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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화순군

화순...쌍봉사

by 임병기(선과) 2016.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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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봉사

유현, 박초시(장돌뱅이)와 2005년 3월 남도 답사길에 들린 이후 처음이니 햇수로 12년만에 다시 들렸다.

 

나의 자취이기에 오류가 보이지만 그때의 글을 수정없이  가져 왔다.

 

쌍봉사 해탈문을 들으서며

 

뒤에 탄 유현은 잠이 든 듯한데 순간순간 동굴속 박쥐처럼 방향감각을 잘도 잡는다.

나도 모르는 보성으로 가는 길도 염두에 두고 있었고,헌데 바로 해탈문이다.성과속의 경계를 넘어 미혹과 깨달음의 이분법으로 도식화 하려는 듯이 보이지만 해탈문이 곧 불이문이니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다만, 쌍봉사의 배치를 고려, 평지 가람에서 대웅전과의 동선을 고려한 선택으로 보여진다.

송광사의 말사인 쌍봉사는 여느 절집과 달리 창건주 철감선사의 호를 따서 절집이름을 붙였으며 철감선사 쌍봉스님이 이절에서 머물며 일가를 이루었고, 철감의 선맥을 이은 징효는 강원도 영월 흥녕사 에서 사자산문을 개창 하였으니  철감선사를 사자산문의 개산조로 보는 것은,가지산문 보림사의 도의,보조와 같은 맥락으로 봐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대웅전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 밭에서 일하던 촌로가 불속에 뛰어 들어 불상을 옮겼다고 하는 안내문을 읽고 있는 등 뒤로 유현이 예전에 스님에게 들었다며  "그 불상의 무게가 두 사람의 힘으로도 들 수 없는 무게였고",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젊은 아난, 나이든 가섭 존자가 협시로 계시며 대둔사에서 협시불이 헷갈렸다며 바로 잡는다.

대웅전 앞에 서로 멀리 떨어진 괘불대와 위치를 보아 보림사를 머리속에 그려보면 현재의 목탑형 대웅전이 목탑이 있었으며, 뒤편의 현재 극락전 자리에 주불전이 있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것 같다. 외관상 3층 통층 구조로 보이는 대웅전은 1층에 우물천장으로 막아 중층의 구조이나 2,3층은 통층이아닐까?

어쨓거나 이제 겨우 성년에 접어든 사모지붕 대웅전은  칼라펄한  처녀의 풋풋함을 떠올리게하고, 사진속에 남은 팔작지붕 대웅전은 저 건너 돌담과 요사와 어울려, 고향집 문위의 액자속 흑백사진을 생각나게 하는데, 이런 심사를 눈치라도 챗는지 절집 청소를 하시던 스님들의 대나무 태우시는 소리가 요란하다.


탁탁탁!!! 잡놈 물러 가거라!

호남 지방 관음전,원통전에서 보이는 丁자형 전각이, 쌍봉사의 신축불사한 처음 들어보는 '호성전'전각에서도 보여 의아스러운데 더 놀라운 것은  텅빈 전각 내부이다. 추측컨데 쌍봉선사, 징효선사 진영을 모실  조사전과 같은 전각으로 보이나, 비움의 의미를 다른방향으로 전개해가는 나에게 유현이  젊은 아그들은 T자형 건물이라 부른다며, 나를 노약자 반열에 올려버리지만, 에고 어쩔거나? 지놈이 불혹이면 나는 지천명인 것을...

 

내가 마음을 비우고 나니 극락전 목조 아미타불과, 명부전 목조 지장보살이 나의 어깨를 다독거려주시는 듯하여, 철감선사 부도 알현하러 가는 발길이 가볍기만 하더라.

스님의 무덤인 부도가, 후학들의 종조 받들기, 파벌의 시초, 지방호족의 부의 과시 수단으로 태동되었다고 믿고 싶지는 않지만, 오늘날 부도비와 더불어 당시의 미술, 건축,사회상, 문화사조 흐름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임에 분명하니 오늘날 졸부들의 행태도 훗날 박수를 받을 수 있를려나?


작년 코리안 리그에서 10회 노히트노런을 해도, 기록인정은 고사하고 승리 투수도 되지 못했던 배영수 삼성투수를 떠올리면 천박한 비교에 불과할까?

상감의 느릿느릿한 감상도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지만, 유현의 추임새도 그만이다. 비신이 사라지고 이수에도 귀꽃(?)한 송이가 멸실된 부도비를 바라보며 상감에게 귀부의 한발이 들려있다고 했더니 앞으로 나가려는 순간 동작을 표현한 것이란다.
내눈엔 비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열을 받아, 그것도 모르는 체 다가와서 횡설수설 하는 놈의 얼굴에 입에 문 여의주를 강하게 내뱉기 위한 준비동작으로 보이는데... 


비 내리는 날 가장 어울리는 부도가 쌍봉사 부도라고 유현이 말하거나 말거나 상감은 굴러 들어온 20만원 일감을 받을려고 부도전을 오염시키며 목소리 높히고, 나는 철책 넘을 궁리만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아름답기로 널리 회자되는 부도의 하나인 쌍봉사 부도는 팔각원당형에 팔각 지대석,2단을 이룬 하대석에 구름무늬, 상단에 사자를 조각하고, 상대석에는 앙련 위에 8각 대석이,안상에는 가릉빈가가 새겨져 있으며, 탑신에는 연꽃무늬가 둘려 있다. 탑신은 우주, 문비,신장상,비천상이 조각되었고, 옥개는 겹처마가 뚜렷하고 기왓골, 암막새,수막새에는 연꽃무늬까지 새겨져 있어 당시의 목조 건축 양식을 추측하게 한다.

미적 감각이 무딘 나는 신라말의 화려한 팔각원당형의 부도보다 석종형 부도를 좋아하지만 철감선사 부도를 비롯, 연곡사.태안사의 부도를 보면 입을 다물 수 가 없다. 모르긴해도 전라도 지역에서 최고로 가는 장인의 기술력, 돈독한 신심,탄탄한 재력의 후원은 물론, 운, 타고난 운이 아니라면 아차하는 순간의 실수로 도루묵이 되는 상황이니, 혼자의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출중한 능력이라도 주위의 도움이 없이 혼자서는 불가한 팀웤의 산물로 보고싶다.


2005.03.21

 

 

쌍봉사는 동리산문桐裏山門의 개산조인 적인선사 혜철이 839년 2월 중국에서 귀국하여 최초로 하안거 지낸 곳이 무주武州) 관내 쌍봉사라는 견해가 있어 이에 따르면 839년 이전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철감선사 도윤(798~868)이 주석하면서 사세가 크게 번창한 것으로 보인다. 철감선사 도윤의 호는쌍봉雙峰, 시호는 철감澈鑒이다. 황해도 봉산에서 태어나 18세 때 출가하였다. 귀신사(鬼神寺에서 화엄경을 배우고 825년 당나라에 유학하여 남천보원南泉普願의 법을 이어받고 847년에 귀국하였다. 신라 말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사자산문獅子山門의 개산조로 화순 쌍봉사로 이거하여 선풍禪風을 떨치다가 868년 71세로 입적하였다.

고려 시대. 소성 연간(紹聖年間)(1094~1097)에 혜조 국사慧照國師가 중창하였는데, 그 문하에서 유명한 승려가 다수 배출되었다. 예종의의 서자庶子로 혜조 국사에게 출가했던 광지대사 지인은 이곳에서전륜대장轉輪大藏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고려 후기 쌍봉사 위상이 크게 높아진 것은 최씨무인 집권기이다. 최우는 1219년에  아들 최만전과 최만종을 수선사修禪社의 제2세 혜심에게 보내 출가시켰으며 최만전이 쌍봉사에 거처하면서 사세는 융성하였다.


조선 시대. 성종조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부터 일제 강점기의 능주읍지까지  유존 사찰로 수록되어 폐사된 적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세종 대에는 전라도 관찰사  김방의 지원을 받아 중창을 하였고, 세조는 잠저潛邸 시에 쌍봉사에 친임(親臨)한 인연으로 1475년에 원당願堂으로 삼았다. 그리고 어서御書) 5결의 전지田地, 조세 면제租稅免除, 승려 잡역僧侶雜役 일체를 면제해 주어 더욱 확고한 사찰이 되었다. 연산군 때에는 쌍봉사에서에서 지낸 수륙제에 향리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숙종은 어필 병풍, 대롱촉,청류병,황유리잔,금침장,향로 향합을 내렸고,  경종은 전지 4결을 내렸으며, 영조는는 어필 병풍을 하사하였다.

왕실의 끊임없는 지원에도 불구하고 죽수서원의 속사屬寺가 되면서 조세 부담이 많아져  쌍봉사의 유지가 어려웠던 것 같다. 죽수서원은 기묘사화로 능주로 유배되어 사사된 조광조를 배향한 서원이었다. 그 이후 쌍봉사에 대한 갖가지 징수가 그치지 않자 정조조에 승려들이 호소하였고, 그에 따라 전라도 능주 쌍봉사 교폐 절목全羅道綾州雙峯寺矯弊節目이 내려졌다.


임란 후 1628년 요의 선사了誼禪師가 대웅전을 중수하였고, 1637년 수인守印이 명부전을 짓고 지장보살과 시왕탱화를 봉안하였다. 1650년 웅준雄俊이 동부도東浮屠)를 만들었고, 1677년에 선익 화상善益和尙이 명부전 시왕상과 사천왕상을 만들었으며, 1679년에는 동쪽 기슭에 불묘佛墓를 만들어 구리로 만든 비로자나 삼존불을 묻었다. 1688년에는 수열 선사守悅禪師가 치달루致達樓를 만들었고, 1690년에 대웅전 중건 불사를 하였다. 1694년 극락전에는 아미타 삼존불을, 대웅전에는 석가불을 봉안하였다. 1724년 치현(致玄)이 대웅전을 3차 중수하고, 1761년 일규(一奎)가 동 부도와 서 부도를 중수했으며, 1774년 불유청佛油廳·상경청上京廳·잡물청雜物廳·삼보청三寶廳·본전청本箋廳 등을 건립하였다. 1786년에는 쌍봉사사 사적비雙峯寺寺蹟碑를 건립하였으며, 1802년에는 우철禹轍이 쌍봉사 기념 합록雙峯寺記念合錄을 편찬하였다.

일제 강점기인 1911년 사찰령(寺刹令)으로  대흥사의 말사로 편재되어 본사(本寺)의 사격(寺格)을 잃었고, 1935년에는 오백 나한상을 백양사로 옮겨 봉안하였다. 한국전쟁으로 전화를 입어 대웅전과 극락전만 남은 사찰이 되었다.삼층 목탑식 전각이었던 대웅전은 보물 제163호로 지정되었으나 1984년 소실되어, 1986년 예전의 실측 자료를 토대로 복원하였다. 1994년에는 연못을 복원하였고, 이후 발굴과 복원이 계속되고 있다...향토문화대전에서 발췌

 

 

일주문

 

 

연지.1994년

전혀 기억속에 남아 있지 않다.

 

 

천왕문.

옛답사기에는 해탈문으로 기록되어 있어 이후 사천왕을 봉안한 듯.

 

 

대웅전

법주사 팔상전과 더불어 현존하는 귀한 목탑형 전각이다.

임란후 1628년 중수한 것으로 추정되었던 대웅전은 보물 제163호 이었으나, 1984년 소실되어 1986년 복원하였다.

 

 

 

 

 

목조 삼존불.1694년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아난존자와 가섭존자를 협시로 모신 삼존 형식이다.

본존은 방형 상호에, 고개를 숙인 조선 후기의 불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나발, 낮은 육계,중간 계주를 표현하였고, 백호를 새겼다.

귀는 크고  목에는 삼도가 있다. 법의는 통견이며,  군의의 상단 옷 주름은 규칙적으로 주름을 잡아 앙련형으로 마무리하였고 매듭은 보이지 않는다. 복부에는 넓은 U자형이 양각되었고, 발목에서 흘러내린 의문은 양 무릎 밑까지 넓게 퍼져 있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이다. 불상 하부에서 묘법연화경 2책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1984년 화재에도 현판과 더불어 피해를 입지 않아 여간 다행스럽지 않다.

 

 

호성전.

2005년 답사기에도 언급하였듯이 정丁형 사찰건물은 선암사 원통전, 여수 흥국사 원통전, 그리고 임진왜란 이전 여러 호남 사찰의 관음번에 많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백제계와 연관을 짓는 견해도 있다. 또한 왕릉 앞의 정자각과 연결하여 원당사찰의 제향 공간이라는 설도 보인다.

 

 

개산조 철감도윤(우측), 조주 선사(좌측)

철감 선사와 조주선사는 중국 남전 보은 스님의 법제자로 6조 혜능-마조-남전의 선맥을 잇고 있음을 상징하여 모신 듯 하다.

 

 

극락전.

두 그루 단풍나무 사이로 보이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다포계양식의 건물로 현재 쌍봉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이다,

 

 

목조아미타불 삼존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를 협시로 두었으나, 1989년 8월경 양 협시불이 도난당하여 새로 조성하였다.

아미타여래는 1694년(숙종 20)에 조성한 대웅전 목조 삼존 불상과 크기와 수인만 다를 뿐 조각 형식이 매우 흡사하다.

 


나한전

 


석가여래와 16나한을 모셨다.

 

 

 

 

지장전

 

 

목조아미타불, 시왕상

조성 발원문과 능주지 사자산 쌍봉사 제전 기문 집록(綾州地獅子山雙峰寺諸殿記文輯錄), 쌍봉사 사적기(雙峰寺事蹟記) 등을 통해 이 상은 17세기 중후반 호남에서 활동한 운혜(雲惠)를 비롯한 그의 일파 조각 승들이 참여하여  1667년에 제작한 불상이라고 전한다.

 


시왕상

 



철감선사 부도.부도비

 

 

철감선사 부도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신라 시대 부도이다. 하대와 상대로 이루어진 기단부와 탑신부, 결실된 상륜부로 이루어진 팔각 원당형의 격식을 제대로 갖추었다. 평면이 팔각형을 이루고 있음은 통식에 속하는 작풍이고 2단을 이룬 하대석에는 하단에 운문(雲紋), 상단에 사자를 조각했고 상대석에는 앙련(仰蓮) 위에 팔각 괴임대가 있다. 탑신에는 문비(門扉)와 사천왕 입상, 비천상 등이 조각되었고 옥개석은 기왓골을 조각하되 막새 기와까지 표현하여 목조 건축의 의장까지 보이는 등 석조 건축물로서는 물론 조각으로서도 극치를 보이고 있다.

대부분 잘 남아 있으나 아쉽게도 꼭대기의 머리 장식은 없어진 상태이다. 탑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기단은 밑돌·가운데 돌·윗돌의 세 부분으로 갖추어져 있으며, 특히 밑돌과 윗돌의 장식이 눈에 띄게 화려하다. 2단으로 마련된 밑돌은 마치 여덟 마리의 사자가 구름 위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저마다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시선은 앞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 윗돌 역시 2단으로 두어 아래에는 연꽃 무늬를 두르고, 윗 단에는 불교의 낙원에 산다는 극락조인 가릉빈가(伽陵頻迦)가 악기를 타는 모습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탑신은 여덟 모서리마다 배흘림이 있는 둥근 기둥 모양을 새기고, 각 면마다 문짝, 사천왕상, 비천상 등을 아름답게 조각하였다. 지붕돌의 상부 낙수면에는 기왓골이 깊게 패여 있고, 각 기와의 끝에는 암막새와 수막새 기와의 무늬가 표현되어 있으며, 처마에는 서까래와 부연까지 사실적으로 조각하였다. 상륜부는 부재를 꽂았던 구멍만 지붕 위에 남아 있을 뿐이다."...향토문화대전

 

 

 

 

 

 

 

 

 

 

철감선사(798~868) 부도비.

경문왕이 시호를 철감이라 내리고 승탑과 탑비를 세웠다.

"비신이 결실되고,  귀부와 이수만 전한다.
네모난 바닥돌 위의 거북은 용의 머리를 하고 여의주를 문 채 엎드려 있는 모습이다. 귀부의 네 발은 발가락이 3개씩인데 오른쪽 앞발만 발가락을 위로 들고 있어 생동감을 주고 있다. 머리 위에는 뿔이 하나 있으며 입가에는 날개 같은 것이 있다. 목 가운데에는 복갑(腹甲) 형식의 중첩된 문양이 정연하다. 등은 중곽육각귀갑문이 선명하다. 귀갑의 바깥 선에는 귀갑문이 반으로 잘린 듯 옆으로 선명하게 돌려져 있다. 등 가운데에는 장방형의 비좌를 만들고 비좌 4면에는 구름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그 위로 1단의 받침대를 갖추고 32판의 연판문을 돌리고 그 윗면에 3단의 각과 굄을 조각하였다."...향토문화대전

 

 

쌍봉산 고 철감 선사 비명雙峯山故澈鑒禪師碑銘

제액에 세로로 2행의 명문을 새겼다.


이수는 비몸돌을 덮고 있는 밑면을 제외한 5면에 운룡문을 가득히 조각하였다. 앞면에는 3마리의 용이 좌우와 가운데 윗단에서 꿈틀거리고 있으며, 뒷면에는 2마리의 용이 서로 몸을 뒤틀면서 허공을 나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이수의 정상부에는 보주형 귀꽃 3개가 솟아 있었으나 오른쪽 것은 4각형의 구멍만 뚫려 있고 귀꽃은 유실되었다. 

 

 

 

 


 

부도전

쌍봉사사적비雙峯寺寺蹟碑. 관찰사윤공웅열중수영세불망비觀察使尹公雄烈重修永世不忘碑. 부도 5


가 있습니다. 쌍봉사 사적비에 의하면 1786(정조 10)에 쌍봉사의 성연스님이 김종수에게 부탁하여 쌍봉사 사적을 짓고, 황운조가 글씨와 전액을 겸해 써서 9월에 비를 세웠다고 합니다雙峯寺寺蹟碑)ㆍ관찰사윤공웅열중수영세불망비(觀察使尹公雄烈重修永世不忘碑)

 


서암당瑞巖堂 부도

 

 

당호가 새겨지지 않은 부도(1)

 

 

당호가 새겨지지 않은 부도(2)

 


계파당溪波堂 부도


 

계월당繼月堂 부도


 


관찰사윤공웅열중수영세불망비觀察使尹公雄烈重修永世不忘碑. 고종 34년(1897)에 세움. 

전라도 관찰사 윤웅열(尹雄烈)이  화순 쌍봉사 부근에 산렵을 하던 중에 노루를 따라 뒤쫓아 가다보니 노루가 칡덩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노루가 들어간 칡덩굴 안에 부처를 모신 법당이 있었다. 관찰사는 깜짝 놀라 " 부처님을 보살펴 주도록 불보살께서 계시를 내려 주신 것"으로 믿고 쌍봉사를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쌍봉사사적비雙峯寺寺蹟碑


1786년 정조 10년에 쌍봉사의 성연스님이 김종수에게 부탁하여 쌍봉사 사적을 짓고 황운조가 글씨와 전액을 겸해 써서 세움


 


고려초 쌍봉사의 사세를 짐작할수 있는 김극기의 한시가 전해온다.


丹靑敎輝紫翠問 단청한 집이 붉고 푸른 숲 사이로 서로 비치니

境閑俗眠未會看 지경이 한가한 것 속된 눈으로 일찍이 보지 못한 것일세

鶴飛碧落辭支遁 학(鶴)은 푸른 하늘에 날아서 지둔(支遁)을 하직하고

魚戱金池感惠寬 물고기 금빛 못에 놀면서 혜관(惠寬)에게 감사하네

亂嶺玉簪當檻秀 어지러운 봉우리는 옥잠(簪)같이 난간에 이르러 빼어났고

驚端珠佩難階寒 놀란 여울은 구슬 패물처럼 뜰에 떨어지는 소리로세

談餘忽見曹溪水 말하다가 갑자기 조계(曹溪)물을 보니

萬丈蓮天起怒瀾 만길 하늘에 연해 노여운 물결 일어나세


201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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