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하동군

하동...삼신동三神洞 각자.

임병기(선과) 2016. 8. 17.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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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6.11

화개골 칠불암,신흥사지 부도를 뵙고 왔었다.

귀가후 답사기를 준비하던 과정에 의신사지에 법해당 스님의 부도를 파악하였으며, 아울러 신흥마을에서 의신마을로 이어지는 선유동 계곡에 흥미를 유발하는 바위 각자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였으며, 이번 의신사지 답사길에 들렸다.

 

 

삼신동三神洞 각자

화개동천을 따라 올라가다가  의신골과 범왕골로 분기되는 신흥삼거리에서 범왕골로 향하는 길가 좌측  바위에 새겨져 있다.

 

 

삼신三神?

"중국의 삼신산 전설에 따르면, 삼신산들이 발해渤海의 동쪽으로 몇 억만리나 떨어진 곳에, 밑바닥이 없는 골짜기인 귀허歸墟)의 개울 속에 있는데, 그 산들은 주위가 3만리이고 꼭대기는 너비가 사방 9천리이며, 산과 산 사이가 7만리나 떨어져 있다. 그 정상에선인仙人들이 살고 있는 어전御殿이 있고 주변에 불로불사不老不死의 과일나무가 있다."(출처/위키백과)

 

즉 三神山은 도교에 등장하는 신화 속의 봉래․방장․영주(蓬萊山 方丈山 瀛洲山) 산을 말하며 우리나라에서는  금강산(봉래), 지리산(방장), 한라산(영주)을 말한다. 하지만 지리산은  두류산, 삼신산 ,방장산으로 알려져 있으며,  실제로 쌍계사는 삼신산三神山 雙磎寺, 대원사는 방장산方丈山大源寺으로 칭하고 있다. 그렇게 불리우는 연유는 잘 알지 못하지만 지리산이 신령스런 산이란 상징으로 여겨진다.

 

또한 우리 민속 신앙에는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아이의 출산과 수명과 질병 등을 관장하는 신이 삼신 할머니이다. 그러나 범왕골의 삼신동과의 관련성은 조사해보지 않았다.

 

 

바위 앞에 다소곳하게 객을 맞이하는 안내문이 눈에 들어온다.

고운 선생의 후손들이 세운 삼신동의 유래가 새겨져 있다.화개에는  삼신동 각자 뿐만 아니라 쌍계석문, 진감국사 비문,왕성초교 앞 범왕리 푸조, 세이암 각자 등 고운 선생이 등장하는 달빛에 물든 이야기가 많이 전해온다.

 

안내문에 따르면 삼신동 각자는 도교의 삼신산, 민속신앙의 삼신과는 무관하며 통일신라 하대에 창건하여 향화를 피웠던 3개 사찰에서 유래한 지명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삼신사三神寺는  조선시대 선현들의 지리산 유산기에도 자주 언급된 사찰로, 아래글은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서 삼신사에 대한 부분을 발췌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유몽인은 삼신사를 세속에서 귀신을 숭상하는 풍습에서 기인한 사찰이름으로 이해한 듯 보이며, 신선이 되었다는 고운의 일화를 낭설로 일축하였다.

 

유몽인의 『유두류산록』(1611년(광해 3) 3월 29~ 4월 8일)...출처/지리산 아흔아홉골 지리산 99

4월5일

이어 만 길이나 되는 푸른 절벽을 내려가 영신암(靈神庵)에 이르렀다. 여러 봉우리가 안을 향해 빙 둘러섰는데, 마치 서로 마주보고 읍을 하는 형상이었다. 비로봉은 동쪽에 있고, 좌고대는 북쪽에 우뚝 솟아 있고, 아리왕탑(阿里王塔)은 서쪽에 서 있고, 가섭대는 뒤에 있었다. 지팡이를 내려놓고 기다시피 비로봉 위로 올라갔지만 추워서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암자에는 차솥∙향로 등이 있었지만 살고 있는 승려는 보이지 않았다. 흰 구름 속으로 나무하러 갔는데 어디 잇는지 모르는 것인가? 아니면 속세 사람을 싫어하여 수많은 봉우리 속에 자취를 감춘 것인가? 청명하고 온화한 계절이어서 두견화가 반쯤 핀 것을 비로소 보았고, 산 속의 기후도 천왕봉보다는 조금 따뜻한 것 같았다.

영신암에서 40리쯤 내려갔다. 산세가 검각(劍閣)보다 험하였는데, 108번 굽이친 형세가 아니라 수직으로 떨어지는 비탈길이었다. 이 길을 따라 내려가는 것은 마치 푸른 하늘에서 황천으로 떨어지는 것 같다. 넝쿨을 부여잡고 끈을 당기며 이른 아침부터 저녁 무렵까지 걸었다. 푸른 나무숲 틈새로 내려다보니 컴컴하여 밑이 보이지 않았다. 이맛살을 찌푸리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손가락을 깨물며 정신을 차린 뒤에, 내려가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 대나무 숲을 헤치고 의신사(義神寺)를 찾아 들어가 묵었다. 밤에 두견새 우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고, 개울물 소리가 베갯머리에 맴돌았다. 그제야 우리 유람이 인간 세상에 가까워졌음을 알았다

 

의신사지 법해당 부도

 

4월 6일

신흥사(神興寺)에 이르니 동행한 사람들이 오래 전에 도착하여 누워 쉬고 있었다. 함께 시냇가 바위 위에 올랐다. 시냇물이 대일봉(大日峯)∙방장봉(方丈峯) 사이에서 흘러 나오는데, 우거진 숲이 하늘을 가리고 맑은 물이 돌을 굴렸다. 평평한 바위는 6~70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 바위 위에 ‘세이암(洗耳巖)’이라는 세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는데 누구의 글씨인지 모르겠다. 동네 이름이 삼신동三神洞인데, 이는 이 고을에 영신사(靈神寺)∙의신사(義神寺)∙신흥사(神興寺) 세 사찰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보아도 세속에서 귀신을 숭상하는 풍속을 알 수 있다.

비결서에 “근년에 최고운(崔孤雲)이 푸른 당나귀를 타고 독목교(獨木橋)를 지나는데 나는 듯하였다. 강씨 집의 젊은이가 고삐를 잡고 만류 하였지만, 채찍을 휘둘러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고 하였다. 또 “고운은 죽지 않고 지금도 청학동에서 노닐고 있다. 청학동의 승려가 하루에 세 번이나 고운을 보았다”라고 하였다. 이런 이야기는 믿을 수 없다. 그러나 가령 이 세상에 참다운 신선이 있다면, 고운이 신선이 되지 않았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고운이 과연 신선이 되었다면 이곳을 버리고 어느 곳에서 노닐겠는가?"

 

 

신흥사지 부도

 

 

삼신동에서 의신골 방향 왕정초교 에 접한 계류에도 많은 각자가 새겨져 있다.

하지만 피서 인파로 콩나물 시루가 된 계류에서 명문을 찾기란 쉽지 않을 듯했으며, 설상가상으로 식당을 이용하는 손님에게만 주차가 허용된 좁은 도로변 어디에도 주차공간은 없어 다음을 기약했다.

 

 

밤왕리 푸조나무.

비휴가 철에는 정문앞에 푸조나무가 있는 왕정초교에 주차 후 계류로 들어가면 세이암, 탁영대 등의 바위각자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신흥사지 부도도 왕정초교 뒤편 대나무 숲속에 있다.

 

세이암洗耳嵒

고운 최치원의 새긴 글로, 선생이 지리산을 주유하던 중 국왕이 사신을 보내 국정을 논의하자는 말을 듣고 이곳에서 귀를 씻었다 하여 세이암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탁영대濯纓臺

세이암 각자에서 상류쪽으로 50~60m 오른쪽 바위에 탁영대가 새겨져 있다. 탁영 김일손의 글씨라 전한다.

 

 

의신사지에서 법해당 부도를 뵙고 내려 오는 길에 단천마을 입구 삼거리에서 바위 각자를 찾았다.

하지만 사전에 사진으로 확인한 익숙한 전경임에도 뙤약볕에 땀을 쏫아내며 계류를 뒤졌으나 바위각자는 보이지 않았으며, 삼거리의 식당 주인 및 마을 사람들도 금시초문이란 표정이었다.

 

단천마을 입구의 비밀암호(?)각자는 마을 이장님과 통화한 식당주인의 개략적인 위치설명을 듣고 접근하여 주변 바위를 세밀히 뒤졌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데 다녀 온 후 자료를 검색해보니 내가 올라서서 살펴 본 바위에 비밀암호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아마 이끼로 덮혀 보이지 않았겠지만 허탈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선유동 계곡 정유석 바위 부근의 각자.

성자심지리.심자성지기性者心之理 心者性之器 성은 마음자리의 핵심이고 마음은 본성의 그릇이다

동초 김석곤(1874~1948)의 글씨로 전한다.

 

단천마을 입구

전최흥천명全崔興天命 각자

450년 전 썩은 세상을 뒤업고자하는 역성혁명의 암시하는 글자라는 설이 있다.

그 주인공이 서산대사라니...

 

부산일보(2005.01.05) 이상헌 기자의 글을 옮겨 왔다.

 

"경남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 단천(檀川,박달내) 마을 입구 단천계곡 안에 네 개의 이상한 글자가 새겨진 각자(刻字) 바위가 있다. . 얼핏 '전최흥명'으로 읽히지만 자세히 보면 한 두획이 없거나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예를 들어 첫 글자는 전(全)자처럼 보이지만 들입(入)자가 아니라 사람인(人)자다. 넷다 옥편에는 나오지 않는 글자들. 누가 왜 이런 글자를,무슨 의도에서,하필 이곳에 새겼을까.


손병욱 경상대 윤리교육과 교수는 '단군학 연구 11집'에 발표한 '박달내 각자바위의 함의와 그 주인공에 대한 고찰'을 통해,네 글자에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고 있다.
그는 이 글자를 전최흥천명(全崔興天命)으로 읽는다. 전주 최씨 흥명,즉 최흥명이란 이름. 이 글자를 뜯어 읽으면 또 다른 의미가 보인다.

 

앞의 두 글자는 인왕(人王) 선왕(仙王)으로 읽힌다. 인왕 선왕은 단군의 다른 이름. 단군이 천명을 흥성하게했다는 역사적 의미와 함께 앞으로 단군이 천명을 중흥할 것이란 예언적 의미를 갖는다. 전주 최씨 흥명은 과거에 단군이 그랬듯 이 시대의 단군으로 앞으로 천명을 중흥시키고야 말겠다는 예언적 도참이 된다. 한자 이름 최흥명의 획수와 모양새를 암호처럼 의도적으로 변형시킴으로써 많은 의미를 담고자 했던 것. 이를 주역으로 풀면 '산풍고괘(山風蠱卦)'라는 괘사가 나온다. 이 괘사는 지배층이 부패하고 사회질서와 기강이 무너져 백성이 도탄에 빠져 신음하고 있다는 시대인식을 바탕으로 개벽에 준하는 대변화를 촉구하는 내용이다.


각자 바위의 입지가 단군 혹은 태백산과 관련있는 박달(삼신봉)에서 발원한 계곡인 박달내 안에 있다는 점 또한 의미심장하다. 인근에는 삼신봉,박달재,박달샘,삼신리 등 관련 지명들이 수두룩하다. 공교롭게도 이 곳에서 칠불사와 쌍계사(쌍계사도 삼신산 쌍계사다)까지의 직선거리가 정확히 똑같아 이 곳이 이등변 삼각형의 꼭지점을 이룬다. 유학자인 최치원의 자취가 남아있는 쌍계사의 유(儒),칠불사의 불(佛)과 함께 이 곳을 선(仙)의 상징터로 보면 각각 유불선(儒佛仙)을 대표하는 입지다.


손 교수는 17세기 고승이었던 서산 휴정을 각자의 주인공으로 추정한다. 단군에 대한 남다른 의식을 가졌고,이 일대를 중심으로 지리산에서 18년 동안 머물렀던,속성(俗姓)이 전주 최씨인 서산대사가 기록을 남겼을 것이란 추정. 각자에 나타난 시대관이 남명 조식의 그것과 상통한다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남명과 교유했던 서산일 가능성이 높다. 사명 유정,기허 영규,뇌묵 처영 등 임진왜란 의병장들이 모두 그의 제자들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실질적으로 오랫동안 역성혁명을 위한 무장을 준비해왔을 것임을 미뤄 짐작하게 한다.

 


손 교수는 '각자의 의미가 제대로 해독됐다면 각자 바위 그 자체만으로도 존재의의가 충분하다'며 '지방문화재로 지정해 이 일대를 보존,활용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신사지와 관련된 자료 준비중에 인지한 바위각자.

지금까지는 큰 관심을 갖지 않았었는데. 많은 이야기를 함축한 스토리의 보고이었다.

향후에는 문화유산 답사 동선에 자주 포함되는 답사 목록이 될 것 같다.

 

201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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