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순천시

순천...송광사 16국사 부도.폐사지

임병기(선과) 2017. 2. 26.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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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보조국사 감로탑

 

 

보조국사지눌普 (1158~1210)

성은 정씨(鄭氏). 호는 목우자(牧牛子). 아버지는 국학(國學)의 학정(學正)을 지낸 광우(光遇)이고, 어머니는 조씨(趙氏)이다.

8세 때 선종 사굴산파의 종휘(宗暉)에게 출가했다. 이후 일정한 스승을 따르지 않고 배움에 정진했다. 1182년(명종 12)에 승과에 합격했다. 이무렵 보제사(普濟寺)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석했다가, 동료들과 함께 후일 결사(結社)를 하기로 약속했다. 곧이어 남쪽 지방으로 내려와 창평 청원사(淸源寺)에 머물 때 〈육조단경 六祖壇經〉을 읽고 처음 깨달음을 얻었다. 1185년에는 예천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로 가서 3년간 대장경을 열람했는데, 이때 〈화엄경 華嚴經〉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과 이통현(李通玄)의 〈화엄신론 華嚴新論〉을 읽고 선(禪)과 교(敎)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으니, 이것이 2번째 깨달음이었다.


1190년 몽선화상(夢船和尙)과 함께 팔공산(八公山) 거조사(居祖寺)로 옮겨가 동지들을 불러모은 다음 예전에 약속했던 결사를 실행했다. 결사의 이름은 '정혜'(定慧)라 하고 〈권수정혜결사문 勸修定慧結社文〉을 반포했다. 정혜결사를 시작한 지 8년 만에 왕족과 관료를 비롯하여 수백 명의 승려들이 결사에 동참했다. 그러나 결사원 사이에 분쟁이 생기고 결사정신이 지켜지지 않자, 1197년에 거조사를 떠나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으로 은둔했다.


여기서 오로지 수행에 정진했는데, 하루는 〈대혜어록 大慧語錄〉을 보다가 3번째 깨달음을 얻었다. 그후 수행인이 차츰 모여들자 결사를 새로 시작하고자 제자 수우(守愚)를 보내 송광산(松廣山) 길상사(吉祥寺)를 중창하게 했다. 1200년(신종 3) 정혜결사를 거조사에서 길상사로 옮기고 이후 11년간 그곳에 머무르며 결사운동에 정진했다.


1205년(희종 1)에 길상사가 준공되자 왕은 이름을 '조계산수선사'(曹溪山修禪社)로 고치게 하고 가사를 하사했으며 120일 동안 낙성법회를 열게 했다. 지눌이 이곳에서 교화를 시작하자 그의 인격에 감화되어 왕공(王公)과 사서(士庶)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결사에 동참했다. 지눌은 이들에게 〈금강경 金剛經〉을 읽도록 권하고 〈육조단경〉의 이치를 가르쳤으며, 〈화엄신론〉과 〈대혜어록〉으로 보조교재를 삼았다. 억보산(億寶山) 백운정사(白雲精舍), 적취암(積翠庵), 서석산(瑞石山) 규봉난야(圭峰蘭若), 조월암(祖月庵)도 모두 지눌이 개창하여 선을 수행하는 도량으로 삼은 곳이다.


1210년 3월 법당에서 문도들과 대화를 나눈 직후 입적했다.


지눌이 활약한 시기는 무인란이 일어나 정치세력이 무신들로 교체되면서 불교교단도 재편되던 때였다. 즉 종래 중앙의 정치세력과 밀착되어 있던 개경 중심의 중앙불교는 종파를 막론하고 거의가 몰락했으며, 새로이 지방에서 결사운동이 대두하여 불교계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기성불교교단의 모순, 즉 정치세력과 지나치게 밀착함으로써 야기된 폐단과 선종과 교종 간의 극단적인 대립상을 비판하며 불교개혁을 추진했다. 그중에서도 침체된 선을 부흥시키면서 불교계를 개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수선사였다. 지눌은 인간의 심성(心性)에 대한 철학적인 분석을 토대로 실천체계로서 3문(三門)을 제시했다. 첫째,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으로, 중국 당대(唐代)의 선종 승려 하택신회(荷澤神會)의 이론을 받아들여 돈오점수설(頓悟漸修說 : 先悟後修)에 입각한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했다.


둘째,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인데, 여기서는 역시 당의 화엄학자 이통현의 학설을 받아들여 화엄과 선이 근본에 있어서 둘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셋째, 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이다. 이는 수행의 최종적인 단계로서 송대(宋代) 임제종 승려 대혜종고(大慧宗杲)의 간화선(看話禪)에 영향을 받았다.


이와 같이 지눌이 궁극적으로 표방한 것은 간화선이었다. 그러나 간화선에 철학적인 기초를 부여한 것은 중국 간화선과 다른 지눌의 독창이었으며, 더욱이 하택신회나 이통현과 같이 중국불교계에서 비정통인 사람들의 이론을 원용한 것은 매우 색다른 점이다. 지눌의 불교는 종래 대립관계에 있던 선과 교를 이론적으로 일치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천했다는 점에서 불교사상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제자로는 혜심(惠諶)·몽여(夢如) 등 수백 명이 있다. 저서로는 〈권수정혜결사문〉 1권, 〈진심직설 眞心直說〉 1권, 〈수심결 修心訣〉 1권, 〈계초심학인문 誡初心學人文〉 1권, 〈원돈성불론 元頓成佛論〉 1권, 〈화엄론절요 華嚴論節要〉 3권, 〈간화결의론 看話決疑論〉 1권,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1권, 〈염불요문 念佛要門〉 1권, 〈육조단경발문 六祖壇經跋文〉 1편(이상은 현존함), 〈상당록 上堂錄〉 1권, 〈상당가송 上堂歌頌〉 1권, 〈목우자시집 牧牛子詩集〉 1권(이상은 전하지 않음) 등이 있다.


죽은 뒤 문도들이 시신을 화장하고 수선사 북쪽에 탑을 세워 사리를 안치했다. 사후에 국사로 추증되었으며, 김군수(金君綏)가 비문을 지었다. 시호는 불일보조(佛日普照)이다.


 

보조국사부도비(사진 좌측)

부도암 부도전 맨위에 자리하고 있다.

( : 12, 1158~ 6, 1210) . () () () 1211 1213( 2) . () 1678( 4) 10 .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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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원암.부도암 길

 

 

2대진각국사혜심 眞覺慧諶 (1178~1234)부도

 

 

진각국사혜심眞覺國師慧諶 (1178~1234)

속성은 최씨(崔氏). 자는 영을(永乙), 호는 무의자(無衣子). 나주 화순현 출신이다.

완(琬)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배씨(裵氏)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출가하기를 청했으나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항상 불경을 생각하고 주문을 외었다. 1201년(신종 4)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太學)에 들어갔으나 어머니의 병환으로 고향에 돌아가 있으면서 불경을 공부했다. 다음해에 어머니가 죽자 조계산(曹溪山) 수선사(修禪社)의 지눌(知訥)에게 나아가, 재(齋)를 올려 죽은 어머니의 명복을 빈 다음 지눌 밑에 출가했다. 이때부터 혜심은 힘써 정진했는데 한때 오산(蜈山)에 있을 때는 반석(盤石) 위에 앉아 밤낮으로 선경을 익혔고 오경(五更)이면 게송(偈頌)을 읊었는데 소리가 10리 밖까지 들려 듣는 사람들이 이로써 시간을 짐작했다고 한다.


또 지리산 금대암(金臺庵)에 있을 때는 연좌대(宴坐臺) 위에서 좌선을 했는데 눈이 내려 머리까지 쌓여도 오직 좌선에만 몰두했다.

1205년(희종 1) 지눌이 억보산(億寶山) 백운암에 있을 때 혜심은 스승을 찾아가 뵈었다. 지눌이 다 해어진 짚신을 가리키며 "신발이 여기 있는데 사람은 어디 있는가?" 하고 묻자, 혜심은 "왜 그때에 보시지 않았습니까?"라고 대답했다.


또 어느 날 지눌이 조주(趙州)의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라는 화두와 대혜종고(大慧宗杲)의 10가지 병을 들어 대중에게 물음에, 모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에 혜심은 "3가지 병을 앓는 이라야 그 뜻을 알 것입니다"라고 했다. 지눌이 다시 "3가지 병을 앓는 사람은 어떤 곳으로 숨을 쉬는가?"하고 묻자 혜심은 손으로 창을 1번 내리쳤다. 이에 지눌은 방장에 돌아가 그를 불러 "나는 이제 그대를 얻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네. 그대는 불법을 임무로 삼아 본래의 서원을 바꾸지 말게"했다. 1208년 지눌이 그에게 수선사의 사주 자리를 물려주려 하자 지리산으로 피하여 오래 숨어 지냈다.


1210년 지눌이 입적하자 왕명에 의해 수선사에 들어가 조계종의 2세가 되었다. 이후 그는 조정의 지원을 받아 수선사를 확장하고 선사의 선풍을 더욱 진작시켰는데, 그의 문하에는 뛰어난 선납(禪衲)들도 많았지만 최우(崔瑀)를 비롯해 당시 무인집권자들의 가족과 무인정권에 참여했던 수많은 문무 관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혜심은 1213년(고종 즉위)에 선사(禪師)를 제수받고 다시 1216년에는 대선사로 올려졌다.


1219년 왕이 단속사(斷俗寺)의 주지로 명하자 여러 번 사양하다가 이듬해 부임했다. 1234년 6월 26일 문인인 마곡(麻谷)에게 "이 늙은이가 오늘은 너무 바쁘다"라고 말하고 가부좌한 채 앉아서 입적했다. 이때 나이 56세, 법랍 32세였다. 왕은 진각국사(眞覺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부도의 이름을 원조지탑(圓炤之塔)이라 사액(賜額)했다.


부도는 광원암(廣遠庵) 북쪽에, 진각국사비는 강진군 월남산 월남사(月南寺)에 각각 세워졌다. 그의 비명에는 "승과(僧科)를 거치지 아니하고 승직에 오른 것은 사(師)가 처음이었다"라고 적혀 있다. 그의 문하에는 청진몽여(淸眞夢如)·진훈(眞訓)·각운(覺雲)·마곡 등이 있으며 청진몽여는 그의 뒤를 이어 수선사 제3세 법주가 되었다.


혜심은 지눌의 뒤를 이어 수선사 제2세로서 간화선(看話禪)을 크게 떨쳤다.

간화선은 화란 화두의 준말로서 화두를 근거로 공부하는 선풍을 간화선이라 하는데, 중국 당나라말 이후부터 시작하여 송대에 이르러 대혜종고에 의해 성립되었으며 우리나라에는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처음 전해졌다. 혜심도 지눌과 같이 수행의 요점은 지(止)와 관(觀), 정(定)과 혜(慧)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외에 혜심은 간화일문(看話一門)을 들어 이것이 가장 빠른 길이며 지관·정혜도 모두 이 속에 포함된다고 했다.


혜심이 정혜쌍수를 수행의 요체로 본 것은 지눌과 동일하지만, 지관·정혜가 간화일문에 포함된다고 함은 그의 독특한 견해이다. 혜심은 선교융회의 입장과는 달리 한결같이 간화선만을 주장했고, 선과 교라는 상대적 의미에서 교를 배제했을 뿐만 아니라 선 안에서도 이론적인 선은 옳지 못하다고 물리쳤다. 그는 "망상을 버리고자 하면 간화만한 것이 없다"라고 했으며 선수행에서의 간화일문에 의한 실참실오(實參實悟)를 한결같이 강조했다.


그는 또 유학에도 통하여 유불(儒佛)이 다를 바 없다고 했다. 저서로는 〈선문염송집 禪門拈頌集〉(30권)·〈심요 心要〉(1편)·〈조계진각국사어록 曹溪眞覺國師語錄〉(1권)·〈구자무불성화간병법 狗子無佛性話揀病法〉(1편)·〈무의자시집 無衣子詩集〉(2권)·〈금강경찬 金剛經贊〉(1권)·〈선문강요 禪門綱要〉(1권) 등이 있다.


 

부도비

강진 월남사지에 있다.

[ : 1178( 8)~1234( 21)] .

() () 1235( 22) . . 2 .

 

. 16 1250( 37) () () , . , , , , . .

 

 

불일암

08시 개방후 첫방문객이어서 조심스러웠다.

 

 

불일암

제7세 자정국사(慈靜一印, 수선사 주 1293~1301)가 창건하여 얼마 전까지 자정암(慈靜庵)이라 불렀다.

1708년 시습(時習)·이징(以澄)스님이 증수한 것을 시작으로, 1765년에 탁명(卓明)스님이 창건한 공루는 1929년 해체되었고, 1866년 승허(乘虛)스님이 창건한 칠성각(七星閣)은 이듬해 의잠(宜岑)스님이 단청했다, 1891년에는 월화(月和)·계암(桂庵)·용선(龍船)스님이 정문을 중수하고. 1917년 설월(雪月龍燮 1868~1938)스님의 중수, 192l년 서월(瑞月奇文)스님의 서익실(西翼室)중건과 설월스님의 뒷방 수선 이후 6·25로 퇴락되었다가 1975년 법정(法頂)스님이 중건하면서「불일암」편액을 걸었고 1996년 본채 상부를 해체 중수했다. 1986년에 신축한 해우소도 1997년 해체 복원되었다 (감원 德祖). 지금의 본채 자리에는 칠성각이 있었고. 옛날 본채는 밭과 요사채 자리에 있었다.

 

 

 

7세자정국사(慈靜一印, 수선사 주 1293~1301)부도

불일암 뒤편에 위치한다.

 


자정국사慈靜一印(1293~1301)

법명은 일인(一印)이며  사이에 수선사주(修禪社主)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정확한 행장은 전하지 않는다.

 

자정국사 부도 

 

6대 원감국사圓鑑沖止(1226~1293)부도

은적암지와 묘적암지 능선길 중간지점에 위치한다.

 

원감국사는 수녕(遂寧, 현재 長興) 위(魏)씨로 19세 때 장원급제하여 10년간 외교관으로 봉직하면서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감로암이 한때 국제선원이었던 것도 이 인연의 한 줄기였을까. 29세에 득도(得度)하였고 5세 원오국사(圖悟天英 1215 ~1286)의 뒤를 이었다. 시문에도 능하여 어록 등이 전한다.

 

이 당시 동아시아는 미증유의 몽골제국 정복 전쟁으로 인한 수난의 시대였다. 원 세조(世祖 쿠빌라이칸 1215 ~1294)는 1273년에 다음해의 일본 정벌을 앞두고 전쟁물자 준비를 고려에 부담 시켰다. 이때 송광사의 사전(寺田)도 전비 충당에 편입되자 사찰 경영에 큰 어려움이 닥쳤다. 이에 원감국사는 원 세조에게 청전표(請田表)를 올려 완복(完復)시켰다.

 

1275년에는 원 세조의 초청을 마지못해 응하니 빈주(賓主)와 사부(師傅)의 예로 대하였다. 보물 제 1376호인 티베트문법지(Tibet文法旨)도 이와 관련된 유물로 전한다. 스님의 문집인 원감국사집(素星圭 역)을 보면, 백성의 곤궁함은 최악의 상태이며 스님들의 생활도 마찬가지여서 영남지방의 참상(1280년, 시제No.79)과 10년간 장맛을 보지 못한 절 살림(시제 No.92) 등의 시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원감국사비.

감로암 학의 머리 형국에 있다.

1700년에 다시 세웠으며 귀부는 원감국사 부도를 향하고 있다고 한다.

 

 

( : 14, 1227~ 19, 1293) .

() 1314( ) 1701( 27) () . () . · 6 7 .

 

 

8대 자각국사부도

 


자각국사 도영慈覺國師 道英(~1312)

법병은 도영이며 정확한 행장은 전하지 않으나 5세 원오국사와 특별한 친분이 있었던 스님으로 추정한다.

 

자각국사 부도 

 16세 고봉화상高峯和尙1350(충정왕 2)∼1428(세종 10)부도

 

 

고봉화상高峯和尙
조계산 수선사(修禪社)의 제16세 사주(社主)이다.

성은 김씨, 본관은 신주(愼州). 호는 고봉(高峰) 또는 지숭(志崇). 어머니는 임씨(林氏)이다.20세에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았고, 젊어서 승과(僧科)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명리(名利)를 위하는 길이라 하여 버리고 입산수도하던 중 나옹(懶翁)을 스승으로 삼고 법맥을 이었다. 항상 머리털을 두 치가량 기르고 바리〔鉢盂〕 하나로 여러 곳을 돌아다녔으며 풀피리를 잘 불어 사람들은 그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하였다. 30년 동안 명산대찰을 찾아 소요하다가 안동의 청량산에 청량암(淸凉庵)을 짓고 선정을 닦았다.


1395년(태조 4) 남쪽의 여러 산을 유력(遊歷)하던 중 금전산(金錢山)금둔사(金芚寺)에서 유숙하다가 꿈속에서 한 사찰을 보았다. 다음날 우연히 송광사(松廣寺)에 이르렀는데 꿈에 본 사찰과 같았다. 제자들과 함께 송광사를 새로 일으켜 옛 모습대로 완전히 복원할 것을 서원하여 1399년(정종 1) 국가의 힘을 빌려서 불(佛)·법(法)·승(僧) 전당 30채를 지었다.


그 뒤 김해 신어산(神魚山) 각암(覺庵)과 경주 원원사(遠願寺), 울산 태원암(太元庵) 등에 머물다가 1414년(태종 14) 송광사로 돌아왔다. 1420년(세종 2) 송광사 주지가 된 제자 중인(中印)이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다시 사찰의 증축을 시작하였다. 이 때 그는 방문(榜文)을 지어 낙성회(落成會)를 베풀고 중인의1428년 7월 11일 병을 얻었으나 평소의 의식을 그대로 행하다가 21일 인시(寅時)에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유언에 따라 유골을 거두어 침실에 안치하였는데, 이듬해 유골에서 사리(舍利)가 나왔다. 그 뒤 여러 차례를 두고 사리가 분신(分身)한 것을 합해서 78개를 얻어 백동함(白銅函)에 넣어 송광사 북쪽 언덕 청진암(淸眞庵)터에 부도(浮屠)를 세웠다.송광사를 중창한 공로와 그 도력으로 송광사 16국사의 열(列)에 참여하게 되었다. 제자로는 신찬(信贊)·혜성(惠性)·상제(尙濟)·홍인(洪仁)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고봉법장가집(高峰法藏歌集)』이 있다.

 

고봉화상부도 

 

대가희옥융묘탑 待價大師 熙玉 融妙塔

16국사 부도가 아니며 조선시대 부도로 전한다.

 


대가대사희옥 待價大師熙玉

송광사지에 의하면 대가대사는 임진왜란 시에 총제사 이순신의 부장으로 진주성 전투에 참여한 자운대장의 첩을 받은 송광사 윤눌대사의 친동생으로 인조2년 남한산성 축성때 전라도 책임자로 활약했다. 인조6년 송광사 사천왕상을 다시 봉안하였으며 초서와 시운에 능하였다고 한다.


스님의 4형제가 출가하여 고승이 되었다.

대가대사의 맏형 자운스님이며,부도는 화엄사 부도전에 봉안되어 있다.

둘째가 대가희옫, 셋째는 비능스님, 넷째는 급암스님 이다.

 

 

부도전에서 올라오는 길과 고봉국사 부도전에서 내려오는 길 좌측 편백수림

이길을 올라가면 보조암지에 이른다.

 

보조암지-맞은편 개울건너 은적암지-산허리를 타고 가면 원감국사부도-묘적암지-청진암지-청진국사 부도-부도전으로 내려오는 길이 뚜렷하게  보인다.

 

 

보조암지 입구조산

본래의 길은 두 조산 사이었을 것이다.

 

 

보조암지

보조암은 보조국사가 말년에 창건한 것으로 알려지며 그 이후의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그 후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소실되고 다시 1606년 본사 제4중창주 應禪스님이 중건하였고, 1726년에 淸仁스님이 다시 중건하였으며, 이 외에도 1771년에는 영각을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로도 동각, 청원루 등의 중수기록이 꾸준히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보조암의 운영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908년 일제에 반발한 조규화군을 쫓아온 토벌군의 방화로 4월 18일 오후 7시에 소실되었다.

 

 본암本庵으로도 불리고 있어 송광사의 산내암자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보조암지

 

 

은적암지

보조암지 맞은 편 개울을 건너 올라가면 닿는다.

 

『조계산 송광사지』에는 송광사의 13세 국사로 알려진각진국사 覺眞國師(1270~1355)가 창건하였다는 구전의 내용이기록되어 있다.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종경록이 1531년 화주 옥경主 玉鏡에 의해 은적암에서 개판開板되면서 부터이다. 17세기 후반에는 백암성총栢庵性聰(1631~1700)과 같은 고승도 주석하였으며, 18세기에서 19세기를 거치면서는 空樓를중수하거나 불화를 조성하는 등 활발하게 사세가 유지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송광사를 근거지로 교육에 매진하던 근대기의 고승 금명보정錦溟寶鼎(1861~1930)스님이 별당을 짓고 머물면서 활발하게 교육과 저술에 매진했던 걱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908년 일제에 반발해 거군한 조규화군의 토벌과정에서 보조암과 함께 소실되었다.

 

 

석문石門

 

 

은적암지

 

 

은적암지

 

 

묘적암지

창건 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1661년에 간행된 『詠月堂大師文集』에 실린 「曹溪山妙寂庵重創記」를 보면 당시 묘적암의 대대적 중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曹溪山 松廣寺誌』에 기록된 각 암자의 중창기록에는 적암이 광해군때 중창된 것으로 되어 있어 영월당스님의 중창기는 바로 이때에 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후 묘적암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다가 『조계산 송광사지』에 1924년 조계암, 보조암, 은적암과 함께 묘적암도 폐허로 남아 있다고 적고 있어 이미 이전에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묘적암지

 

 

묘적암지에서 바라본 원감국사 부도

 

 

청진암지

13세기 중반 청진국사의 입적 직전에 창건되고 입적 후에 청진암으로 명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임진왜란 직전인 1589년에 三創이 있었다고 하여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이르는 기간에 二創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1799년 空樓를 중수, 1857년에 성산각星山閣을 창건하였다. 이후 1919년 6월 10일에 四創이 있었으나,1927년 성산각과 동익실東翼室을 훼철하고 1936년 공루空樓를 훼철하는 등 1938년에 들어 완전 훼철하여 송광사의 도성당을 중건하면서 청진암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3대 청진국사淸眞國師부도

 

 

청진국사
수선사(修禪社) 16국사(國師) 중 제3세 국사이다.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몇 군데 언급된 부분적 기록을 통하여 그의 행적을 살펴 보면, 수선사 제3세로 활약한 시기는 스승 혜심(慧諶)이 입적한 1234년(고종 21)부터 그가 입적하기까지의 18년간으로 추정된다


이때의 고려 불교는 거란과 몽고의 침략으로 기복불교(祈福佛敎)가 크게 성행하였던 시기로서, 궁중에서는 거의 매월 복을 비는 여러가지 도량(道場)이 열렸고, 황룡사구층탑이 몽고에 의하여 불타는 등 침체일로에 있었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수선사를 맡아 지눌(知訥)에 의해서 선양된 선풍(禪風)을 크게 진작시켰다.또한, 스승 혜심의 비를 세우고, 혜심의 『선문염송(禪門拈頌)』을 열람한 뒤 거기에 347칙(則)을 첨가하여 보완하는 등, 참신한 선풍을 잇게 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리고 당대의 법왕으로 추앙받으면서 혼원(混元)·천영(天英) 등의 제자를 배출하였다. 1252년 수선사 사주직(社主職)을 제4세 혼원에게 물려주고 입적하였다.


당대의 문호인 이규보(李奎報)와 자주 교유하였다. 언제인가 시자(侍者) 두 사람을 이규보에게 보내어 정이안(丁而安)의 흑죽(黑竹)을 구하매 이규보가 흑죽 2간(幹)을 보내면서 찬한 글이 『동문선』 권51에 전하고 있다.

 

청진국사부도 

 

부도암 부도전

부도전(浮屠殿)이며, 비전(碑殿)이라고도 한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29기의 부도와 5기의 비(碑)가 봉안되어 있다.

 

 

 

 

 

그런데

왜 부도전이 출입금지구역이라고 지레짐작하였을까?

다시

인연지으라는 뜻이라고 믿어야겠다.

 

217.02.11

(송광사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문화재청.다음을 참조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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