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순천시

순천...조계산 송광사

임병기(선과) 2017. 2. 23.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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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답사기

참 겁없이 휘두른 답사기로 되돌아보면 부끄럽기도 하다.

하지만 일부 글은 인용해야 겠다.

 

폰 밧데리 방전으로 내려오면서 담은 일주문,하마비, 청량각 사진이 없어 아쉽다.

이글에 이어 16국사 부도와 폐암사지 글을 별도로 올릴 예정이다.

(내용보다 동선 수립 시 참고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2002년 12월 답사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淸凉(청량)閣
부처님의 세계란 말이다.

인도에서는 더운 기후 조건으로 인해 시원한 설산을 이상세계로 인식하여 극락으로 생각하였으니 곧 청량이 극락정토가 아닌가. 선암사의 조계산도 한 때 청량산이라 부른 것처럼 곳곳에 청량산,청량사가 산재한 것도 그런 연유가 아닐까? 어제 내린 비로 먼지 없는 꼽곱한 산길을 계곡물 소리 벗삼고 이름 모를 나무의 배웅을 받으며 걸어가도 팔공산자락의 송림사처럼 소나무는 뵈지 않고 편백(?)만 이따금 서있다.


그렇다면 松廣의 의미를 널리 회자되는 것처럼 松= 十 + 八 + 公으로 해석하여 18명의 공인 즉 국사를 배출할 가람으로 여기면 이미 16명의 국사가 나왔으니 2명의 고승대덕은 어느 스님에게 자리를 내줄지 의미 없는 상념에 꼬리를 물고 길가 하마비에 마음 한 자락 걸쳐놓고 비림을 지나 소맷돌에 돌사자가 두손을 모으고 앙증맞게 서있는 강원, 율원, 선원을 갖추어서 조계산 총림인 일주문을 들어섰다.


하마비...마애님 사진


일주문으로 들어서기 전 하마비

고종의 왕실 기도처인 관음전 때문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주문...마애님 사진


일주문

일주문에는 세로로 대승선종 조계산 송광사 편액이 걸려있으며, 안쪽에도 승보종찰 조계총림 편액이 있다. 

2007년 보수중 상량문이 발견되었으며 조계문(송광사 일주문)의 상량문에 의하면 초창이 신라말, 고려 담당국사시절인 1310년경 두 기둥을 세우고, 1464(조선 세조 10년)에 제2 중창, 1676년 숙종 2년에 삼중창하여 상량하였으며 1802년 순조2년에 4차 중창으로 담당국사가 세운 두 기둥을 교체하였다. 조계문은 공포의 양식 등으로 미루어 볼 때 3중창이었던 1802년에 세운 듯하다.



주문 소맷돌 사자상

 

 

일주문 소맷돌 사자상

산문의 지키미보다는 참배객들에게 두손 모아 인사드리는 형상이다.

 

 

송광사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에 있는 조계산 자락에 새둥지처럼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송광(松廣)이라는 이름에는 몇가지 전설이 있다.
첫째는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셔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절이라는 뜻이다.
곧 '송(松)'은 '十八(木)+公'을 가리키는 글자로 18명의 큰스님을 뜻하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을 가리켜서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서 불법을 크게 펼 절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보조 국사 지눌스님과 연관된 전설이다. 곧 스님께서 정혜결사를 옮기기 위해 터를 잡으실 때 모후산에서 나무로 깍은 솔개를 날렸더니 지금의 국사전 뒷등에 떨어져 앉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솔개가 내려앉은 대)라 불렀다한다. 이 전설을 토대로 육당 최남선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솔개의 사투리)라 하여 송광사를 솔갱이 절이라 풀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일찍부터 산에 소나무(솔갱이)가 많아 '솔메'라 불렀고 그에 유래해서 송광산이라 했으며 산 이름이 절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하면 송광사는 신라말 혜린(慧璘)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송광산 길상사(吉祥寺)였으며 100여 칸쯤 되는 절로 30, 40명의 스님들이 살 수 있는 그리 크지않은 규모의 절이었다고 한다. 그 뒤 고려 인종때 석조(釋照)대사께서 절을 크게 확장하려는 원을 세우고 준비하던 중 타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50여년 동안 버려지고 페허화된 길상사가 중창되고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게 된 것은 불일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정혜결사가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부터이다. 지눌스님은 9년 동안의(명종 27년1197년 ~ 희종 원년) 중창불사로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정혜결사운동에 동참하는 수많은 대중을 지도하여 한국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였다.


이 때부터 송광사가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정유재란, 6.25사변 등 숱한 재난을 겪었으나 지속적인 중창불사로 지금의 위용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송광사 홈페이지 발췌

 

 

고향수古香樹

지눌국사가 심은 나무로 전한다.

지눌국사가 다시 송광사를 방문할 때 소생한다는 달빛에 젖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바지랑대 처럼 외로히서있어 마치 솟대 같은 느낌도 들고, 아직도 살아 있는 천자암의 쌍향수와 묘한 대비가 된다.

 

 

2002년 답사기에 올려진 설명이다.


洗月閣(세월각), 滌珠閣(척주각)

송광사에만 남아있는 특별한 단칸 전각이다.
민가에서 생을 마감한 망자의 위패를 사찰 명부전에 모시기 전 사바에 오염돤 혼을 잠시 정화하기 위해 위패를 모시는 건물이다.

 

세월각은 月의 의미가 음, 즉 여성을 상징하기에 여자의 혼을 달래는 전각임을 쉽게 알 수 있겠으나...
척주각은 남자의 위패를 모신 전각인데 둔한 머리로 한참이나 골몰에 보지만 뚜렷히 다가오지 않지만 반풍수로 요량해보면 珠는 구슬이기에 구슬을 남성의 양물로 인식된다.

 

다른 각도로 해석하면 민화에서 한문의 음을 빌려 壽福康寧富貴多男을 상징하듯이(민화에서 새우는 허리가 굽었다고 노인 즉 장수를 의미하며, 새우 蝦의 음을 賀로 읽어 축하의 뜻으로 민화의 소재로 등장한다.) 珠의 음을 빌려 朱로 표기해보면 朱는 붉음, 밝음 즉 밝음은 태양을 상징하는 日이라 日은 곧 양, 남자를 상징한 것이리라.

 

 

삼청교三淸橋. 우화각羽化閣


삼청교는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홍교로 다리 역할을 하고 위에 우화각은 통로 역할을 하는 전각이다.



 

송광사 편액

해강 김규진 글. 죽농 안순환 그림이다.


 

삼청교

삼청교는 일명 능허교라고도 한다. 19개 네모난 돌로 무지개 모양을 만든 후, 양 옆에 다듬은 돌을 쌓아 올려 무게를 지탱하도록 하였다. 하부에는 용구자의 한 명인 공하가 지키고 있다. 조선 숙종 33년(1707) 다리를 만들었고,  60여년이 지난 영조 50년(1774)에 보수를 하였다.


 

우화각


먼저 우화각을 보면 기단은 바로 홍교의 상층부분의 장대석으로 결구된 평면을 이용하였고 양편에 긴 장대석 4개를 연결시켜 낮은 난간을 삼았다. 주춧돌은 약간 높은 원형을 놓았고 기둥은 원형인데 전면은 추녀 밑에 활주를 세웠다. 포작은 주심포인데 주첨차는 교두형이며 행공첨차는 초각을 하였다. 그리고 들어가는 입구 쪽은 팔작지붕이고 나가는 쪽의 지붕 끝은 맞배형으로 처리하였다. 이는 아마도 바로 곁에 있는 건물과의 공간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홍교의 구조를 보면 19개의 방형 장대석을 짜 올려 홍예를 이루었으며 양측면도 역시 다듬은 방형 장대석을 쌓아올려 가중을 지탱케 했다.



침계루

우화각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출입이 제한된 건물이다.

 


소조사천왕상

남방 증장천왕.서방 광목천왕


송광사 사천왕상은 1628년(인조 6)에 다시 만들었다(重造)는 묵서명과 송광사 사고(松廣寺史庫) · 사지(寺誌) 등의 자료가 남아있어, 정유재란으로 훼손된 상을 1628년에 다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북방 다문천왕.동방 지국천왕

 


범종루

 


대웅보전


2002년 답사기를 옮겨 왔다.

(당시에 풍수에 관한 책을 읽고 있었는 듯하다)


"사자루(침계루) 앞 전각의 솟을지붕 눈에 담고 종고루를 올라서니 넓은 운동장 같은 느낌의 대웅보전 월대(마당)가 나타난다 탑이 없어 넓어 보일까? 탑은 왜 없을까? 특이하고 유례가 거의 없는 대웅보전의 겹팔작지붕의 의미는 무얼까?


믿거나 말거나 재미있는 풍수지리로 들어 가보자. 송광사는 풍수에서 배가 나가는 형국인 行舟 형이라 건물을 작게 보일려고 용마루를 짧게 변칙으로 지붕을 겹팔작으로 조성하였고, 배에 짐이 많이 선적되면 배는 가라 앉기에 탑, 석등을 세우지 않은 것이다. 아무튼 겹팔작지붕으로 인해 통영의 미래사 범종각처럼 대웅보전은 亞자 구조로 내부가 화려함의 극치이며 이름에 걸맞게 연등불,미륵불,석가모니불과 문수,보현,관음보살이 명찰을 붙이고 수미단 위에 모셔져 있다."


또한, 승보사찰이어서 진신사리를 모신 탑을 세우지 않은 것은 아닌지...

 


불단

 


영산전.약사전


영산전

정면 3칸 측면 2칸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사적에 의하면 인조 17년(1639) 창건하였고, 영조(1724∼1776) 재위 연간에 중수되었다고 한다.


약사전

정측면 단칸의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약사전 목조약사여래좌상

 


영산전 목조여래좌상

복장유물을 통하여1780년에 조성된 불상으로 확인 되었다.

나발, 낮은 육계, 정상계주와 중간계주가 있다. 방형 상호에 턱선을 둥굴려 둥근 감을 준다. 이목구비는 크고 뚜렷하다. 백호가 있으며 양 귀는 턱선 부분까지 내려왔고,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었다. 법의는 통견이며 승각기가 보이지만 매듭표현은 없다. 무릎 위에서 왼손은 촉지인을 취하고 오른손은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이 끝을 맞댄 아미타인을 결하고 있다.

 


연가

 


팔상도

팔상전?

영산전이었는데...

 


비사리구시

싸리나무로 만든 밥그릇이다.

비사리구시는 남원 송동면 세진골에 있던 싸리나무가 태풍으로 인해 쓰러진 것을 가공하여 만들었다.고 전한다


 비사리구시의 재료인 싸리나무와 관련해서는 비를 만드는 싸리나무가 아닌 느티나무로 과거 스님들의 사리함을 주로 만들던 느티나무를 사리함을 만드는 나무'라는 뜻으로 사리나무'로 부르던 것이 '싸리나무'로 와전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비사리구시는 능견난사, 쌍향수와 함께 송광사 3대 명물 중 하나이다.


 


명부전



수조

 


관음전

본래는 성수전聖壽殿이라 하여 1903년 고종황제의 성수망육聖壽 望六(51세)을 맞아 임금이 이름을 지어 편액을 내린 황실 기도처로 건립되었으나 1957년 옛 관음전을 해체하면서 관음보살을 옮겨 봉안하고 있다. 보살좌우 해와달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상징하며 품계도 벽화도 모셨다. 또한 내외벽에 화려하게 화조도, 산수화를 그려져 있다. 관음보살을 모시기 전에는 궐패를  모시지 않았을까?

 


소맷돌 사자

 


목조관음보살 좌상

불단 위 보살상 좌우에 고종과 명성황후를 상징하는 해와 달을 그린 벽화가 보인다.

닫집의  용도 다른 전각과 다른 느낌이다.


보물 제1660호. 관음전에 봉안된 목조관음보살상으로 2009년 11월 2일 행해진 개금(改金) 불사 당시 복장물이 발견되었다. 복장물은 의류 2점, 시주자 명단 1점, 직물조각 11점, 전적 8종 17권, 다라니 2종 423매, 후령통 1점, 청색유리편 1점 등 11건 35점에 이른다. 보살상은 원문 기록을 통해 1662년(현종 3)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복장물 가운데 짙은 청남색 명주 비단으로 만든 저고리 안감에 소현세자(1612-1645)의 3남 경안군(慶安君)의 수명장원(壽命長遠)과 관련된 발원문이 적혀 있어 시주자 및 제작 배경을 알 수 있다.


목조보살좌상은 역동적인 힘이 느껴지는 신체의 표현과 U자형으로 구부러진 관대가 있는 큰 보관 그리고 천의를 입은 점이 특징이며 무릎에는 갑대를 두른 장식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오른손은 가슴 위로 들었으며 왼손은 무릎에 놓아 엄지와 검지를 구부린 모습이다. 불상 안에서 나온 백색의 시주자 명단에는 불상을 만든 화원(畵員)으로 혜희( 慧熙), 금문(金文)이라는 승려의 법명이 적혀 있다.


16세기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에서 활동한 조각승 혜희가 제작한 목조관음보살좌상으로, 17세기 조선 왕실과 연관된 유물인 점에서 주목된다.

 


화조도와 품계도

 


불단좌우 측벽

벼슬 품계를 표시하고 관리들이 불단을 향해 허리를 굽히고 있다.

 


진여문?


예나저나 정겹다

출입금지 안내문이 걸려 있어도...


아쉬움이 있다면

대웅전 영역의 전각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출입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늘은

성보박물관도 휴관(개관 초기에 들렸었다)이어서 능견난사를 비롯 꼭 뵙고 싶었던 문화재를 놓쳐 아쉬움이 더했다.



승보전


송광사에서 배출된 16국사


보조국사(普照國師). 2세 진각국사(眞覺國師), 3세 청진국사(淸眞國師), 4세 충경진명국사(沖鏡眞明國師), 5세 회당자진국사(晦堂慈眞國師), 6세 원감국사(圓鑑國師), 7세 자정국사(慈精國師), 8세 자각국사(慈覺國師), 9세 담당화상(湛堂和尙), 10세 혜감국사(慧鑑國師), 11세 자원국사(慈圓國師), 12세 혜각국사(慧覺國師), 13세 각암국사(覺巖國師), 14세부암정혜국사(復菴淨慧國師), 15세 홍진국사(弘眞國師), 16세 고봉화상(高峯和尙) .


오늘 답사의 주목적인 16국사 부도 순례길

16국사 부도 중 송광사에 모신 7분 국사  부도에 관해서는 이글에 이어서 올릴 예정이다.


순례길 동선

글 순서와 달리 송광사에 모셔진 16국사 부도전 순례는 사하촌에서 청량각을 거치지 않고 좌측 개울을 따라 시작하였다.

2대 광원암 진각국사 부도-6대 불일암 자정국사 부도-7세감로암 원감국사 비-8대 감로암  자각국사 부도-16대 고봉국사 부도-대가대사부도-보조암지-은적암지- 7대 원감국사 부도-묘적암지-청진암지-3세 청진국사 부도-부도암 부도전- 송광사 경내 1대 보조국사 부도



1대 보조국사 감로탑


 

2대 진각국사 부도

 

 

 

 

7대 자정국사 부도

 


감로암 원감국사비

 

 

8대 자각국사 부도

 

 

16대 고봉국사 부도

 

 

대가대사 부도

 

 

편백숲

 

 

보조암지

 

 

은적암지

 

 

은적암지

 

 

6대 원감국사 부도

 

 

묘적암지

 

 

청진암지

 

 

3대 청진국사 부도

 

 

송광사 부도전

제일 위쪽 보조국사비와 송광사사적비가 나란히 서 있다.

 아래로 부휴선사의 부도를 중심으로 25분 고승들의 부도 와 3기 비석이 더있다.


부도전을 끝으로 4시간여의 송광사 순례를 마쳤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밀린 숙제를 푼 듯 가뿐 했으며 보름날 절집에서 먹은 공양은 일생에서 가장 맛난 공양으로 남을 듯 하다

 

2017.02.11

(문화재청.순천시청.송광사 홈페이지를 참조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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