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김천시

김천...불령산 청암사

임병기(선과) 2016. 9. 30.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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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사.

성주에서 성주댐을 경유하여 한강 정구의 무흘구곡이 전개되는 절경의 길

고조부 이래로 집안 어르신들의 애환과, 비사, 음력 시월이면 오늘 까지 이어지는 10대조부모님~6대 조부모님 묘사길

예전 답사기에서 언급하였기에 슬픈 집안사는 접어야 겠다.

 

그런저런 연유로 숱하게 들린 청암사

오늘은 특별히 지리산 자락 부도순례에서 뵌 함양 상무주암 회암당부도의 주인공 회암당선사 부도를 뵈러 왔다.

 

 

일주문

1976년 주지 비구니 진기스님이 신축하였고, 1993년 지형화상이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예서체의 불령산 청암사(佛靈山靑巖寺 현판은  성당 김돈희星堂 金敦熙의 글씨이다.

 

 

최송설당 각자.

 

대시주

최송설당

경신 모춘(1920년)

주지 김대운

 

일주문 못미쳐 우측 바위에 새겨져 있다.

이 곳 외에도 최송설당 각자는 두어 곳에 더 보인다.

송설당은 일제강점기 화재로 폐사 직전의 청암사를 중수하는데 큰 시주를 한 분이다.

 

송설당()

본관은 화순. 본명은 미상이며 송설당()은 호이다. 경상북도 김천 출생. 아버지는 최창환이며, 어머니는 경주정씨이다. 외가쪽이 홍경래()의 난에 연루되어 증조부와 조부가 억울하게 죽은 것을 알고, 어려서부터 가문의 명예회복을 위하여 누명을 벗게 할 것을 맹세하였다.

 

1886년(고종 23) 아버지가 죽고 이어 남편과도 사별하자, 39세 때 불교에 귀의하여 정진하였다. 그뒤 서울에 올라와 권문세가의 부인들과 교제하던 중 입궐하게 되어 영친왕의 보모가 되었으며, 귀비()에 봉하여지고 고종으로부터 송설당이라는 호를 하사받았다.

 

이후부터는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는 한편 금릉학원()에 기부금을 내는 등 사회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1930년 2월 25일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전국 일간지에 학교설립을 위해 전재산을 희사할 취지를 밝힌 성명서를 발표하고, 1931년 2월 5일 전재산 30만 2100원을 희사하여 재단법인 송설학원()을 설립, 김천고등보통학교를 개교하여 오늘날의 김천중학교와 김천고등학교로 발전되었다. 건학이념은 "길이 사학을 경영하여 민족정신을 함양하라( )"이다.

 

시문에 능하여 200여 수의 한시와 60여 수의 국문시가를 남기고 있으며, 저서로는 『최송설당문집』 3권(1922년)이 있다. 무덤은 김천중·고등학교 뒷산의 송정() 옆에 있으며, 1935년 11월 30일 교정에 송설당의 동상을 세워 설립자의 뜻을 기리고 있고, 1963년 8월 15일 대통령 문화 포상이 추서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중학교 시절 

김천중학교에 재학중이던 친구녀석이 보여준 "송설雪" 교지를 접했지만 최송설당은 어찌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연락이 끊긴 그 친구는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천왕문

회당비각. 대운대사 비각

 

 

회당대사 탑비晦堂大師 塔碑
귀부와 비신 이수를 갖추고 있다..

비신 상부에 회당대사비명晦堂大師碑銘이,  아래에는 유명조선국불령산쌍계사정혜대사비명병서 ‘有名朝鮮國佛靈山雙溪寺 定慧大師碑銘幷序’라는 비제碑題곁으로 비문이 세로 씌여져 있다. 영조때 우의정을 지낸 조현명이 찬하고, 판부사 서명균이 쓰고 김상복이 새겼다.

 

비에는 1744년 세웠다는 명문이 있지만

청암사 홈페이지에는 "1852년 회암선사 5세손 포봉선사가 지은 회당대사의 탑비가 모셔져 있습니다."라고 등재되어 있어 연유가 궁금하다.

 

(회당비에 대한 이야기는 이글 말미에 다시 거론하겠다.)

 

 

귀부

 

 

 

대운당비

창건 이래로 청암사는 여러차례의 화재로 전각을 소실하였다.

폐사 지경의 퇴락한 사찰을 광무 1년(1897) 청암사를 중수하기 위해 화주로 나선 대운(, 1868~1936)스님이 8년에 걸쳐 청암사를 모두 보수한 뒤, 이어서 극락전을 새로 짓고 여기에 42수 관음상을 봉안하는 불사를 하게된다. 그러나 1911년 9월 또다시극락전과 백련암을 제외한 청암사를 모두 불태운다. 이에 대운스님은 다시 청암사를 일으켜 이듬해 봄에 복구를 마무리한다. 이 탑비의 주인공이 대운당 용각 대사이며 1914년 건립하였다.

 

 

불령산 청암사 사적비명

1914년에 제작된 비로,  동국대학교 초대총장을 지낸 근세의 대학승 퇴경 권상로(退耕 權相老 1879 ~ 1965)가 지었다..

 

 

 

청암사 사천왕문은 중현당 뒤쪽에 있었으나 지리적으로 볼 때 소의 목에 해당된다고 하여 1993년 지형화상이 현재  위치로 이건하였다.

 

 

 

 

우비천 牛鼻泉.

불령사 와우형 풍수형국에서 지형적으로 소 코에 해당하는 샘.

우비천에 물이 넘치면 증산면 일대가 부자가 된다하였으며, 재물을 멀리하여야 하는  스님들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고 한다.

 

 

 

신라 헌안왕 3년(859년)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그 후 "조선 인조 25년(1647) 화재로 전소(全燒)되었으나 벽암(碧巖)각성(覺性)스님이 이 소식을 전해듣고 그 문도(門徒) 허정(虛靜)혜원(慧遠)스님으로 하여금 재건토록 하였으며, 이에 혜원스님이 심혈을 기울여 청암사를 중창하였습니다. 그 후 숙종의 정비(正妃) 인현왕후가 서인으로 있을 때 청암사 극락전에서 특별기도를 올린 인연으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불영산의 적송산림은 국가보호림으로 지정되어 궁(宮)에서 무기 등이 하사되었고 조선시대말기까지 상궁(尙宮)들이 신앙생활을 하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고종 9년(1905) 주지 대운당스님이 잠결에 빨간 주머니를 얻는 꿈을 꾼 후 한양에 가니, 어느 노보살님이 자신이 죽은 후에 염불을 부탁하며 대시주를 하였습니다. 대운당스님은 이렇게 쇠락한 극락전을 중건하고 염불 만일회(萬日會)를 결성하였으며 극락전에서는 염불소리가 끊어지지 않는 염불당으로서 역할을 다했다고 합니다.

 

청암사승가대학은 벽암각성의 강맥을 이은 대화엄 종장 모운진언(暮雲震言, 1622-1703)이 청암사를 전문 강원으로 개설한 것이 효시이다. 그 이후로 허정 혜원(虛靜慧遠)이 강교(講敎)와 설선(設禪)의 꽃을 피웠으며, 1711년경 조선시대 벽암 각성, 모운 진언, 보광 원민조사의 법맥을 이은 화엄학의 대강백 회암 정혜(晦庵定慧, 1685-1741)조사는 청암사 강원을 융창 발전시킨 대강백이다.그 당시 청암사는 불교 강원(講院)으로서의 명성을 드날렸으며, 운집한 학인수는 300명이 넘었고 승속의 추앙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후 수많은 제자들로 면면히 이어져 근래 고봉(高峰)스님과 그의 제자 우룡스님, 고산스님으로 이어졌습니다.

현재 청암사승가대학 학장이신 의정지형강백과 의진상덕강백은 1987년 3월 25일 청암사비구니승가대학을 설립하여 20년에 걸쳐 전 도량 및 부속건물을 보수Ÿ신축하고, 목조로 된 사십이수(四十二手) 관음보살상을 새로 조성하여 모셨으며, 범종각을 신축하는 등 후학양성에 원대한 발원을 불사에 펼쳤습니다. 훼손되지 않은 자연경관 속에 고찰의 신비로움을 그대로 간직한 채 전통강원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청암사는 대중스님들이 부처님 경전공부와 더불어 수행의 향기를 쌓아가고 있는 곳입니다."...청암사 홈페이지

 

청암사는 대웅전 영역의 대웅전, 맞은 편 보광전, 부도전을 제외하고는 비구니 승가대학이 자리하여 엄격히 출입이 통제되고 있어 대웅전 내부를 제외하고는 많은 성보 문화재를 직접 뵐 수 없음을 유의 바란다.

 

 

범종루

 

 

대웅전

현판은 성당 김돈희 (星堂 金敦熙 1871-1936)의 글씨, 2단의 기단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 전각이다.

 

 

청암사 5층석탑

현재 4층이며 다층탑으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나 한 층이 결실된 5층탑으로 추정된다.

지대석 4매, 2층 기단이며 이 기단 위에 4층의 탑신,옥개석,상륜부가 남아있다.갑석 상부에 3단 괴임을 각출하였다. 상대 면석에는 우주를 새기고 각 면에 연화문을 조식하였다.

상대 갑석 상부에 복련을 돌려 탑신받침을 조출하였다. 초층 탑신 각 면에 얕은 감실 속에 불상을 봉안하였다. 탑신에 비해 옥개석이 넓고 전각의 반전이 급격하다. 옥개석 층급받침은 아래로부터  5*5*3*3층이다.상륜에는 노반과 보주를 올렸다.


조선 시대 석탑으로  1912년 대운대사가 성주의 논에 있던 탑을 옮겨 온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청암사 홈페이지에는  1938년에 제작된 탑으로 등재되어 있다.

 

 

 

 

 

목조석가여래좌상

대웅전 석가여래는 1921년 대운大雲화상이 중국 항주 영은사靈隱寺에서 조성한 청나라 말기 불상으로 전한다.

연화대좌에 결가부좌한 선정인의 수인이며, 살찐 상호,  좁은 어깨, 법의는 통견이다. 육계가 없고 계주만 크게 표현하였다.

 

 

영산회상도.1914년

당대의 금어 이혜고, 김계은, 홍한곡이 참여하였고, 대웅전의 산신탱화, 신중탱화, 칠성탱화, 독성탱화도 모두 같은 화승의 작품이다.

 

 

칠성도.1914년

 

 

독성도.1914년

 

 

신중도.1914년

 

 

산신도.1914년

 

 

 

 대웅전 기단 좌우 사자상?

화재가 잦은 청암사의 이력으로 미루어 화재 비보책으로 조성한 해태상으로 보고 싶다.

 

 

 

보광전

건립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1782년(정조 6)에 중건한 기록이 있다.

1689년(숙종 15) 인현왕후가 폐위되어 3년동안 청암사 극락전에 은거하였는데, 이때 극락전 서쪽에  복위를 빌기 위해 세웠다는 설이 있다.

1911년 대운대사가 중수했는데, 중수할 때의 시주록 현판에 26명의 궁전 상궁 이름이, 다른 시주록에 17명의 상궁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 왕실과의 깊은 교류를 짐작 할 수 있다.

 

내부에는 42수 관음보살과 20세기 초에 조성한 불화가 있으나 오늘은 스님들의 행사(?)로 출입하지 못했다.

 

 

보광전 앞 배례석.

얼마전까지 증산면사무소 뒤의 쌍계사지에 있었다.

당시 현장에서 만났던 촌부와의 대화 내용을 옛답사기에서 가져 왔다.

 

"배례석을 살피고 있는 중에 때마침 팔순의 촌로가 지나 가시길래 담배 한 대 권하며 여쭈어 본다.

-.어르신 절터에는 배례석 밖에 없슴니꺼?
-.뭐라꼬? 배례석은 무신 배례석 그거 떡틀이여 떡틀...
-.떡틀이라뇨?
-.시님들 떡 할 때 그 위에 놓고 내리치고 그랬어!!! "

 

 

부도전.보광전 영역에 위치한다.

 

 

고봉당 부도
1988년 팔각원당형부도를 모본으로 조성하였다.
고봉당 태수대화상(高峰 泰秀 1901~1967) 비명은 덕민당德旻堂 풍수豊水가 찬하고, 황악사문黃岳沙門 현산顯山이 글을 썼다.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난 고봉 스님은 25세의 나이로 용성 진종(龍城 震鍾,1864∼1940) 스님에게 출가했다. 용성 스님과 함께 도봉산 망월사에서 만일결사도량을 열기도 했던 스님은 석왕사 선원에서 큰 깨달음을 얻은 뒤 해인사,통도사.은해사 해인사,청암사 등지에서 후학을 지도한 근세 선교를 겸한 대강백이었다. 스님은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걸림이 없었는데, 만공 월면(滿空 月面, 1871∼1946) 스님과 함께 선문답을 나누던 대선승이기도 했다.

 

 

이곡당탑 梨谷堂塔

 

 

백심당탑 白心堂塔

 

 

 

신곡당탑 新谷堂塔

 

 

이곡당탑 利谷堂塔

 

오늘 청암사를 찾은 목적은

8월말 지리산 자락 부도 순례에서 만난 회암당 부도를 단초로 스님의 행적을 살펴보던 중, 대사께서 청암사에서 입적하였으며 부도가 모셔져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부도를 뵙기 위해서 청암사에 들렸다.

 

청암사 회당 부도는

일반인 출입금지구역이며 사전에 청암사에 허락을 얻은 후에 방문하여야 한다.

 

 

상무주암 회암당 부도. 회암당 명문이 새겨져 있다.

 

 

회당 비각.천왕문 앞에 세워져 있다.

그런데 회암당晦庵堂이 아니라 회당晦堂이다

 

그 이유?

아래의 글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이며, 상무주암 회암당부도 답사기에 올렸던 글이다

 

 

 

청암사 회당대사 비

 

 

 

회당대사비명...글, 사진 출처/직지사 성보박물관

 
 

 

 

회당대사비명晦堂大師碑銘
 
조선국 불영산 쌍계사 정혜대사비명과 그 서문
수충갈성분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풍원부원군 조현명 짓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 서명균 쓰고,
중훈대부 전행 사간원 정언 김상복 전액
 
정혜대사는 총명하고 (학문과 도덕이) 깊고 넓었으며 강설이 무르익고 능란하여 이르는 곳마다 학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서교대종사西敎大宗師라고 일컬어진지 거의 40년이 되어서 돌아가셨다. 그의 문도인 채청彩晴 스님이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비명碑銘을 청하였다. 정혜 스님은 내 (사촌)동생인 동계거사東谿居士와 서로 친하였다. 내가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스님이) 징청각澄淸閣(경상감영)으로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소리기생이 가득한 가운데 손님과 더불어 시와 술을 즐기고 있었다. 스님은 그 사이에 계시면서도 태연하고 느긋하게 웃으면서 말씀하셨는데, 눈은 마치 보지 않는 것 같았고 귀는 흡사 듣지 않는 듯하여 내가 마음으로 스님을 공경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내가 불가佛家의 글을 일삼지 않고 비록 유가儒家의 일원이나 의리상 사양할 수가 없었다. 그 행장에 다음과 같이 일렀다.

 


스님의 속성俗姓은 김씨로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난 지 9세가 되자 스스로 범어사 자수선사自守禪師에게 출가하였다. 자수선사는 스님의 총명함과 지혜를 남달리 여겨 충허장로 虛長老에게 보내었다. 가야산에 들어가서는 보광화상 光和尙에게 참례하였다. 화상이 비로소 (스님에게) 구족계를 주었다. 호남을 유력遊歷하여 설암雪巖 스님에게 참문參問한 뒤 이윽고 보광 화상에게 돌아왔다. 이 때부터 명성이 크게 드러나서 좇아 배우는 자들이 날로 많아져 마침내 강단講壇에 올라 불자拂子를 세우니당시 스님의 나이는 27세였다. 이윽고 다시 여러 스승들을 두루 참례하니 지혜가 더욱 드러나게 되었다. 하루는 '남의 보배를 헤아려 봐야 무슨 이익이랴!' 하고 탄식하더니 금강산에 들어가 좌선하였다.

 

얼마 뒤 돌아와서는 석왕사·명봉사·청암사·벽송사 등 명찰名刹에서 강의를 하다 돌아가시니 청암사에서 시적示寂하였다. 스님은 만년에 항상 강생講生들을 사절하여 흩어버리고 마음을 기울여 내면을 궁구하고자 하였으나 강생들이 기꺼이 떠나지 않음으로 스님 또한 강석을 능히 거둘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뜻은 일찍이 참선參禪으로 돌아가고자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다비茶毗할 때 우박이 내리고 기이한 빛이 비쳤다. 부도를 세워 사리를 불영산과 지리산에 모셨다. 스님은 을축년(1685) 5월 2일에 나서 신유년(1741) 5월 20일에 돌아가셨다. 세수世壽는 57세이다.

 

스님은 성품이 온아했으며 큰 도량이 있었고 작은 예절에 구애받지 않았다고 한다. 입으로 지껄임은 기세등등하되 심학心學은 거칠어지고 교종敎宗은 숭상하고 선지禪旨는 어두워지니, 유가와 불가가 그 길은 다르지만 말폐末弊는 대체로 비슷하다. 스님은 능히 이런 점을 살피고서 그것을 돌이키려 하였으니 우리 유가의 이리저리 밖으로만 치닫는 자들은 가히 경계할 바를 알 수 있으리라. 명銘하여 이르노니 가지 끝의 가지를 살리는 것이 어찌 뿌리 중의 뿌리를 북돋우는 것만 하겠는가. 사방 교외의 소와 양들 돌이키지 않으니, 아! 우리 선비들이 그대의 선에 부끄럽구나. 

 

숭정기원 후 두 번째 갑자년(1744) 8월 일 세움

 

몇가지 재미 있는 비문 내용을 짚어 보자.

 

1. 불령산 청암사가 아니라 쌍계사로 되어있다.

    즉.1744년 경에는 청암사가 쌍계사의 말사로 추정해볼 수 있다. 현재 쌍계사지에는 부도 1기만 유존하며, 배례석은 얼마전 청암사 보광전 앞으로 옮겨왔다. 또한 시왕상은 김천 시내 모사찰에 봉안되어 있다.

 

2.비문은 동국진체로 새겨져 있다. 원교이광사와 인맥이 형성된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비문을 쓴 서명균은 아버지 서종태徐宗泰(1652~1719)의 단정한 필체를 본받아 정갈하면서도 시원스런 글씨를 썼는데, 힘있고 활달한 필체를 구사했던 장인 김구의 영향도 받은 듯 하다. 김구의 글씨로 선산 <김주신도비金澍神道碑>(1699)가 있는데 이 비를 보면 서명균이 쓴 정혜대사비의 글씨와 상당히 흡사하다.
 
한편 서명균의 아들인 서지수徐志修(1714~1768)는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절대적인 공헌을 하였던 인물로 1766년에는 영의정까지 올랐다. 그 역시 글씨에 일가를 이루었는데 아버지와 친했던 조선후기의 명필 백하 윤순白下尹淳(1640~1741)에게서 필법을 배웠다고 한다. 윤순은 우리 고유의 필법인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圓嶠李匡師(1705~1777)의 스승이기도 하다." ...직지사성보박물관

 

3.회당스님과 글을 지은 조현명은 대구 경상감영에서 만난 인연으로 글을 찬한 것 같다.

 

4.회당 스님은 청암사 이전에 호남지방에서 활동을 많이 하였다.

 

5.1741년 입적하자 청암사와 지리산에 부도를 조성하고 비는 3년후 1744년에 부도비(?)를 세웠다.

 

6. 동일한 인물인 회암정혜대사를  회당晦堂으로 칭하였다.

 

위 5.6번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자.

 

1.부도를 지리산에 분사리한 까닭은 무엇일까?

 (확신할 수 없는 설임을 먼저 밝힌다)

 

비문에 명기한 것 처럼 함양 벽송사에서 오래 있었으며 그에게서 공부한 큰 스님 두 분이 함양 용추사(장수사)와 상무주암  아래 영원사에 오래 주석하시고 입적하시었다. 그런 연유로 회암대사가 입적후 영원사에 주석하던 조선후기 화엄학의 고승이었던 설파당스님이 중심이 되어 지리산 자락 함양땅 상무주암에 후학들이 봉안하지 않았을까?

 

용추사.문곡대사 부도

1)용추사 문곡대사 비명文谷大師碑銘.

大師法諱永誨。十三。出家入長水寺。投玅彦師。旣數年。玅彦異其聰慧。諭之曰。吾不敢闍梨爾。爾其以晦堂爲歸。晦堂卽定慧大師。以華嚴宗主名

대사의 법휘는 영회(永晦)이다. 13세에 출가하여 장수사(長水寺)에 들어가 묘언(妙彦) 스님에게 투신하였다. 이미 몇 해가 지나가자 묘언이 그 총명하고 지혜로움을 기이하게 여겨 타이르기를 "나는 너를 가르칠 수 없다.너는 회당(晦堂)을 귀의처로 삼아라."고 하였다. 회당은 곧 정혜대사(定慧大師 1685~1741 원호는 회암晦庵이다)니 화엄종주로 유명하였다. 스님은 힘써 귀의하였다. 

***용추사 문곡대사 비문에 의하면 회암이 문곡대사의 스승임을 알 수 있으며, 문곡대사 부도는 함양 용추사에 있다.

 

 

영원사 설파당탑(雪坡堂塔)...우측사진 

2)영원사 설파당대사 비문雪坡大師碑銘

大法師名尙彦。湖南茂長縣人。國朝孝寧大君十一世孫也。父泰英。母坡平尹氏。早失怙恃。家甚貧無以自資。年十九。投禪雲寺。薙髮于雲暹長老。受偈於蓮峯虎巖兩和尙。又參晦菴丈室。以禪系言之。於西山爲七世孫

(중략)及老入靈源立死關。以念佛爲課。日輪千念十周者十有餘年。庚戌臘。示微辛亥正月三日。怡然入寂。壽八十五。臘六十六。

 

법사의 이름은 상언(尙彦 1707~1791)이고 호남 무장현(茂長縣 :지금 고창군 무장면) 사람이다. 효령대군의 11세손이다. 부친은 태영(泰英)이고 모친은 파평윤씨이다. 조실부모하고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스스로 살길이 없었다. 19세에 고창 선운사(禪雲寺)에 투신하여 운섬(雲暹) 장로에게 머리 깍고 연봉(蓮峯)과 호암虎巖(체정體淨, 1687~1748 환성지안의 제자임) 두 화상에게 게송을 받았다.

회암(晦庵:정혜定慧 1685~1741) 스님에게 배웠다. 선종(禪宗)의 계보로 말하면 서산(西山)에게 7세손이 되고 환성(喚醒:지안志安 1664~1729)에게 손자가 된다. 33세에 대중들의 강력한 요청으로 용추(龍湫) 판전(板殿)에서 강좌에 올랐다.(중략)노년에 영원사(靈源寺:함양군 마천면 삼정동 소재)에 들어가 죽을 각오로 염불로써 일과를 삼았다. 날마다 천 번 염불하는 것을 열 번 되풀이하였는데 10여 년 동안 이어졌다. 정조 14년(1790) 섣달에 작은 병에 걸렸고 15년(1791) 1월 3일에 기쁜 표정으로 열반에 들었다. 나이 85세 법랍 66세였다.

 

번암집樊巖集 <제57권》

<역주>: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

참고문헌 : 함양군,『문화재도록』, 1996

 

2.회암晦庵과 회당晦堂 문제.

인터넷상의 자료에는 주자(주희)의 호 회암(晦庵) 때문에 회당으로 하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글이 보인다.주자학이 통치 철학인 조선에서 대유학자가 승려에게 주자와 동일한 격을 지켜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공감이 가는 내용이다. 위에서 인용한 문곡대사비문에서도 번암 채제공은 회당으로晦堂 글을 지었으나, 설파당 대사 비문에는 회암晦庵으로 명기하였다.(자료에 따라 암을 庵과 菴으로 달리 표기되어 혼란스럽다) 

그런 연유로 청암사 비명을 회암晦庵을 회당晦堂으로하였겠지만 어디 지리산 상무주암 골짜기에서는 그게 통했겠는가? 회암스님의 제자들은 청암사에서 사리를 모시고와서 당당하게 스승의 당호로 회암당晦庵堂을 새겼을 것이다.

 

청암사 제자들은 어떠했을가?

비를 세울 당시에는 말도 못하고 속앓이를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지난 후에는 스승의 당호를 되찾아주었다.

 

 청암사 회암당 정혜진영靑巖寺 晦庵堂 定慧 眞影...직지사성보박물관

"회암 스님의 진영은 입적 당시에 제작된 진영이 아니다. <청암사 중수기靑巖寺重修記>(1854)에는 19세기 중엽 청암사에 영각이 다시 세워지고 회암 스님의 진영을 이모해 봉안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근거해서 보면 이 진영은 19세기 중엽에 이모해 그린 작품이다".
즉, 청암사에 회당비각(1744년)을 세운지 100년이 지난 후 진영을 모시면서 스승의 당호晦庵堂 를 되찾아 표기하였다.

 

 

 

회암선사庵禪師부도. 제자 용암선사龍巖禪師 부도와 비

청암사에 재물이 넘쳐 스님들이 수행하는데 걸림이 된다하여 그 재운(財運)을 누르기 위해 비보책으로 이곳에 부도를 세웠다고 한다.

 

 

회암선사 晦巖禪師부도.

 

 

 

 

용암선사 龍巖禪師부도와 비.1765년

 

 

 

 

 

지리산 자락 상무주암 부도에서 시작된 회암당대사 행적을 마무리한 후 돌아 본 부도전, 가슴가득  만족감이 밀려왔다.

 

 

언제

어디서나

아쉬움으로 쉬 발길 떨어지지 않았는데... 

201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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