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창녕군

창녕...손수산 묘역, 석조부재

임병기(선과) 2017. 9. 17.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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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우포님이 손수산묘역에 있는 탑재 사진을 올렸던 것이 떠올라 부탁하여 답사하였다.

 

 

손수산 묘

고암면 억만미산로 198-38

 

손수산선생과 부인 현풍곽씨 묘가 나란히 있다.

 

 

예전에 조성하였던 비석과 후에 세운 비석이 나란히 묘지앞을 지키고 있다.

 

 

훈련원첨정 손공지묘 訓練院僉正 孫公之墓

배 숙인현풍곽씨 부좌 配淑人玄風郭氏祔左

 

 

손수산孫壽山

다음에서 검색하면 단 몇 줄만 보인다.포탈사이트에서는 그의 생몰년대를 찾지 못했다.

시조(始祖) 손순(孫順)의 24세손으로 약 500년전에 경남(慶南) 진주(晋州)에서 창녕(昌寧) 고암면(高岩面) 만촌 상태로 이거(移居)하여 후손들은 세거(世居)하고 있다.
묘소(墓所) 고암면 만촌 안산(案山) ...창녕문화원/창녕 토착성씨 고 考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는 한글 창제와 관련하여 이름을 올리고 있다..

통역사였나?

 

차례로 옮겨 왔다.

-세종실록 107권, 세종 27년 1월 7일 신사 5번째기사 1445년 명 정통(正統) 10년

집현전 부수찬(副修撰) 신숙주(申叔舟)와 성균관 주부(注簿) 성삼문(成三問)과 행 사용(行司勇) 손수산(孫壽山)요동에 보내서 운서(韻書)를 질문하여 오게 하였다

 

-세종실록 126권, 세종 31년 12월 28일 갑술 1번째기사 1449년 명 정통(正統) 14년

"지금 오는 사신은 다 유자(儒者)이다. 신숙주(申叔舟) 등이 교열한 운서(韻書)를 질정(質正)하게 하고자 하니, 사신이 입경(入京)한 뒤에는 신숙주·성삼문(成三問) 등으로 하여금 태평관(太平館)에 왕래하게 하고, 또 손수산(孫壽山)·임효선(林效善)으로 하여금 통사를 삼게 하라."

 

-세종실록 127권, 세종 32년 윤1월 3일 무신 3번째기사 1450년 명 경태(景泰) 1년

직 집현전(直集賢殿) 성삼문(成三問)·응교(應敎) 신숙주(申叔舟)·봉례랑(奉禮郞) 손수산(孫壽山)에게 명하여 운서(韻書)를 사신에게 묻게 하였는데, 삼문(三問) 등이 관반(館伴)을 따라 뵈니, 사신이 말하기를,

"이분들은 무슨 벼슬을 하는 사람입니까."

하니, 김하가 말하기를,

"모두 승문원 관원이고, 직책은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입니다."

하고, 수산(壽山)을 가리키면서, "통사(通事)입니다."하였다. (하략)

 

-문종실록 3권, 문종 즉위년 9월 11일 임자 2번째기사 1450년 명 경태(景泰) 1년

성절사(聖節使)인 통사(通事) 손수산(孫壽山)이 황제가 기록한 조서(詔書)를 가지고 왔으니, 곧 정통 황제(正統皇帝)802) 가 북로(北虜)에서 돌아와 천하를 사유(赦宥)한 조서(詔書)이었다. (하략)

.

.

-세조실록 2권, 세조 1년 12월 27일 무진 3번째기사 1455년 명 경태(景泰) 6년

의정부에 전지하여 연창위 안맹담 등을 원종 공신에 녹훈하다

(여기에 손수산의 이름도 등재되어 있다.)

 

이후에도 세조실록에 여러번 등장한다.

대부분 통사로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세조 10년 1464년 명 천순(天順) 8년에 기록이 보인다.

 

 

묘역 우측 문인상

비록 관모를 쓰고 있지만 홀을 잡고 있지 않았으면 민불 같은 모습이다.

 

 

 

묘역 좌측 문인상

신체에 비해 얼굴이 너무 크다.

 

 

 

 

상석

현재는 파묘 상태인 묘 앞에 위치

 

본래부터 상석 용도로 치석하였을까?

아니면

석탑 부재를 옮겨 왔을까?

 

 

정면

2개 탱주 사이에 3개 안상을 조성

 

일견

하기단으로 기단저석,면석, 갑석이 한 개 부재로 조성된 석탑재.

또는

측면의 안상 2개로 미루어 석탑,석등의 배례석일 가능성도 충분하다.

 

 

상면은 평평하며 성혈이 새겨져 있다.

성혈로 미루어 폐사지 석탑재, 배례석이었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무덤 앞 상석으로 조성되었다면 상석에 성혈을 새길 민초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측면에는 안상이 2개, 탱주 1개만 있다.

즉, 현상태로는 하기단 부재가 될 수 없다.

물론

처음부터 2매로 조성된 석탑 하기단 중 1매는 결실되었다고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나는

왜 무덤 앞쪽면 안상 여부를 확인하지 않았을까?

 

이런 비슷한 사례가 경주에 있다.

 

 

경주이씨 묘역(1). 정면 안상 4개. 측면 안상 2개

 

 

경주이씨 묘역(2). 정면 안상 3개. 측면 안상 2개

 

 

경주이씨 묘역(3). 정면 안상 2개. 측면 안상 2개

 

 

석탑하기단석?

석탑,석등 배례석?

상석?

 

2017.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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