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풍기대風旗臺 영춘헌 뒤편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풍기대 상부에 구멍에 깃대를 꽂고 기를 달아 바람의 방향과 속도는 24방향, 바람의 세기는 8방향으로 측정하였다고 한다.
증보문헌비고 增補文獻備考 상위고 권3 중 "대궐 가운데에 풍기가 있는데, 예로부터 바람을 점치려는 뜻에서 창덕궁의 통제문 안과, 경희궁의 서화문 안에 돌을 설치하고 거기에 풍기죽을 꽂아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내용으로 보아 현존하는 경복궁과 창경궁의 풍기대는 1770년(영조 46)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궁궐에 세운 이런 풍기대는 조선왕조의농업에 대한 관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물로 여겨진다.
화강석을 다듬어 만든 풍기대 아래에 상을 조각한 대를 놓고, 그 위에 구름무늬를 양각한 팔각주를 세운 모양이다. 팔각주 맨 위의 중앙에는 깃대를 꽂은 구멍이 있고 그 아래 기둥 옆으로 배수 구멍이 뚫려 있다. 현재 풍기죽은 남아있지 않으나, <동궐도>에 따르면 삼지창을 맨 위에 꽂은 가늘고 긴 깃대를 풍기대의 구멍에 꽂았으며, 깃대에는 가늘고 매우 긴 깃발을 달았다. 풍기대에 '상풍간(相風竿)'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위키백과
앙부일구仰釜日晷 세종 때의 대표적인 해시계인 "앙부일구"의 이름은 반구형의 대접과 같은 모양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그 뜻을 쉽게 풀이하면 오목해시계이다. 마치 모양이 하늘을 우러르는(仰) 가마솥(釜) 같다 해서 ‘앙부일구’라 이름이 붙여졌다.‘일구’는 해시계를 뜻하는 한자말로 해석하면 해그림자라는 의미이다. 해시계를 통해 시간을 알기 위해서는 해그림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한자에서 그림자를 의미하는 ‘晷’는 구 혹은 귀로도 발음한다. 읽을 때 귀가 원래 원음이라고 하여 ‘일구’가 아닌 ‘일귀’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앙부일구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1434년(세종 16)이다. 이 앙부일구는 서울 혜정교와 종묘 남쪽 거리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혜정교와 종묘는 한양의 중심도로가 있는 곳으로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곳이었다. 세종은 앙부일구를 궁궐에만 설치하지 않고 백성들이 모두 볼 수 있게 했다. 세종 대에 제작된 앙부일구들은 임진왜란 때 모두 없어졌다가 17세기 후반 현종~숙종 때 다시 제작되었다. 이때 만들어진 것은 세종 때 만들어진 오목해시계와는 조금 다르다. 세종 때의 해시계가 서민들을 위한 공중용 시계였다면, 이때의 해시계는 대궐이나 명문 대가집에 설치하기 위해 청동으로 만든 고급스런 오목해시계였다. 역법도 시헌력으로 바뀌어 기존의 100각이 96각으로 바뀐 것이 제작에 반영되었다. 현존하는 앙부일구만도 여러 개가 된다. 휴대용 앙부일구까지 세면 10여 개가 남아있다.
우리나라 관람객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들린 후 사진을 담기 위해 한참을 기다렸지만 배낭을 맨 외국인 여자분은 오랫동안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 아닐까?
2016.11.05 |
'서울특별시 > 서울특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재동 백송 (0) | 2016.12.01 |
---|---|
서울...창경궁 관천대 (0) | 2016.12.01 |
서울...성종 태실.태실비 (0) | 2016.11.29 |
서울...창경궁 팔각칠층탑 (0) | 2016.11.29 |
서울...불교중앙박물관 특별전 (0) | 2016.1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