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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김포시

김포...문수사 삼층석탑.풍담대사 부도,부도비

by 임병기(선과) 2016.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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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산 문수사.

신라 혜공왕(재위: 765∼780) 때 창건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하며, 이후의 사적은 전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1613년 도욱()이 중창하였으며, 1809(순조 9)에는 광선()이 중창했다. 1936년 남성()이 중수한 뒤 꾸준히 불사를 진행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전각은 비로전,종무소가 있다.


문수사에 부도비가 전하는 풍담대사에 얽힌 일화가 전한다.

풍당은 전국을 돌며 불교를 포교하는 수행승이었다. 어느날 김포군 문수골에 왔을 때, 세 사람이 나타나서 문수사 승려들을 깨우쳐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들을 따라 절에 가보니 과연 승려들의 생활이 엉망이었다. 이에 풍담은 이곳에 머물며 승려들을 깨우치고 문수사를 대찰로 키웠다고 한다


 

문수산 휴양림 주차장에에서 산길 40여분 소요된다.

오르는 길은 평탄하며,

문수산성 홍예문에서 문수사 까지는 제법 경사가 심한 내리막길이다. 


 

 

문수산성

김포시에서 가장 높은 문수산의 험준한 산줄기에서 시작해 해안지대를 연결하고 있다. 강화의 갑곶진과 마주보면서 강화도 입구를 지키던 산성으로 1694년(숙종 20)에 쌓고, 1812년(순조 12)에 대규모로 중수했다.산성 안에 문수사라는 절이 있어, 이로부터 문수산성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성벽은 다듬은 돌로 튼튼하게 쌓았고, 그 위에 여장을 둘렀으며, 성문은 취예루·공해루 등 3개의 문루와 3개의 암문이 있었다. 이 가운데 취예루는 갑곶진과 마주보는 해안에 있었으며 강화에서 육지로 나오는 관문 구실을 했다.


1866년 9월 8일 프랑스 함대가 6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강화성을 점령한 후, 동년 9월 18일 문수산성을 침공하여 올 때 문수산성에는 봉상시사 한성근이 대원군의 명을 받고 성을 수비하여 프랑스군과 싸웠으나 결국 무기와 병력의 열세로 후퇴하고 말았다.


 홍예문

 

비로전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신 전각으로

협소한 부지로 인해 석탑을 측면에 세웠다


 

삼층석탑

3층 옥개석과 탑신, 상륜부가 결실되었다.

우선. 불대좌형 석탑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경우에는 대좌위의 중대석과 갑석은 다른 석탑의 부재로 추측된다.

두번째는, 하단의 기단부는 석불 대좌로 추측한다.

인터넷의 문수사 글에도 석불대좌로 등재되어 있다.


하지만 정확한 정리는 되지 않은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대좌에 비해 석탑이 작아 석불대좌로 보고싶다.

또한, 석탑은 자연 암반위에 조성된 고려초의 비보석탑으로 추측한다.


 

자연 암반위에

복련을 새긴 하대석, 중대석에는 큼직한 안상을 새겼고,상대석에는 앙련을 조식하였다.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 


중대석과, 탑신석에는 양우주를 모각하였다

갑석 상부에는 탑신괴임을 조출하였으며

옥개석 낙수면 물매는 급하지 않고, 처마는 상하 동시에 반전 되었다.

옥개받침은 깊게 3단으로 새겼고 추녀가 표현되어 있다.

 

갑석 

옥개석 

옥개석  처마의 반전

옥개석 층급과 추녀 

 

 

부여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오층석탑 옥개석

하부 처리가 거의 흡사하다.

 

 

 


비로전 앞을 통과하면 풍담대사 부도.부도비가 있다.

 

 


() (1592~1665) . . . 14 5 74 . . 9(1668) (1586~1669) (1628~1682) () .


통진(通津) 문수사(文殊寺) 풍담대사비(楓潭大師碑)



풍담대사비(楓潭大師碑)(전자(篆字)로 씀)
유명조선국불교대종사(有明朝鮮國佛敎大宗師) 풍담당(楓潭堂) 비명(碑銘)
숭록대부 전판중추부사 조경(趙絅) 지음
통훈대부 전행사헌부지평 이하진(李夏鎭) 글씨 씀
통훈대부 행성균관전적 이서우(李瑞雨) 전자(篆字) 씀


유교는 속세 안에 노닐고 불교는 세간 밖에 노닌다. 밖과 안이 서로 미치지 않는 것은 도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마땅히 도가 이미 같지 않은데 어찌 서로 의논함이 있겠는가? 그렇지만 예로부터 이치에 통달한 사람과 큰 현인은 세간 밖의 인물과 결탁하여 교류하였다. 도연명(淵明)과 혜원(慧遠), 한유(昌黎: 韓愈)와 태전(太顚), 주자(朱夫子)와 도겸(道謙)이 그러하였다. 나 또한 풍담(楓潭)과는 옛 현인이 교유한 도를 따르고 쫒았으니 속인과 더불어 말하기 어렵다. 지금 풍담공의 문인 정원(淨源), 시철(時哲)이 대사의 종풍(宗風)을 드날리고자 하여 그 행록을 갖추어 내 집 문에 이르렀으니 뜻이 매우 지극하다. 내가 말하기를, ‘많지 않은 기록이지만 내 어찌 풍담이 신의 있는 노인임을 모르겠는가? ▨▨에 쏟아 낼 수 없다. ▨子 가 덕 있는 성품을 막는 것이두렵구나’ 하였다. 기록은 위의 글에 있다. 풍담공을 백운사(白雲伽藍)에서 만났는데 그 모습을 눈여겨보니 공경하고 두려워할 만하며 그 말을 귀담아 들으니 마음 씀이 깊었다. 이어 계승함에 연원이 9개가 있으니 비로소 총령(葱嶺)의 적전임을 알았다. 풍담은 사양하였지만 할 수 없었다. 그 뒤에 바리를 돌려 풍악산으로 돌아가면서 나에게 율운(律韻) 한 수로 답하였는데 매우 맑고 우아하였고 글자 또한 가늘고 힘이 있었다. 지금 행록을 보니 입적을 맞아 지은 게송 한 수가 있는데 ‘다만 한바탕 터지는 빙그레한 웃음뿐만’은 아니었다. 뛰어나도다! 뛰어나도다!


풍담은 원래 문화(文化) 류(柳)씨로 자손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는데 중서사인(中書舍人) 사근(仕根)이 그 고조부이다. 14세가 되자 묘향산(玅香)에 몰래 들어가 순(淳)장로를 따라 머리를 깎았다. 아버지가 그만두게 하고 애석히 여겼지만 붙잡을 수 없었다. 이 비록 유교(名敎)에 죄를 얻은 것이지만 그가 절(雪山)을 부러워함은 타고난 본성이었다. 해동의 명산에 거의 다 석장을 세웠고 5백여 승려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원각(圓覺)』의 깊고 오묘함과 『화엄(華嚴)』의 넓고 광대함이 번뇌의 바다에 스며들어 영향을 미쳤고, 붓 끝을 능숙히 다루어 나중에 깨닫는 이를 깨치게 하니 나그네가 돌아갈 데를 얻는 것과 같았다. 이는 차별이 없는 불이문(不二門) 중 첫 번째 지위이니 6조(六祖: 慧能)가 가령 일어난다 해도 풍담공의 옆 자리를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 사리 5알은 다만 풍담에게 부수적인 일일 뿐이다. 내 풍담공을 생각함에 지금까지 탄식하고 아깝게 여기니, 하늘이 풍담을 허여한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끝내 머리를 돌리고 와서 유학(游夏之學: 孔子의 제자 子游와 子夏의 학문)을 맡지 않았고 당대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가슴을 치며 돌아다보니 곧 불살라져 뒤얽힌 몸과 잘게 조각난 머리뼈를 거두어 3척의 부도에 넣었다. 장차 어찌 할 것인가? 아아! 탄식하며 이 글을 짓는다. 선사의 세수는 74세이고 법랍은 60세이며 통진(通津) 비아산(比兒山)에 탑을 세우니 문수사(文殊寺)의 북쪽이다. 바로 선사가 묻힌 땅이로다.



무신년 10월 일 세움 


* 출처...'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gsm.nricp.go.kr)'


 

 

 


그런데

풍담대사의 부도,부도비는 4곳에 전한다.

1668년 대사가 입적한 금강산 표훈사

1668년 김포 문수사

1681년 묘향산 보현사

1692년 해남 대흥사에 세웠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


1.표훈사는 대사가 입적한 곳이며

2.문수사 비문에는 어떤 단초도 없지만 대사의 고향이 김포 통진이며 문수사에 오래 머무른 연유로 보인다.(개인적인 견해임)

3.보현사에는 비문에 "선사의 전법이 묘향산에서 비롯되었다 하여 다시 보현사에 비를 세운 것이 이 비이다"라는 내용이 있어 표훈사에서 분사리 했음을 알 수 잇다.


출처/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보현사에 있는 풍담(楓潭)대사 의심(1592~1665년)의 비문이다. 의심은 서산의 제자인 편양언기의 수제자로 이후 그의 문도가 매우 번성하여 서산문파 중에서도 가장 많은 문도를 이룬 문파이다. 의심의 비는 이 비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금강산, 보개산, 대둔산과 문수사에도 세웠다. 의심은 14세에 묘향산 성순에게 출가하여 원철에게 공부하고 편양을 만나 법을 잇는 후계자가 되었다. 심인을 얻은 후 기암(奇巖), 소요(逍遙), 호연(浩然), 벽암(碧巖) 등 여러 스승을 두루 찾아다니면서 배우고 종풍을 진작하여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편양의 유언에 따라 화엄과 원각의 해석을 정리하였다. 당대의 이름난 문사들과도 폭넓은 교류를 가졌고, 문도가 크게 번성하여 가르침을 받은 이가 5백여 명이고 이름이 알려진 이가 70여 인이나 되었다. 선사의 전법이 묘향산에서 비롯되었다 하여 다시 보현사에 비를 세운 것이 이 비이다. 비문은 숙종 7년(1681년)에 조종저(趙宗著)가 짓고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가 쓰고 낭원군(朗原君) 이간(李偘)이 전액을 썼다.


4.해남 대흥사에 부도,부도비가 세워진 배경도 비문에 구체적으로는 없지만 서산-언기-풍담으로 이어지는 선맥을 이은 사찰이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아래의 대흥사 홈페이지에서도 그 단초들이 있다.부도는 1692년 표훈사에서 분사리한 것으로 추측된다(개인적인 견해임)


출처...대흥사 홈페이지

조선시대 선풍을 중흥시킨 서산대사를 받드는 대흥사는 억불시대인 조선조에 뛰어난 스님들을 배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모두 서산대사의 문도와 법손인 이들 스님들은 조선 후기의 대흥사가 불교계의 중심 사찰의 하나였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서산대사의 법맥을 이어받은 문도들은 크게 4파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송운 유정계와 편양 언기계, 소요 태능계, 정관 일선계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대흥사에 있었던 13명의 대종사와 13명의 대강사는 법손이 가장 번성했던 편양 언기계와 소요 태능계 스님들이었다.
이들 13대종사는 아래와 같다.

풍담 의심(楓潭 義諶 )1592~1665

조선 중기의 스님. 호는 풍담(楓潭), 성은 문화 유(柳). 통진(通津) 출신이다. 아버지는 유화춘 (柳華春), 어머니는 정(鄭)씨이다.
1607년(선조 40) 16세에 성순(性淳)스님에게 출가하여 원철(圓徹)스님에게 계를 받고 공부했으며, 뒤에 편양 언기(鞭羊 彦機)선사에게서 법을 받았다.


청허 휴정(淸虛 休靜)대사의 문하인 기암 법견(奇巖 法堅)스님과 소요 태능(逍遙 太能)스님 등을 찾아 보고, 금강산과 보개산 등에서 언기선사의 부탁으로 <화엄경>, <원각경> 등 대승경전을 연구하여 그 틀린 점을 교정해서 음석(音釋)을 지어 후진들을 가르쳤다.
1665년(현종 6) 3월 8일 금강산의 정양사(正陽寺)에서 나이 74세, 법랍 58년으로 입적했다.


해남 대흥사에 비석과 부도가 있다. 많은 제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상봉 정원(霜峰 淨源), 월담 설제(月潭 雪霽), 월저 도안(月渚 道安), 보당 준기(寶幢俊機)스님 등이 뛰어났다.

 


풍담대사 부도

팔각원당형으로 , 방형 지대석 위에 8각 기단을 올렸다.

기단 하대석에는 각면에 안상을 새기고 상부에 복련을 조식하였다. 우주가 모각된 팔각 중대석에는 특별한 문양이 없다

상대석 하부에는 앙련을 두고,상부에는 면마다 2개 안상을 표현했다.

원구형 탑신위에 옥개석은 뾰족하여 낙수면 물매가 깊고, 처마의 반전은 부드러우며 하부에는 3단 층급받침과 추녀를 새겼다.

상륜부에는 복발, 3단 보륜, 연봉형 보주가 완형으로 남아 있다.

 

지대석 

하대석.중대석 

상대석 

옥개석 하부 

옥개석 

 상륜부

  

 

 

 


멀리 강화대교가 아득하다.

15년만에 찾은 강화

다시 

인연 지을 수 있으려나.?


201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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