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김천시

김천...수도산 수도사

임병기(선과) 2016. 10. 1.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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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사.

청암사와 더불어 늘 함께 뵈었던 가람이다.

 

오늘은

그간 뵙지 못했던 수도선원 뒤편 토굴 입구 부도를 뵐 목적으로 참배하였다.

 

 

수도암 사적은 전하지 않으나 청암사 사적비에 의하면 신라 헌안왕 3년(859년) 도선국사가 쌍계사, 청암사, 수도암은 같이 창건했다고 하였다. 그후의 사적은 남아있지 않으나 조선 제 11대 중종 을사년(1545) 상거선사께서 중창하였다. 또한 인조 27년(1649) 벽암선사께서 중흥하였고, 고종 31년 동학혁명으로 일부 암자가 소실된 것을 6년 후 광무 4년(1893) 포응선사께서 다시 복원하였다. 그 이후 경허(鏡虛)선사, 한암(寒岩)선사,효봉(曉峰)선사, 구산(九山)선사를 비롯 많은 큰스님들이 주석하셨다.

 

한국전쟁이전에 우봉스님이 오시면서 상좌인 상호스님을 원주 보게 하다가 1961년까지 주지를 맡으셨다. 이후 법희스님(61~62), 우룡스님(62~64), 등각스님(65~67) ,법경스님(68~69), 법전스님(69~84)이후 상좌스님들이 소임을 돌아가며 보다가 2010년 3월부터 원인스님이 법전스님으로부터 선원장 소임을 승계 받아 수도암에 주석하고 있다.

 

현재 수도암은 크게 대적광전 영역의 대적광전과 약광전, 관음전 영역, 선원영역으로 크게 구획되어 있으며, 부속암자로써 정각(正覺) ,서전(西殿) ,낙가(洛伽). 한적(閑寂) 등이 있다...수도사 홈에서 발췌

 

 

수도암의 풍수형국은 옥녀직금형女織錦形, 즉 옥녀가 비단을 짜는 형국이라고 한다.

창건주 도선국사는 이곳을 찾아 터를 발견하고 만대의 수도인이 나올 곳이라고 하며 기뻐서 7일간 춤을 추었다고 한다.

 

위 사진 3장을 연결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멀리 보이는 가야산  상봉上峰은 실을 거는 끌개 돌이 되고, 뜰 앞의 동,서 삼층석탑은 베틀의 두 기둥이 되며, 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불이 봉안된 자리는  옥녀玉女가 앉아서 베를 짜는 자리라고 한다.또한 선원에는 실을 감는 도토마리석이 있으며, 또 북실을 담그는 물이 있어야 하므로 옛날 관음전 마당에는 비교적 큰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연화봉.

수도암에서는 가야산 정상을 연화봉으로 칭한다고 한다. 연화봉 앞에는 일자봉이 있어 연화봉을 받쳐주고 있다. 연화봉은 공덕을, 일자봉은 평등한 지혜를 상징한다고 하며, 이런 연유로 수도암은  지혜와 덕을 현출하고 있다고 한다.

 

연꽃은

눈 내리는 겨울에는 백련, 단풍 드는 가을에는 홍련, 녹음지는 여름에는 청련, 꽃피는 봄에는 황련, 그렇게 사시사철 지지않은 모습으로 피어 난다. 조선후기 우니나라 사찰을 순례한 정시한 선생은 1686년 4월 3일  백련을 보았고 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조선후기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 1625~1707) 선생은 산중일기에서 수도사의 절경과 스님들의 일상을 기록하였다.

 

1686년 4월 4일

"두루 산세를 보니 사방에 터진 곳이 없었다. 지세는 높고 드넓은데, 절터는 평평하고 발라 가야산을 안산으로 삼고 있었다. 봉 머리엔 흰 구름이 감겼다 펴지며 변화가 무상하였다. 앞문을 활짝 열어 젖치고 하루 종일 마주 보았다. 의미가 무궁한 것이 참으로 절경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머물고 싶었지만, 갈 길에 얽매여 뜻을 이룰 수 없어 안타까웠다. 산승들은 모두 여름 땔감을 마련하러 나갔다. 인적이 없었다.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하며 긴 하루를 보냈다."

周觀山勢, 則四無空缺, 而地勢高曠, 寺基平正, 以伽耶爲案. 峯頭白雲, 卷舒無常. 拓開前門, 終日相對, 意味無窮, 眞絶境也. 意欲留住, 而拘於前路, 未果, 可恨也已. 山僧盡出伐夏柴, 閱無人跡, 或坐或臥, 以終永日.

 

*** 산중일기山中日記(나는 혜안에서 발간한  신대현님의 번역서를 읽었다)

산중일기는 우담선생이 예순두살 때 전국을 유람하면서 일과를 기록한 글이다.

1686년 3월 13일 부터 시작된 순례는 1688년 9월19일 4차 여행을 마쳤다. 산중일기에는 300년전 우리나라 300여 사찰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스님을 만난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우담선생은 원주에서 출발하여 1686년 4월 3일~4월 4일 이틀간  수도암에서 머물렀으며,함양, 하동의 순례를 마치고 귀가하는 여정에 9월16일 청암사에 들러 9월17일 미타암에서 수도암의 승헌 종장을 만나고 쌍계사로 내려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대적광전

탱주가 뚜렷한 고식 기단위에 자리한 수도사 주불전 대웅전은 정측면 5*3칸의 전각으로 겹처마, 다포계, 맞배지붕이다.

 

 

꽃창살

 

 

고식기단

 

 

비로자나좌상

소발, 육계가 표현되어 있고,  풍만한 방형의 상호, 작은 입, 평평한 코. 긴 귀는 어께에 닿았고 삼도가 뚜렷하다.어깨는 당당하여 위엄이 느껴지고 법의는 통견이다. 수인은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지권인이다.

 

직접 확인하지 못했지만 '디지털김천문화대전'에는 보관형여래로 추정하는 흥미로운 글이 실려 있다.

"머리 주위로는 낮은 층단이 띠처럼 표현되어 있는데 그 위로 작은 구멍이 돌아가며 뚫려 있다. 이러한 층단과 구멍의 흔적은 일본 헤이안 시대[平安時代]에 크게 유행한 보관 불상들의 예들을 통해서 볼 때 머리 위의 층단에는 원래 금속제의 보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양식상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보관여래형 비로자나불상의 가장 오래된 예라 할 수 있다."

 

 

 

불상대좌.

대좌는 하대석,팔각 중대석, 상대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대석에는  복련, 상부에는 3단 괴임을 두고 팔각중대석 각면에는 안상을 조식하였다. 정면 안상속에는 사자상을 새겼다고 알려졌지만 수미단으로 인해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상대석에는 두 겹 앙련과 간엽을 표현하였다.

 

 

 

불상 조성시에 있었던 설화가 전해온다.

 

"도선국사가 이 부처님을 조성할 때, 수도암 터에 어울리는 탑과 모든 불사를 마쳤으나 석불을 만들 만한 석재가 없었다. 산 너머 거창 땅 부처골에서 큰 돌을 발견하고 칠 척이 넘는 거대한 부처님을 조성했으나 수도암까지 옮길 일이 막막했다. 이에 모든 대중들이 지극정성으로 7일 기도를 올리는데 마지막 날 수염이 하얀 노스님이 나타나 부처님을 옮겨준다며 큰 석불을 등에 업고 나는 듯이 산을 오르고 넘어가는 것이었다. 마침내 수도암 근처 지금의 아홉 살이에 이르렀는데  그만 칡덩굴에 걸려 넘어질 뻔 하였다. 이에 노스님은 수도산 산신을  불러놓고 “부처님을 모시고 오는데 칡덩굴에 걸려 부처님께 큰죄를 지을 뻔하였다. 앞으로 다시는 절 주위에는 칡이 자라지 못하게 하라.” 고 호통을 치고는 부처님을 수도암에 모셔놓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 때문인지 수도암 주위에서는 지금까지 칡덩굴을 찾아 볼 수 없다고 한다."

 

 

1686년 4월 3일 우담 정시한 선생의 산중일기에 석불좌상에 대한 글이 실려 있다.

 

" 두 곳에서 석불 두 분을 모시고 있었다.(한 분은 약광전 부처님 이었을 것이다). 전각은 소박하고 튼실하면서 또한 오묘하기도 하다. 일찍이 못 보았던 커다란 석불상인데 모습이 매우 위엄 스럽다. 좌대석의 조각도 무척 교묘하다. 어깨와 팔은 완연히 청색을 띠고 있어 그 까닭을 스님에게 물어보니 올 2월 4일에 청색 땀이 흐르다 굳더니 마치 유리같이 되었다가 사흘이 지난 뒤에 말랐는데, 그 뒤로 푸른색을 띤다고 하였다. 다가오는 4월 초파일에 관욕할 것이라 한다"

 

 

동서 삼층탑

 

 

서탑

서탑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삼층석탑이다. 기단부는 각 면에 한 개의 지대석을 마련하고, 그 위에 다시 한 돌로 된 중석과 갑석 등 4석으로 하층 기단을 형성하였다. 면석에는 양우주와 1주의 탱주가 모각되었고, 갑석 상면 1단의 각형 굄이 있다. 상기단 중석은 각 면 한 돌씩으로 우주만을 모각하였다. 갑석에는 부연이 생략되었고고 2단 탑신괴임이 있다. 초층 탑신에는 양우주를 모각하였다.또한 각 면에 감실 없이 여래좌상을  연화좌에 봉안하였다. 낙수면 물매는 깊지 않으며, 전각의 반전은 희미하다. 옥개석 받침은 모두 5단이며, 탑신은 처마에서 깊이 들어가 공간을 남겼다. 탑은 지붕돌 밑 간격과 지붕돌이 다른 탑에 비해 넓다. 상륜에는 노반,보주가 남아 있다. 

 

 

초층탑신 석불좌상

 

 

 

하기단. 상기단 면석

 

 

옥개석 층급

 

 

서탑 앞 배례석

 

 

 

 

석등

방형 지대석위에 하대석에는 복련이 장식되어 있다. 팔각간주석, 상대석에는 앙련을 조식하였다. 화사석받침은 연화문 팔각형이며,화창은 보수 하였다. 옥개석도 보수하였으며, 처마 밑 선은 수평이며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하며 상부에는 8엽 연꽃이 새겨져 있다. 상륜에는 연봉형 보주가 올려져 있다. 

 

 

석등 옆 석주

“창주 도선국사(刱主 道詵國師" 명문이 있다.

 

 

동탑

동탑은 단층 기단, 삼층석탑이다. 장대석을 놓아 네모난 지대석을 마련하고,  기단 면석에는 안상을 크게 표현하였다. 2매 판석의 갑석에는 부연이 없고 상면에호각의 2단 굄이 있다. 전층 탑신에는 양우주가 모각되었고,초층 탑신에는 감실속에 석불을 모셨다. 옥개석 물매는 얕고, 처마 밑은 직선이며,  전각의 반전은 희미하다. 옥개석 층받침은 1~2층 4단, 3층이 3단이다. 상륜에는 작은 갑석형을 이중으로 나타낸 작은 노반, 복발,보륜이 남아 있다.

 

 

지대석.기단

 

 

초층 탑신

 

 

 

기단면석의 안상

 

 

옥개석 층급받침

 

 

동탑

 

 

 

약광전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전각

 

 

약사여래좌상

머리에 원통형 보관을 착용한 여래상이다. 방형의 상호, 이마에는 백호를 표현하였고, 가는 눈, 오뚝한 코, 두툼한 입술 등은 팽창된 뺨과 함께 온화한 인상을 준다. 귀는 길어 어깨에 닿았고,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법의는 통견, 옷 주름은 도식적인데 상하가 모두 평행한 옷 주름 선으로 얕게 3, 4줄씩 표현되었다.  두 손에는 약합을 지물로 있는 모습이다. 광배에는 연꽃문, 넝쿨문, 불꽃문이 새겨져 있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방형 대좌 윗부분에는 앙련을, 아래에는 복련을 조각하였다. 고려 전기에 제작된 불상으로 전한다.

 

두 손에 든 지물을 연봉이며, 보관으로 보이는 위에 별도 보관이 있었을 불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럴 경우 불상의 존명은 미륵불이다.

 

 

재미난 이야기도 전해온다.

"수도암 약사여래는 직지사 삼성암 약사여래, 금오산 약사암 약사여래와 함께 ‘삼형제’로 불린다. 모두 한 석공이 제작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한 석불이 하품하면 다른 불상도 따라서 하품을 한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특히, 수도암 약사전에서 기도한 후 법당이나 주위 마당에서 한약냄새를 맡으면 어떤 불치병도 낫는다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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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4월 1일 부도전

한기는 밭 중앙, 다른 한기는 밭 가장자리에 있었다.


 

봄볕이 따사롭지만  완연한 봄은 아니었다.

아직 라일락이 봉오리만 맺고 있었다.


 

-여그는 선원이라 출입금지요.

-부도 사진만 찍겠습니다.

-이런데 관심있소

-예 스님

-이 부도는 애기스님 부도 같애

-?

-글이 조그만해? ㅎㅎ

-공양했나? 얼른 공양간 가봐.

-나중에 먹겠습니다.

-수도암은 특별한 절이야...

 

한참후

-나 저너머 암자에 있어 나중에 차 한자 마시러 와!!

-노스님 성불하십시요

()()()

 

뒷짐진 손에는 아이스크림이 가득 든 봉지다

 

2007.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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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두 부도는

밭 위에 함께 모시었다.

 

 

수도암 부도는 출입금지구역에 위치한다. 답사시에는 먼저 종무소에 협의 하여야 한다.

 

 

 노스님이 애기부도라고 말씀하시며 작은 명문이 있다고 하였던 부도

수도사홈페이지 자료에 의하면 애기부도로 전한다는 글이 보인다.

 

"전면에는 ‘청□당(淸□堂)’이라는 부도명이 적혀 있다. 왼 쪽에 있는 부도는 15세 동자승 부도 입니다.어린 동자를 데려다 키웠는데 어느날 갑자기 죽게 되니 그 스승은 동자를 위해 주변에 돌을 다듬어 부도를 세워주고 15세 사미 부도라고 적었습니다."

 

 

 

 

 

이렇게 바라보면 우측의 부도는 애기부도처럼 느껴진다.

 

 

우측 부도는 근자에 입적한 법전스님의 부도이다.

 

 

 

 

 

이제

백련이 만개한 겨울날의 자태만 보면 되는데

내머리에 백발이 먼저 자리잡고 있으니...

 

201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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