군. "

소설 한편 탈고 ㅋㅋㅋ...

여주의 세종대왕의 영능은 천하의 길지이고 영능 탓에 조선조가 200년은 더 존속 되었다는 속설도 있지만 이곳은 본래 경기도 광주 이씨의 묘자리 였다. 오늘날 이수성 전 총리의 관향이지 아마... .
기생과 묘 자리는 먼저 차지 한 놈이 임자 건만.....?????

규모면에서 장능과 비교 할 수 없지만 홍살문에서 능까지 일직선 상에 있고 신도(神道)가  홍살문 부터 정자각 까지 놓여 있다 신도란 신이 다니는 길인데도 참배객 들은 아무른 의식도 없이 신도를 걸어 가고 있다. 왕도 다닐 수 없는 참도이거늘...
능 참배 시에는 가운데 높은 길을 걷지 말고 우측의 낮은 길로 참배하여 나올 때는 좌측 낮은 길로 나오는 것이 예의인 줄 누구하나 설명해 주지 않아 안타깝다.

일반 민가에서는 무덤 앞에 상석이 있어 제물을 놓지만 왕능 앞의 상석을 혼이 머무는 “혼유석”이라 하며 제물은 정자각(丁字閣)에 놓고 예를 받들지만 온통 마루에는 잡상으로 도배질 되어 있고 건물에 대한 설명 즉 丁자 모양의 건물이라 정자각이라 한다는 안내문이 나를 열 받게 한다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 아닌가?
아픈 역사라도 한 맺힌 과거라도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 들에게 올바른 전달이 되면 좋을텐데...

정자각???
중국놈들 자기들 왕은 황제이기에 조선의 임금은 왕이라 강요했고 능 앞의 전각도 지놈 들은 태양이라 여겨 日字閣이라 하면서 속국인 조선이 어디 감히 황제를 흉내 내야며 중국황실에서 丁자 좌향에 위치한다고 정자각을 지어라 하지 않았든가!!!
대한제국 고종은 중국의 속국에서 벗어났기에 황제라 하고 능 앞에도 정자각은 사라지고 일자각을 회복했지... 외세의 영향이든 말든!!!!

성군이라 불리워 지는 세종도 살아 생전에 맘 고생 무지무지 많았든 왕이 아니었든가
재위 32(?)년 동안 10년 이상 상복을 입어야 했고 외삼촌, 장인이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해 태종에 의해서 죽음을 당한 것을 보아야 했고 평생을 병으로 고생하시면서도 과도한 영양 섭취, 운동부족, 문란한 성생활로 단명한 다른 왕에 비하면 54세에 승하 하셨어니 장수한 왕이지만 이생에서 한도 많았겠지.

그래서인지 신륵사는 명복을 비는 원당 사찰의 면모를 갖추어 극락전이 주전이다.
당연히 명부전이 있고....

짧은 기간이지만 세종, 단종, 상원사의 세조의 자취까지 더듬은 많은 것을 생각케 하는 하룻밤 이틀 낮의 여정 이었다.

나의 기억에 의존한 답사기여서 역사적 사실에 오류가 있다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2002.7월말

 

 

관풍헌觀風軒

조선시대 관아 건물로 1392년 지어졌다고 한다.

현재는 보덕사 포교당으로 활용되어 중앙에 약사전. 좌측에 객사였던 관풍헌, 우측 부속건물 이 남아 있다.

세조 2년(1456) 6월 28일, 단종이 청령포에 유배되었다가 홍수 때문에 이곳으로 옮겨와 머물던 중, 세조의 명으로 금부도사 왕방연이 가지고 온 사약을 먹고 1457년 10월 24일 사사된 곳이라 전한다.

 

 

 

넓은 아량일까?

사찰 전각이 중앙에 배치되어 관아건물을 부속채로 두고 있다.

 

 

 

약사전에 걸린 벽화. 그림은 운보 김기창화백 작품 같다.

예전 보덕사 답사기에 올렸던 글을 가져 왔다.

 

그림은 단종과 추익한의 이야기로 묘사한 내용으로 추익한과 더불어 단종의 시신을 우습한 엄흥도, 정사종의 글을 다음에서 검색했다.

 

한성부윤을 지낸 추익한은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어 외로운 나날을 보낼 때, 산머루를 따다 드리고 자주 문안을 드렸다한다. 세조가 금부도사 왕방연을 시켜 관풍헌에서 사약을 내리던 그날도 추익한은 산머루를 따가지고 단종임금에게 바치려고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연하리 계사폭포에서 단종을 만났다. 추익한이 단종에게 어디로 가시느냐고 묻자 곤룡포에 익선관으로 정장을 하고 백마를 탄 단종은 태백산으로 간다하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이상하게 여긴 추익한이 급히 단종의 처소로 와보니 이미 변을 당한 뒤였다. 추익한은 단종과 만났던 계사폭포에 와서 단종을 따라 죽었고, 그리하여 추충신은 단종임금과 함께 태백산의 신령이 되었다고 한다.

 

 

 

 

자규루子規樓.
영월군수 신숙근이 세종 10년(1428)에 창건하여 매죽루라고 하였으나, 후에 단종이 이곳에 거처하면서 누각에 올라 자신의 고뇌를 ‘자규사’ 및 ‘자규시’로 읊은 것이 계기가 되어 이름이 자규루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 후 선조 38년(1605)의 대홍수로 폐허가 되었는데, 강원도관찰사 윤사국(1728-1809)이 정조 15년(1791)에 영월을 순찰할 때 옛 터를 찾아 중건하고 단종의 시를 봉안하였다.

 

 

            단종...자규시      

 

            피눈물 흘러서 봄꽃은 붉다                                    血淚春谷落花紅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을 떠난 뒤로                           一自寃禽出帝宮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속을 헤맨다                 孤身隻影碧山中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假面夜夜眠無假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窮恨年年恨不窮

 

두견 소리 끊어진 새벽 멧부리에 지새는 달빛만 희고          聲斷曉岑殘月白

피를 뿌린 듯한 봄 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血流春谷落花紅

 

하늘은 귀머거린가? 애달픈 하소연 어이 듣지 못하는지?     天聾尙未聞哀訴

어찌하여 슬픔 많은 이 사람의 귀만 홀로 밝은고...              何奈愁人耳獨聽

 

 

2016.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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