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산 문수사. 신라 혜공왕(재위: 765∼780) 때 창건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하며, 이후의 사적은 전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1613년 도욱(道旭)이 중창하였으며, 1809(순조 9)에는 광선(光善)이 중창했다. 1936년 남성(南星)이 중수한 뒤 꾸준히 불사를 진행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전각은 비로전,종무소가 있다. 문수사에 부도비가 전하는 풍담대사에 얽힌 일화가 전한다. 풍당은 전국을 돌며 불교를 포교하는 수행승이었다. 어느날 김포군 문수골에 왔을 때, 세 사람이 나타나서 문수사 승려들을 깨우쳐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들을 따라 절에 가보니 과연 승려들의 생활이 엉망이었다. 이에 풍담은 이곳에 머물며 승려들을 깨우치고 문수사를 대찰로 키웠다고 한다
문수산 휴양림 주차장에에서 산길 40여분 소요된다. 오르는 길은 평탄하며, 문수산성 홍예문에서 문수사 까지는 제법 경사가 심한 내리막길이다.
문수산성 김포시에서 가장 높은 문수산의 험준한 산줄기에서 시작해 해안지대를 연결하고 있다. 강화의 갑곶진과 마주보면서 강화도 입구를 지키던 산성으로 1694년(숙종 20)에 쌓고, 1812년(순조 12)에 대규모로 중수했다.산성 안에 문수사라는 절이 있어, 이로부터 문수산성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성벽은 다듬은 돌로 튼튼하게 쌓았고, 그 위에 여장을 둘렀으며, 성문은 취예루·공해루 등 3개의 문루와 3개의 암문이 있었다. 이 가운데 취예루는 갑곶진과 마주보는 해안에 있었으며 강화에서 육지로 나오는 관문 구실을 했다. 1866년 9월 8일 프랑스 함대가 6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강화성을 점령한 후, 동년 9월 18일 문수산성을 침공하여 올 때 문수산성에는 봉상시사 한성근이 대원군의 명을 받고 성을 수비하여 프랑스군과 싸웠으나 결국 무기와 병력의 열세로 후퇴하고 말았다. 홍예문
비로전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신 전각으로 협소한 부지로 인해 석탑을 측면에 세웠다
삼층석탑 3층 옥개석과 탑신, 상륜부가 결실되었다. 우선. 불대좌형 석탑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경우에는 대좌위의 중대석과 갑석은 다른 석탑의 부재로 추측된다. 두번째는, 하단의 기단부는 석불 대좌로 추측한다. 인터넷의 문수사 글에도 석불대좌로 등재되어 있다. 하지만 정확한 정리는 되지 않은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대좌에 비해 석탑이 작아 석불대좌로 보고싶다. 또한, 석탑은 자연 암반위에 조성된 고려초의 비보석탑으로 추측한다.
자연 암반위에 복련을 새긴 하대석, 중대석에는 큼직한 안상을 새겼고,상대석에는 앙련을 조식하였다.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 중대석과, 탑신석에는 양우주를 모각하였다 갑석 상부에는 탑신괴임을 조출하였으며 옥개석 낙수면 물매는 급하지 않고, 처마는 상하 동시에 반전 되었다. 옥개받침은 깊게 3단으로 새겼고 추녀가 표현되어 있다.
갑석 옥개석 옥개석 처마의 반전 옥개석 층급과 추녀
부여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오층석탑 옥개석 하부 처리가 거의 흡사하다.
비로전 앞을 통과하면 풍담대사 부도.부도비가 있다.
문수사에 있는 풍담(楓潭)대사 의심(1592~1665년)의 비문이다. 의심은 서산의 제자인 편양언기의 수제자로 이후 그의 문도가 매우 번성하여 서산문파 중에서도 가장 많은 문도를 이룬 문파이다. 그런데 이 비문은 고승의 생애를 기록하는데 매우 불충한 면을 보인다. 비문은 자신과 풍담과의 관계를 길게 서술하고 14세에 묘향산 순에게 출가하여 원각과 화엄을 공부하고 사람들을 깨치게 하여 불이문이 첫째자리임을 말하고는 사리 5과를 봉안한 탑을 통진 문수사에 세웠는데 나이 74세라는 것이 전부이다. 생몰년도 기록하지 않고 조선 후기 승비에서 중요하게 여기던 법맥 계승도 말하지 않았다. 비문은 현종 9년(1668년)에 조경(1586~1669년)이 짓고 이하진(1628~1682년)이 썼으며 이서우(李瑞雨)가 전액을 썼다. 통진(通津) 문수사(文殊寺) 풍담대사비(楓潭大師碑) 풍담대사비(楓潭大師碑)(전자(篆字)로 씀)
* 출처...'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gsm.nricp.go.kr)'
그런데 풍담대사의 부도,부도비는 4곳에 전한다. 1668년 대사가 입적한 금강산 표훈사 1668년 김포 문수사 1681년 묘향산 보현사 1692년 해남 대흥사에 세웠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 1.표훈사는 대사가 입적한 곳이며 2.문수사 비문에는 어떤 단초도 없지만 대사의 고향이 김포 통진이며 문수사에 오래 머무른 연유로 보인다.(개인적인 견해임) 3.보현사에는 비문에 "선사의 전법이 묘향산에서 비롯되었다 하여 다시 보현사에 비를 세운 것이 이 비이다"라는 내용이 있어 표훈사에서 분사리 했음을 알 수 잇다. 출처/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보현사에 있는 풍담(楓潭)대사 의심(1592~1665년)의 비문이다. 의심은 서산의 제자인 편양언기의 수제자로 이후 그의 문도가 매우 번성하여 서산문파 중에서도 가장 많은 문도를 이룬 문파이다. 의심의 비는 이 비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금강산, 보개산, 대둔산과 문수사에도 세웠다. 의심은 14세에 묘향산 성순에게 출가하여 원철에게 공부하고 편양을 만나 법을 잇는 후계자가 되었다. 심인을 얻은 후 기암(奇巖), 소요(逍遙), 호연(浩然), 벽암(碧巖) 등 여러 스승을 두루 찾아다니면서 배우고 종풍을 진작하여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편양의 유언에 따라 화엄과 원각의 해석을 정리하였다. 당대의 이름난 문사들과도 폭넓은 교류를 가졌고, 문도가 크게 번성하여 가르침을 받은 이가 5백여 명이고 이름이 알려진 이가 70여 인이나 되었다. 선사의 전법이 묘향산에서 비롯되었다 하여 다시 보현사에 비를 세운 것이 이 비이다. 비문은 숙종 7년(1681년)에 조종저(趙宗著)가 짓고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가 쓰고 낭원군(朗原君) 이간(李偘)이 전액을 썼다. 4.해남 대흥사에 부도,부도비가 세워진 배경도 비문에 구체적으로는 없지만 서산-언기-풍담으로 이어지는 선맥을 이은 사찰이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아래의 대흥사 홈페이지에서도 그 단초들이 있다.부도는 1692년 표훈사에서 분사리한 것으로 추측된다(개인적인 견해임) 출처...대흥사 홈페이지 조선시대 선풍을 중흥시킨 서산대사를 받드는 대흥사는 억불시대인 조선조에 뛰어난 스님들을 배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조선 중기의 스님. 호는 풍담(楓潭), 성은 문화 유(柳). 통진(通津) 출신이다. 아버지는 유화춘 (柳華春), 어머니는 정(鄭)씨이다.
풍담대사 부도 팔각원당형으로 , 방형 지대석 위에 8각 기단을 올렸다. 기단 하대석에는 각면에 안상을 새기고 상부에 복련을 조식하였다. 우주가 모각된 팔각 중대석에는 특별한 문양이 없다 상대석 하부에는 앙련을 두고,상부에는 면마다 2개 안상을 표현했다. 원구형 탑신위에 옥개석은 뾰족하여 낙수면 물매가 깊고, 처마의 반전은 부드러우며 하부에는 3단 층급받침과 추녀를 새겼다. 상륜부에는 복발, 3단 보륜, 연봉형 보주가 완형으로 남아 있다.
지대석 하대석.중대석 상대석 옥개석 하부 옥개석 상륜부
멀리 강화대교가 아득하다. 15년만에 찾은 강화 다시 인연 지을 수 있으려나.? 2016.1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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