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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하동군

하동...의신사지 부도

by 임병기(선과) 2016.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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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답사의 주포인터인 의신사지 법해당(?) 부도를 뵙기 위해 의신마을에 도착하였으나 피서인파로 뙤약볕에 주차공간 찾기가 부도 찾기보다 더 어렵다. 도로변에 불법 주차 후 동리 아주머니에게 탐문하였더니 개략적인 위치와 부도를 잘 아는 분의 집을 알려주었다. 부도는 길을 따라 올라 가다가 우측으로 난 희미한 길(위사진 상단 소나무 아래)로 들어서면 10여미터 전방에 위치한다.

 

 

부도로 향하는 의신마을 마지막 집(의신길 26-11)에서 부도 까지는 넉넉잡아 15분 미만의 거리이다. 사진 아래편 경작지 위쪽 우측으로 진입하는 길이 있었지만, 주민이 안내한 길을 택했다.

 

 

소나무 아래를 통과하자 가시덤불이 가로막아 제거 후 진입하였다.

의신사지 법해당法海堂 부도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나 역시도 그렇게 인지했고 여기저기 자료,답사기에 법해당으로 표기하였다.결론적으로는 나의 치밀하지 못한 성정으로 인한 오류이었다. 하지만 그냥 두련다, 부끄러움은 부끄러움을 반성 할 때 부끄럽지 않은 법이다.

 

디지털하동문화대전의 의신마을 소개글 이다.

"의신마을은 처음에 마을 터에 있었던 의신사 등과 같은 여러 암자들이 생기면서 사하촌으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의신사 혹은 의신암은 17세기 초반까지 있었던 것으로 기록에 전해지며, 1611~1680년 사이의 어느 때에 폐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신마을에는 의신사 외에도 대승암, 고대승, 상대승, 동암 등의 절이 있었다.

의신사에 대해 알 수 있는 구체적인 기록은 남효온(南孝溫)[1454~1492]의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와 김일손(金馹孫)[1464~1498]의 「두류기행록(頭流紀行錄)」[혹은 「속두류록(續頭流錄)」]에 보인다. 남효온은 1487년(성종 18) 10월 1일에 의신암을 다녀갔는데, 그가 기록한 내용을 살펴보면, “절 서쪽은 대나무 숲으로 가득하였고, 방앗간과 뒷간도 대숲 사이에 있었다. 법당에 금칠한 불상 한 구가 있었는데 승려가 의신조사라고 하였다.”고 적고 있다.

한편 김일손은 1489년(성종 20) 4월 25일에 의신사를 기행했는데, “절은 평지에 있었으며, 절의 벽면에는 김언신·김미라는 이름이 쓰여 있고, 주지 법해(法海)와 30여 명의 승려가 정진하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이러한 15세기 의신사의 사실을 증명하듯이 현재에도 의신마을 뒤편의 의신사로 추정되는 옛터에는 석종 모양의 높이 175㎝의 법해당(法海堂) 부도가 있다.

양대박(梁大樸)[1543~1592]도 「두류산기행록(頭流山紀行錄)」에서 1560년(명종 15)에 의신사를 돌아보았다고 했으며, 유몽인(柳夢寅)[1559~1623]도 1611년(광해군 3) 4월 5일에 의신사를 다녀간 후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에서 의신사 주지 옥정과 시를 읊었던 사실을 적고 있다. 한편 송광연이 1680년(숙종 6) 윤8월에 지리산을 기행하고 적은 「두류록(頭流錄)」에 의신사 옛터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무렵 이미 의신사가 폐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쉽게도 디지털 하동문화대전 탑과 부도 목록에는 지리산 화개골의 대부분 부도(칠불사,신흥사지.의신사지, 사리암지 등등)를 누락시켰으며 유일하게 쌍계사 진감국사 부도는 등재되어 있다. 그로 인해 이 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리산 산행기 검색중 또다시 찾아야 할 부도 1기를 발견했다. 이거야 원!!!

 

 

방형대좌위에 탑신과 보주가 하나로 조성된 석종형 부도이다.

법해당法海堂 부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석

 

 

보주

 

 

O每堂.탑신에 새겨진 명문

맨위 글씨는 확인 되지 않고, 중앙의 글씨도 부수가 훼손되어 해海로 단정 지을 수 없다. 즉 온건한 글씨는 당堂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디지털하동문화대전, 하동문화원의 하동의 문화유적 등에 비롯 각종 자료에 법해당法海堂 으로 공인(?)되었을까?

 

1489년 탁영 김일손의 속두류유록續頭流錄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계축에 산 능선을 타고 서쪽으로 가는데 능선 북쪽은 함양(咸陽) 땅이요, 능선 남쪽은 진주(晉州) 땅이다.
한 가닥 나무꾼의 길이 함양과 진주를 가운데로 나눠 놓은 셈이다.

방황하여 오래도록 조망하다가 다시 나무 그늘 속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모두 토산(土山)이요, 길이 있어 찾아갈 만하다.
매를 잡는 자가 많아서 길이 이뤄져 상원사(上元寺)나 법계사(法界寺)의 길처럼 심하지는 않다.

산마루로부터 급히 내려가서 정오에 의신사(義神寺)에 당도하면 절이 평지에 있고,
절벽에는 김언신(金彦辛) ㆍ 김미(金楣)의 이름이 씌어져 있다.

거주승(居住僧) 30여 명이 역시 정진(精進)하고 있으며, 대밭과 감나무 밭이 있으며,
채소를 심어서 밥을 먹으니 비로소 인간의 세상임을 깨닫겠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청산을 바라볼 때, 벌써 연하(煙霞)를 이별하고 원학(猿鶴)에게 사과하는 회포를 달게 된다.
요주(寮主) 법해(法海)는 무던한 중이었다.

잠깐 쉬고 드디어 떠나는데 높은 데를 오르기 싫어서 이에 시냇물 따라 흰 돌을 밟고 내려가니,
동부(洞府)가 맑고 깊숙하여 마음을 즐겁게 한다.
그래서 혹은 지팡이 꽂아 놓고 노는 고기를 구경하기도 했다." ...원문해석 출처/지리산 99. 엉겅퀴님

 

의신사에는 30여명의 스님이 정진중이었으며 "요주(寮主) 법해(法海)는 무던한 중이었다."내용이 있다. 

즉,김일손의 속두류유록이 아니고는 법해스님의 법명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인지하는대로 스님의 법명과 부도의 당호를 같이 사용하는 작례는 보지 못했다.

다시 말해 속두류유록에 등장하는 의신사 주지 법해스님이 부도의 주인공 법해당이라고 확신할 근거는 없으며, 오하려 다른 스님의 부도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화개동천.

선유동 계곡의 바위 각자.

그리고

사리암의 부도

 

단풍이 곱게 내려 앉으면 찾아 뵈리라.

 

201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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