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함양군

함양...상무주암 회암당 부도

임병기(선과) 2016. 8. 29. 18:13

 

 

 

 

영원사

 

금년 여름

무엇에 홀린듯 벌써 3번째 지리산 자락 부도 탐방이다.

오늘은 몇년전 인지하고도 깜빡하였던 상무주암 부근 석종형부도를 들리기 위해 아침 일찍 영원사에 도착했다.

예전 탐방시에 기인을 만난 덕분에 뵌 영원사 부도전 입구에는 안내 이정표가 세워졌고, 영원사 우측 산능선에 있었던 청매선사부도는

경내로 옮겨져 있었다.

 

 

 

청매선사 부도.

(옛님의 숨결. 함양...영원사 참조 요)

 

오늘 산행 거리는

영원사 뒤편 바자울 울타리 사이로 난 산길 1.8KM

영원사~빗기재 0.8KM. 빗기재~상무주암 능선 1KM 구간이다.

 

그러나

상무주암 주변에 위치한 부도에 관한 정확한 정보는 넷상에서 찾지 못했다.

하지만 몇가지 단서를 종합해보면

첫째. 빗기재에서 상무주암 직전 우측 소로로 내려가야 함

둘째. 전망대에서 영원사 방향 20미터 좌측 소로

 

상무주암을 다녀온 경험이 있어 위의 단서만으로 쉽게 뵐 자신이 넘쳤다.

결론적으로 오산이었다.

위의 20미터에 집착한 결과는 참담했다.

20미터가 아니고 200미터이었기 때문이었다.

 

 

전망대

일사천리로 전망대에 도착

오늘은 시계가 제로이지만 지리산 봉우리가 한눈에 조망되는 장소로 상무주암 약 200미터 전이다.

 

전망대는 부도 탐방의 포인터

전망대에 도착후 20미터 되돌아와 산죽이 울창한 산속을 30여분 헤매이었지만 길다운 길도 발견하지 못했다.

땀 많은 중생 숨이 콱콱 막혀 휴식도 취할 겸 상무주암 스님께 문의 하기로 마음 먹었다.

 

 

상무주암.

늘 걸쳐져 있던 빗장(?)이 내려져 있어 자연스럽게 들어가 스님을 찾았더니 참선 복장의 예쁜 분이 나오신다.

자초지종을 전했더니 부도 자체를 모르는 분으로 기다려 보라는 말을 남기고 좌선대 방향으로 들어가버린다. 잠시 후 스님께서도 모르신다고 말씀하시며 난감해 하신 표정이 역력하다. 틈새를 노려 스님께 직접 말씀 드려 보겠다며 필단 사리탑 옆으로 진입하였다.

 

 

필단사리탑(옛님의 숨결.함양...상무주암 참조 요)

 

온몸에 담요를 걸친 스님.

-부도는 와 찾노?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없어.씰데없는 짓 하지 말아라.

 

다시 돌아 나와

전망대 20미터 지점을 30여분 이상 씰데없는 짓 하였으나 허탕!!

 

 

결국 포기하고 내려오는 길

좌측 편에 토끼 길처럼 작은 소로가 눈에 들어와 긴가민가하고 진입하였더니 길에서 불과 10미터 하단 잡초로 뒤덮힌 넓은 터에 부도가 있었다.

 

 

최소 3기 정도의 부도가 봉안되었던 부도전으로 추정되었다.

 

 

전형적인 조선후기의 부도로

방형 지대석위에 아무런 조식이 없는 탑신 위에 큼직한 보주를 올렸다.

 

 

보주는 별석이다.

 

 

 

 

당호를 새긴 듯한 명문이 보인다.

별생각 없이 촬영하였는데 답사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명문이 회암당晦庵堂인 줄 알았다.

 

회암당晦庵堂 스님?

 

우선

부도전 길부터 안내하겠다.

 

 

영원사에서 빗기재 0.8KM

빗기재에서 상무주암 방향 2번째 안내 표식이다.

안내문에 영원사 1.5KM 글처럼 상무주암 300미터 이전에 설치되어 있다.

 

 

위 안내 표식을 돌아서서 상무주암 방향 30미터 전방 작은 개울 직전 우측 소나무에 표식이 있다.

내가 인식하지 못했지만 앞선 분이 흰 리본을 높게 걸어 놓았다.

그 아래 가지에 3가닥 청색 노끈은 내가 걸어 두었다.

 

여기로 작은 길이 보이며 10여미터 하단에 부도전이 자리하고 있다.

 

 

휴~

그냥 부둥켜 안고 한참이나 얼굴을 부비며 희열을 만끽하였다.

()()()

 

 

부도의 주인공 회암당晦庵堂  스님은 누구일까?

 

검색해보면 조선후기 김천 청암사에서 주석하셨던 큰 스님이다.

청암사 회암스님과 상무주암 부도의 스님이 동일인 이라는 단서가 있을까?

 

 

청암사 회암당부도.

방형 대석위에 1단 받침을 두고 전형적인 종형 탑신위에 보주를 올렸다.

당호는 새기지 않았다.

스님이 입적한 1741년에 조성하였다.

 

부도는 비공개지역에 위치하여 출입금지 구역이다.

나는?

 

 

김천 청암사 천왕문 옆 회당비각晦堂碑閣

회암대사 비각도 아니고 회암당晦庵堂 비각도 아닌 회당비각晦堂碑閣이다.

 

 

회당대사비명은 결국 부도비이다.

 

 

회당대사비명...글, 사진 출처/직지사 성보박물관

 


 

회당대사비명晦堂大師碑銘
 
조선국 불영산 쌍계사 정혜대사비명과 그 서문
수충갈성분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풍원부원군 조현명 짓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 서명균 쓰고,
중훈대부 전행 사간원 정언 김상복 전액
 
정혜대사는 총명하고 (학문과 도덕이) 깊고 넓었으며 강설이 무르익고 능란하여 이르는 곳마다 학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서교대종사西敎大宗師라고 일컬어진지 거의 40년이 되어서 돌아가셨다. 그의 문도인 채청彩晴 스님이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비명碑銘을 청하였다. 정혜 스님은 내 (사촌)동생인 동계거사東谿居士와 서로 친하였다. 내가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스님이) 징청각澄淸閣(경상감영)으로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소리기생이 가득한 가운데 손님과 더불어 시와 술을 즐기고 있었다. 스님은 그 사이에 계시면서도 태연하고 느긋하게 웃으면서 말씀하셨는데, 눈은 마치 보지 않는 것 같았고 귀는 흡사 듣지 않는 듯하여 내가 마음으로 스님을 공경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내가 불가佛家의 글을 일삼지 않고 비록 유가儒家의 일원이나 의리상 사양할 수가 없었다. 그 행장에 다음과 같이 일렀다.


스님의 속성俗姓은 김씨로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난 지 9세가 되자 스스로 범어사 자수선사自守禪師에게 출가하였다. 자수선사는 스님의 총명함과 지혜를 남달리 여겨 충허장로 虛長老에게 보내었다. 가야산에 들어가서는 보광화상 光和尙에게 참례하였다. 화상이 비로소 (스님에게) 구족계를 주었다. 호남을 유력遊歷하여 설암雪巖 스님에게 참문參問한 뒤 이윽고 보광 화상에게 돌아왔다. 이 때부터 명성이 크게 드러나서 좇아 배우는 자들이 날로 많아져 마침내 강단講壇에 올라 불자拂子를 세우니당시 스님의 나이는 27세였다. 이윽고 다시 여러 스승들을 두루 참례하니 지혜가 더욱 드러나게 되었다. 하루는 '남의 보배를 헤아려 봐야 무슨 이익이랴!' 하고 탄식하더니 금강산에 들어가 좌선하였다.

 

얼마 뒤 돌아와서는 석왕사·명봉사·청암사·벽송사 등 명찰名刹에서 강의를 하다 돌아가시니 청암사에서 시적示寂하였다. 스님은 만년에 항상 강생講生들을 사절하여 흩어버리고 마음을 기울여 내면을 궁구하고자 하였으나 강생들이 기꺼이 떠나지 않음으로 스님 또한 강석을 능히 거둘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뜻은 일찍이 참선參禪으로 돌아가고자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다비茶毗할 때 우박이 내리고 기이한 빛이 비쳤다. 부도를 세워 사리를 불영산과 지리산에 모셨다. 스님은 을축년(1685) 5월 2일에 나서 신유년(1741) 5월 20일에 돌아가셨다. 세수世壽는 57세이다.

 

스님은 성품이 온아했으며 큰 도량이 있었고 작은 예절에 구애받지 않았다고 한다. 입으로 지껄임은 기세등등하되 심학心學은 거칠어지고 교종敎宗은 숭상하고 선지禪旨는 어두워지니, 유가와 불가가 그 길은 다르지만 말폐末弊는 대체로 비슷하다. 스님은 능히 이런 점을 살피고서 그것을 돌이키려 하였으니 우리 유가의 이리저리 밖으로만 치닫는 자들은 가히 경계할 바를 알 수 있으리라. 명銘하여 이르노니 가지 끝의 가지를 살리는 것이 어찌 뿌리 중의 뿌리를 북돋우는 것만 하겠는가. 사방 교외의 소와 양들 돌이키지 않으니, 아! 우리 선비들이 그대의 선에 부끄럽구나. 
 
숭정기원 후 두 번째 갑자년(1744) 8월 일 세움

 

몇가지 재미 있는 비문 내용을 짚어 보자.

 

1. 불령산 청암사가 아니라 쌍계사로 되어있다.

    즉.1744년 경에는 청암사가 쌍계사의 말사로 추정해볼 수 있다. 현재 쌍계사지에는 부도 1기만 유존하며, 배례석은 얼마전 청암사 보광전 앞으로 옮겨왔다. 또한 시왕상은 김천 시내 모사찰에 봉안되어 있다.

 

2.비문은 동국진체로 새겨져 있다. 원교이광사와 인맥이 형성된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비문을 비문을 쓴 서명균은 아버지 서종태徐宗泰(1652~1719)의 단정한 필체를 본받아 정갈하면서도 시원스런 글씨를 썼는데, 힘있고 활달한 필체를 구사했던 장인 김구의 영향도 받은 듯 하다. 김구의 글씨로 선산 <김주신도비金澍神道碑>(1699)가 있는데 이 비를 보면 서명균이 쓴 정혜대사비의 글씨와 상당히 흡사하다.
 
한편 서명균의 아들인 서지수徐志修(1714~1768)는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절대적인 공헌을 하였던 인물로 1766년에는 영의정까지 올랐다. 그 역시 글씨에 일가를 이루었는데 아버지와 친했던 조선후기의 명필 백하 윤순白下尹淳(1640~1741)에게서 필법을 배웠다고 한다. 윤순은 우리 고유의 필법인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圓嶠李匡師(1705~1777)의 스승이기도 하다." ...직지사성보박물관

 

3.회당스님과 글을 지은 조현명은 대구 경상감영에서 만난 인연으로 글을 찬한 것 같다.

 

4.회당 스님은 청암사 이전에 호남지방에서 활동을 많이 하였다.

 

5.1741년 입적하자 청암사와 지리산에 부도를 조성하고 비는 3년후 1744년에 부도비(?)를 세웠다.

 

6. 동일한 인물인 회암정혜대사를  회당晦堂으로 칭하였다.

 

위 5.6번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자.

 

1.부도를 지리산에 분사리한 까닭은 무엇일까?

 (확신할 수 없는 설임을 먼저 밝힌다)

 

비문에 명기한 것 처럼 벽송사에서 오래 있었으며 그에게서 공부한 큰 스님 두 분이 함양 용추사(장수사)와 상무주암  아래 영원사에 오래 주석하시고 입적하시었다. 그런 연유로 회암대사가 입적후 영원사에 주석하던 조선후기 화엄학의 고승이었던 설파당스님이 중심이 되어 지리산 자락 함양땅 상무주암에 후학들이 봉안하지 않았을까?

 

 

용추사 문곡대사 부도

 

1)용추사 문곡대사 비명文谷大師碑銘.

大師法諱永誨。十三。出家入長水寺。投玅彦師。旣數年。玅彦異其聰慧。諭之曰。吾不敢闍梨爾。爾其以晦堂爲歸。晦堂卽定慧大師。以華嚴宗主名

대사의 법휘는 영회(永晦)이다. 13세에 출가하여 장수사(長水寺)에 들어가 묘언(妙彦) 스님에게 투신하였다. 이미 몇 해가 지나가자 묘언이 그 총명하고 지혜로움을 기이하게 여겨 타이르기를 "나는 너를 가르칠 수 없다.너는 회당(晦堂)을 귀의처로 삼아라."고 하였다. 회당은 곧 정혜대사(定慧大師 1685~1741 원호는 회암晦庵이다)니 화엄종주로 유명하였다. 스님은 힘써 귀의하였다. 

 

***용추사 문곡대사 비문에 의하면 회암이 문곡대사의 스승임을 알 수 있으며, 문곡대사 부도는 함양 용추사에 있다.

 

 

영원사 설파당탑(雪坡堂塔)...우측사진

 

2)영원사 설파당대사 비문雪坡大師碑銘

大法師名尙彦。湖南茂長縣人。國朝孝寧大君十一世孫也。父泰英。母坡平尹氏。早失怙恃。家甚貧無以自資。年十九。投禪雲寺。薙髮于雲暹長老。受偈於蓮峯虎巖兩和尙。又參晦菴丈室。以禪系言之。於西山爲七世孫

(중략)及老入靈源立死關。以念佛爲課。日輪千念十周者十有餘年。庚戌臘。示微辛亥正月三日。怡然入寂。壽八十五。臘六十六。

법사의 이름은 상언(尙彦 1707~1791)이고 호남 무장현(茂長縣 :지금 고창군 무장면) 사람이다. 효령대군의 11세손이다. 부친은 태영(泰英)이고 모친은 파평윤씨이다. 조실부모하고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스스로 살길이 없었다. 19세에 고창 선운사(禪雲寺)에 투신하여 운섬(雲暹) 장로에게 머리 깍고 연봉(蓮峯)과 호암虎巖(체정體淨, 1687~1748 환성지안의 제자임) 두 화상에게 게송을 받았다.

 

회암(晦庵:정혜定慧 1685~1741) 스님에게 배웠다. 선종(禪宗)의 계보로 말하면 서산(西山)에게 7세손이 되고 환성(喚醒:지안志安 1664~1729)에게 손자가 된다. 33세에 대중들의 강력한 요청으로 용추(龍湫) 판전(板殿)에서 강좌에 올랐다.(중략)노년에 영원사(靈源寺:함양군 마천면 삼정동 소재)에 들어가 죽을 각오로 염불로써 일과를 삼았다. 날마다 천 번 염불하는 것을 열 번 되풀이하였는데 10여 년 동안 이어졌다. 정조 14년(1790) 섣달에 작은 병에 걸렸고 15년(1791) 1월 3일에 기쁜 표정으로 열반에 들었다. 나이 85세 법랍 66세였다.

 

번암집樊巖集 <제57권》

<역주>: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

참고문헌 : 함양군,『문화재도록』, 1996

 

2.회암晦庵과 회당晦堂 문제.

 

인터넷상의 자료에는 주자(주희)의 호 회암(晦庵) 때문에 회당으로 하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글이 보인다.주자학이 통치 철학인 조선에서 대유학자가 승려에게 주자와 동일한 격을 지켜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공감이 가는 내용이다. 위에서 인용한 문곡대사비문에서도 번암 채제공은 회당으로晦堂 글을 지었으나, 설파당 대사 비문에는 회암晦庵으로 명기하였다.(자료에 따라 암을 庵과 菴으로 달리 표기되어 혼란스럽다)

 

그런 연유로 청암사 비명을 회암晦庵을 회당晦堂으로하였겠지만 어디 지리산 상무주암 골짜기에서는 그게 통했겠는가? 회암스님의 제자들은 청암사에서 사리를 모시고 와서 당당하게 스승의 당호로 회암당晦庵堂을 새겼을 것이다.

 

청암사 제자들은 어떠했을가?

비를 세울 당시에는 말도 못하고 속앓이를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지난 후에는 스승의 당호를 되찾아주었다.

 

 

청암사 회암당 정혜진영靑巖寺 晦庵堂 定慧 眞影...직지사성보박물관

 

"회암 스님의 진영은 입적 당시에 제작된 진영이 아니다. <청암사 중수기靑巖寺重修記>(1854)에는 19세기 중엽 청암사에 영각이 다시 세워지고 회암 스님의 진영을 이모해 봉안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근거해서 보면 이 진영은 19세기 중엽에 이모해 그린 작품이다".

즉, 청암사에 회당비각(1744년)을 세운지 100년이 지난 후 진영을 모시면서 스승의 당호晦庵堂 를 되찾아 표기하였다.

 

 

지리산 회암당 부도

 

 

불령산 청암사 회암당 부도

 

단순한 부도 탐방이었으나 당호를 확인 한 후 스님의 행장을 두서없이 찾아 보았으며, 위의 내용들은 개인적인 주관이 이입된 근거가 빈약한 설說임을 밝히면서 글을 마친다.

 

201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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