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완도군

완도...부용동 원림

임병기(선과) 2017. 2. 7.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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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땅끝여객선터미널.

이곳에서 보길도행은 30분 간격으로 운항되며 노화도에서 하선하여 차량으로 보길도로 들어갔다.

사실

보길도와 멀리 떨어진 곳에 거주하는 답사매니아들에게 부용동 원림을 동선에 포함시키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보길도만을 답사하는 동선도 뭔가 비효율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런저런 사유로 답사 30년이 지난 오늘 친구들과 보길도.완도.청산도에 입도했지만 배시간, 답사에 전혀 관심없는 동행인들 때문에 결론적으로 주마간산의 관광이 되고 말았다.

 

 

 

보길도甫吉島

완도에서 서남쪽으로 23.3㎞ 떨어져 있고, 노화도 남서쪽 1.1㎞ 지점에 있다. 동경 126°37′, 북위 34°06′에 위치한다. 면적은 32.99㎢, 해안선 길이는 41.0㎞이다. 1694년 이후 영암군 관할에 속하여 매년 조세를 징수하여 오다가 1870년(고종 7)에 면민들의 진원으로 방진(防鎭)을 설치하여 삼도진(三道鎭)이라 칭하였다. 1897년완도군으로 부속되면서 노화면·보길면·임도면으로 분리되었다. 광복 후 3개 면이 노화면으로 다시 통합되었고 1980년 읍으로 승격, 1982년보길출장소가 설치되고 1986년보길출장소가 보길면으로 승격되었다.

 

명칭유래

옛날 영암(靈巖)의 한 부자가 선친의 묘자리를 잡기 위해 풍수지리에 능한 지관을 불렀는데, 지관이 이 섬을 두루 살핀 뒤 ‘십용십일구(十用十一口, 甫吉)’라는 글을 남기고 갔다.이 글의 뜻을 풀기 위해 월출산 선암사의 스님에게 [내용]을 물으니 섬 내에 명당자리가 11구 있는데 10구는 이미 사용되었고 나머지 1구도 이미 쓸 사람이 정해졌다고 풀어 보길도라 불렀다고 한다.

 

자연환경

지질은 완도, 청산도, 노화도와 같이 백악기 또는 제3기에 속하는 의탄질유문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형은 남쪽의 적자봉(赤紫峰, 425m), 동쪽의 광대봉(廣大峰, 311m), 서쪽의 망월봉(望月峰, 364m) 등 전역에 산지가 발달하고 있으며 각 사면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섬 중앙에 협소한 저지가 있어 경지로 이용되고 있다.

 

이곳은 난류의 영향으로 온화한 해양성기후가 나타나며, 1월 평균기온 0.1℃, 8월 평균기온 25.3℃, 연강수량 1,285㎜, 연강설량 11㎜이다. 상록광엽수립이 분포하는 난온대성 기후대에 속한다. 식생은 적자봉을 중심으로, 남사면에는 붉가시나무군락이, 북사면에는 구실잣밤나무군락과 곰솔군락이 분포하고 있으며, 부용리와 부황리 마을 주변에는 동백나무군락이 소규모로 잘 보존되어 있다. 참가시나무군락은 부황리 마을 남쪽의 계곡과 능선 부위에, 소누마·구실잣밤나무 군락은 부용리 동사면에, 까마귀쪽나무군락과 순비기나무군락은 예송리 해변가에 소규모로 분포한다.

 

현황

2007년 말 현재 경지 면적은 논 0.78㎢, 밭 3.29㎢, 임야 28.37㎢이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보리·콩·고구마·마늘·무·채소 등이 생산된다. 연안에서는 도미·삼치·멸치가 어획되며, 전복·소라의 해녀 채취 사업이 활발하고 굴 양식업도 이루어지고 있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37호인 부용동정원(芙蓉洞庭園)은 윤선도(尹善道)의 유적지이다.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윤선도가 제주도로 가던 중 보길도의 자연경관에 심취되어 부용동에 연못을 파고 세연정(洗然亭)을 세워 선유를 즐기며 불후의 명작인 「오우가(五友歌)」와 「어부사시사(漁夫四時詞)」 등을 남겼다. 현재 쓰이는 섬 내의 지명도 거의 그가 붙인 것이다.

 

동쪽 선백도 바위에는 송시열비(宋時烈碑)가 새겨져 있으며, 보길나루에서 발견된 조개더미와 예송리에서 표면채집된 유경역자식석촉(有莖逆刺式石鏃)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40호인 상록수림이 장관을 이루는 예송리해수욕장은 작은 자갈이 깔려 있고 중리해수욕장도 경치가 빼어나다.

 

풍어와 도서민의 무사를 기원하는 당제를 매년 섣달 그믐날 모시며 지신밟기와 농악놀이가 행하여진다. 또한, 큰 나무나 바위에 고사를 지내 안녕과 무사고를 비는 풍습이 있다. 북쪽 노화도와 마주한 청별 앞 바다에 매립 사업이 이루어져 행정 관서와 상가가 집중되어 중심지가 되고 있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부용동정원

1587년(선조 20) 서울에서 태어난 고산은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인조의 총애를 받으며 공조정랑, 호조, 예조 등 관직을 두루 거쳤다. 이후 고향인 해남으로 돌아와 50세 되던 해에 병자호란(1636)이 발발하여 종국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윤선도는 왕을 돕기 위하여 아들과 노복 수백 명을 모아 서해를 올라가 강화도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미 강화도는 청나라에게 함락당하여 해남으로 돌아오던 중에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비보를 듣게 된다. 고산은 비분강개하여 세상을 다시 보지 않을 결심으로 제주로 향했다. 그러던 중 수려한 산봉우리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 닿아 이곳에 머무르게 되었다.


 

세연지와 칠암

고산은 이곳을 지형이 마치 연꽃 봉오리가 터져 피어나는 듯하여 부용(芙蓉)이라 이름 지었으며,  부용은 중국 부용성 선유고사仙遊故事에서 연유하였으니 윤선도가 세상사 잊고  신선처럼 지내고 싶은 마음을 표출한 지명임을 알 수 있다. 격자봉에 올라 지세를 살핀 윤선도는 산 아래에 살림집 낙서재. 곡수당를 짓고 건너편엔 동천석실을 지었다. 그리고 동네 아래쪽에 계곡물을 판석(굴뚝다리)로 막아 세연지를 조성 후, 연못 물을 끌어들여 네모난 회수담을 만들고, 그 사이에 섬을 축조하고 세연정을 지었으며,못 가운데 칠암을 배치하였다.

 

 

세연정 주변에는 동백나무. 매화를 비롯한 갖가지 상록수가 사시사철 푸르다.

 


혹약암或躍岩

세연지 계담에 있는 칠암 중의 하나이다. 이 바위는 혹약제연或躍在淵이란 효사에서 따온 말로, "뛸 듯하면서 아직 뛰지 않고 못에 있다"는 뜻이다. 즉 혹약암은 마치 힘차게 뛰어갈 것 같은 큰 황소의 모습을 닮은 바위를 말한다.

 

 

사투암射投岩

세연정 주변의 잘생긴 바위 일곱을 지칭하여 칠암이라 불렀는데, 그 중 하나인 사투암은 '옥소대를 향하여 활을 쏘는데 발받침 역할을 하였다.'고 전해지는 바위로 연못쪽이 들려진 모습이다. 들려진 부분에 발을 딛고 옥소대쪽 과녁을 향하여 활을 쏘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세연정洗然亭과 세연지洗然池

세연정은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으며 풍류를 즐긴다는 의미에서 '원림'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누마루에 앉으면 세연지, 회수담, 동대, 서대, 판석보,칠암 등이 고스란히 시야에 들어온다.세연지는 시내를 막아 계담을 만들고 소방이라는 배를 띄워 뱃놀이를 하였던 곳이다.




세연정洗然亭

담양 소쇄원. 영양 서석지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3대 전통정원으로 회자되는 세연정은 부용동 원림에서 풍광이 가장 뛰어난 장소로 세연지와 회수담 중앙에 놓인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세연정 창문은 비바람을 막기 위해 외부에 판문을 달았다. 판문을 열면 윗부분은 처마에 매달리고 아랫부분은 땅에 늘어뜨려져 합치면 판옥이 되는 구조였다. 따라서 겨울에도 생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세연정 편액

세연지 칠암이 있는 쪽은 칠암헌七岩軒, 중앙은 세연정洗然亭, 남쪽 낙기란樂飢欄, 서쪽 동하각同何閣, 동쪽에는 호광루呼光樓 편액을 걸었다.4면에 각각 편액이 걸려 있다고 했으나 내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칸사이에는 사면에 평난간을 둘렀으며, 마루 아래 중앙에 아궁이를 설치하였다.



아궁이가 있는 중앙에는 마루와 턱을 쌓고 상하로 높낮이를 두어 온돌방을 깔았다.

 


상부 마루.

고산을 비롯 연장자들의 공간이었을까?



중앙 온돌


  


비홍교에서 바라 본 세연정



비홍교飛虹橋

윤위의 보길도지에는 '세연정이 못의 중앙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정자 서쪽, 제방 동쪽 겨우 한 간쯤의 넓이에 물이 고여 있으며, 중앙에는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 형상의 암석이 있다. 거북이 등에 다리를 놓아 누에 오른다고 기록하고 있어 이 다리를 비홍교라고 불렀다. 지금은 그 자리에 잡석을 쌓아 호안과 방단이 연결되어 있어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안내문으로 추측컨데 비홍교는 현재처럼 평면이 아니라 아취형 홍교임을 짐작할 수 있다.

 

 


서대西臺

회수담으로 계류가 유입되는 수입구 옆에 위치

현재는 나선형으로 세단이 남아 있으며, 그 규모는 축단의 한 변이 7.5m정도의 정방형이며, 그 높이는 2.2m에 이른다. 동대와 대칭을 이루고 있는 곳을 동대에서 행했던 군무 행위를 했던 곳으로 춤을 추며 돌면 정성에 오르도록 나선형 계단을 이뤘다.

 


동대東臺

세연정에서 바라보아 우측 판석보 옆에 위치.

장방형으로 높이 1.5미터이며 자연석으로 쌓아 올렸다.

어부사시사가 불리워지면 여러서람이 군무群舞를 즐겼던 곳이다

 


판석보

계류에 둑을 막아 세연지에 물을 가두기 위한 우리나라의 유일한 석조보로  일명 굴뚝다리이다.
양쪽에 판석을 세우고 그 안을 진흙과 강회를 섞어 채워 누수를 방지하고, 상부에 판석을 깔았다. 판석보는 물막이 시설이나 평소에는 옥소대로 오르기 위해 세연지를 건너는 다리역할을 하였고, 장마때는 물이 넘쳐 작은 폭포가 되었다고 한다.

 

 

오우가五友歌...윤선도


내 버디 몃치나 하니 水石(수석)과 松竹(송죽)이라
東山(동산)의 달 오르니 긔 더옥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삿 밧긔 또 더하야 머엇하리

구룸빗치 조타 하나 검기랄 자로 한다 <水>
바람 소래 맑다 하나 그칠 적이 하노매라
조코도 그츨 뉘 업기난 믈뿐인가 하노라

고즌 므스 일로 퓌며셔 쉬이 디고 <石>
플은 어이 하야 프르난 닷 누르나니
아마도 변티 아닐산 바회뿐인가 하노라

더우면 곳 피고 치우면 닙 디거  <松>
솔아 너난 얻디 눈서리랄 모라난다
九泉(구천)의 불희 고단 줄을 글로 하야 아노라

나모도 아닌 거시 플도 아닌 거시 <竹>
곳기난 뉘 시기며 속은 어이 뷔연난다
뎌러코 四時(사시)예 프르니 그를 됴하 하노라

쟈근 거시 노피 떠서 만물을 다 비취니 <月>
밤듕의 光明(공명)이 너만하니 또 잇나냐
보고도 말 아니 하니 내 벋인가 하노라

 

 

부용동에서 고산의 생활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작품 2편에서 발췌한 이야기로 글을 마친다.


가장유사事...작자미상

“고산은 낙서재에서 아침이면 닭울음 소리에 일어나 몸을 단정히 한 후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후 네 바퀴 달린 수레를 타고 악공들을 거느리고 석실이나 세연정에 나가 자연과 벗하며 놀았다. 술과 안주를 충분히 싣고 고산은 그 뒤를 따르는 것이 관례였다. 세연정에 이르면 연못에 조그만 배를 띄워 아름다운 미희들을 줄지어 앉혀 놓고 자신이 지은 「어부사시사」를 노래하게 하면서 찬란한 빛깔의 옷과 어여쁜 얼굴이 물위에 비치는 것을 감상했다. 때로는 정자 위로 악공들을 불러 올려 풍악을 울리게 했다.” ...답사여행의 길잡이.돌베개

 

 

보길도지甫吉島誌...1738년 윤위(고산의 5대 孫)

공은 늘 무민당에 거처하면서 첫닭이 울면 일어나 경옥주(瓊玉酒)한 잔을 마신 다음, 세수하고 단정히 앉아 자제를 보고, 자제들은 각기 배운 글을 진강(進講)하였다. 아침 식사 뒤에는 사륜거(四輪車)에 풍악을 대동하고, 혹은 곡수에서 놀고 혹은 석실(石室)에 오르기도 하였다가, 일기가 청화(淸和)하면 반드시 세연정으로 향하되, 곡수 뒷간 기슭을 거쳐 정성암(靜成庵)에서 쉬곤 하였다. 학관의 어머니가 오찬(午饌)을 갖추어 소거(小車)를 타고 그 뒤를 따랐다.


 정자에 당도하게 되면 자제들이 시립(侍立)하고 기희(妓姬)들이 모시는 가운데 못 안에 작은 배를 띄우고 남자 아이로 하여금 채색 옷을 입고 배를 일렁이며 돌게 하고, 공이 지은 어부수조(漁父水調])등의 가사로 완만한 음절에 따라 노래를 부르게 하면 당 위에서는 관현악(管絃樂)을 연주하게 된다.


 수명으로 하여금 동*서대에서 춤을 추게 하고 혹은 긴소매로 옥소암(玉箒岩)에서 춤을 추기도 하는데, 그림자는 못 속에 떨어지고 너울너울 춤추는 것이 음절에 맞았다. 혹은 칠암에서 낚시를 드리우기도 하고 혹은 동서도(東西島)에서 연밥을 따기도 하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무민당에 돌아와서 촛불을 밝히고 밤놀이를 한다. 공이 질병이나 걱정할 일이 없으면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다 한다. 이는 '하루도 음악이 없으면 성정(性情)을 수양하며 세간의 걱정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이다.

 

2017.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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