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함양군

함양...안국사 은광대화상부도

임병기(선과) 2016. 8. 30. 07:41

 

 

정시한.산중일기

1686년 4월


16일 흐림
몸이 좋지 않아 낮에 한동안 졸았다. 저녁을 먹은 후에 남여(藍輿)를 타고 *금대암 [현 금대암]으로 종장인 대오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도로 안국사 향로전 불존 일잠의 방으로 가서 유숙하였다. 군자사에서 승려 선보를 보내와서 돌아오려 하자, 승통 일겸과 원기 등이 꿀물과 맛있는 과일로 대접하였다. 진사 박세혁을 군자사에서 보았다. 아침에 관아의 말과 관노인 자천을 읍내로 돌려보냈다.

17일 가끔 흐리다가 맑음
*안국사 [현 안국사]에서 유숙하였다. 아침을 먹은 뒤에 벽송암 종정인 천륜이 찾아와서 오랫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몸이 좋지 않아 낮에 한동안 졸았다. 저녁을 먹은 뒤에 천륜 대사가 돌아갔다. 일겸과 원기와 함께 걸어서 서암으로 갔는데, 본사와의 거리는 겨우 몇리밖에 되지 않은 가까운 곳이었다. 지세가 높고 광활하여 바로 지리산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 금대암과 차이가 없으나 어제 금대암에서는 구름이 잔뜩 끼어 볼 수 없었는데 오늘은 늘어선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 있고 상봉에 눈이 녹지 않아서 보는 눈과 느끼는 마음이 모두 후련하였다. 노승 정찬이 나와서 영접하였다. 잠시 앉아 있다가 본사로 돌아왔다.


18일 흐리다가 맑고 추웠음
안국사에 머물면서 10여 장이나 되는 고향 편지를 썼다. 저녁 식사를 한 뒤에 법당에 나가서 앚아 있었더니, 두 사람의 객승이 와서 인사를 하였다. 한 사람은 천정이고 다른 한 사람은 영기였는데, 천만 뜻밖에 타향에서 이 두 사람을 만나서 매우 기뻤다. 이 두사람이 현재 상고대암에서 가사를 만들고 있었다. 함께 머물면서 여름을 지내기로 하고 바로 돌아갔다.

19일 맑고 추웠음
새벽에 그릇에 담아둔 물이 얼었다. 아침을 먹은 뒤에 견여를 타고 안국사에서 출발하니, 승통인 일겸이 냇가에까지 따라왔다. 군자사 승려 법안과 선보 등이 가마꾼을 데리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냇물을 건너서 나귀를 타고 10여리를 간 다음, 비로소 가마를 타고 5리쯤 가서 두타암에 이르렀다."

 

산중일기를 펼쳐 정시한이 기록한 안국암 부분을 옮겨올려고 했으나 게으런 성정으로 편한 길을 택했다. 위 일기는 지리 99 홈페이지에 등재된 발췌된 내용을 그대로 가져 왔다.

 

 

2008년 4월 13일

은광국사 부도를 뵙지 못한 안국사 답사는 미완이었다.

 

 

 

금대암을 둘러보고 내려오면서 안국암에 들렸다. 안국암은 조선 태종3년 (1403)에 행호조사가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며, 전국의 3안국(지리안국, 서산안국, 금산안국)이 국태민안을 비는 국찰 암자로 세워진 안국암의 정혈에 자리 하고 있다.

 

또한 이곳의 부도(산중턱에 있어 직접 보지 못했다) 1기는  실상사 철불처럼 한반도 혈이 현해탄으로 누설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비보책으로 알려져 있다.
 

 

안국사 무량수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머리를 약간 앞으로 숙였으며 결가부좌하였다. 수인은 아미타인이며 신체에 비해 얼굴이 큰 편으로, 어깨는 넓고 당당하다. 법의는 통견, 나발, 중간계주, 정수리에는 원통형 정상계주가 있는 조선후기 불상의 일반적 특징을 보여준다. 

 

 

암자 곳곳에 부재들이 흩어져 있다.

 

 

 

안국사 입구  부도전이다. 

 

2008.04.13

 

 

 

왜 그 기분 아는가?

불전함에 보시를 할려고 지갑을 꺼냈는데 만원, 오만원권만 들어 있을 때의 묘한 갈등을...

즐건 마음으로 올려야 할 보시인데,순간 망설이었다.

 

불전에 불경을 범한 이런 날에는 조심을 해야하기에 처사님이 알려준 산길을 조심조심 올랐다.

 

 

은광대화상 부도

두터운 방형 지대석.하대석.중대석.상대석. 탑신. 옥개석을 갖추었으나 상륜부는 결실되었다.

하대저석이 없어 복련이 크게 보이며 괴임위에 한 돌로 팔각중대석을 올렸다. 중대석에는 부도의 주인공 '은광대화상' 명문이 있으며,복련을 조식한 상대석 상부에는 면마다 안상을 새겼다. 옥개석 상부에는 기왓골, 암수막새가 확연하고 하부는 겹처마(?)를 표현 한 것 같다.상륜부는 옥개석과 한 부재인 받침만 남아 있다. 


우리카페 달넘새님은 고려초기에 부도에 나타나지 않은 아래 특징으로 미루어 조선초기 부도로  추측한다.

-하대석의 상대석,하대석이 일석

-하대석,중대석이 일석

-상대석 앙련 상부를 갑석형으로 치석

-갑석형 면석의 안상 조식


불행이도 은광대화상에 관한 행장은 남아 있지 않다.

일설에는 안국사와 금대암을 창건한 행호조사의 부도로 보는 견해도 있다.

행호行乎는

"선승(). 해주최씨(). 최충()의 후손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계행()이 뛰어났고 효행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법화경』의 이치를 깨달아 천태종의 지도자가 되었다. 태종이 치악산 각림사()를 짓고 창건대회를 베풀 때, 그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였고, 또 장령산() 변한소경공() 묘소 곁에 대자암()을 세우고 주지로 임명하였다.


세종이 즉위하자 판천태종사()로 임명하였으나 얼마 뒤 벼슬을 버리고 두류산()에 금대사()·안국사()를 창건하였고, 천관산에 수정사()를 지었다.왜적의 침입으로 불타버린 만덕산() 백련사()를 효령대군()의 도움을 받아 1430년(세종 12)부터 중수하기 시작하여 1436년에 준공하였다. 조선 초기 유생들의 강한 척불론 속에서도 효령대군 등의 귀의를 받아 왕실에 대한 불교 보급에 힘썼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부도 앞 부재. 결실된 상륜재?


 

지대석


 

기단


 

상기단 안상

 


탑신

 


지붕돌 하부 



기왓골

 

 


우리나라의 3안국(함양 안국사, 당진 안국사, 무주 안국사)사찰의 하나인 함양 안국사에 봉안된 은광대화상 부도는 실상사 약사여래처럼 나라의 정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비보하기 위한 부도라고 알려져 있으며, 일설에는 서산대사의 모친 부도라는 달빛에 물든 야사가 전해온다.

 


안국사 부도전

안국사 입구, 행호조사모전(김)탑비.행호조사모부도.금송당 부도. 부도비가 모셔져 있다.

탑신의 명문이 처음부터 새겨진 명문인지 불분명 하다.

그래서인지 문화재청홈페이지에는 주인공을 밝히지 않고 있다.

 


금송당사리탑琴松堂舍利塔.

행장이 전하지 않는다.


장방형 지대석 위에 앙련을 조식한 원형 기단석을 놓았다.

탑신에 堂 명문을 새겼다.

팔각 옥개석의 낙수면 물매가 깊고 전각의 반전은 희미하다. 상륜부는 결실되었다. 

 

 

 

 


행오조사모탑 行乎祖師母塔.

명문에는 그렇게 새겨진 것 같다.

문화재청에 홈에는 주인공을 밝히지 않았다.


팔각원당형 부도로

하대석과 상대석에  복련과 앙련을 조식하였다.

탑신 아래에 북모양의 괴임을 끼웠다. 괴임의 볼록한 부분에는 꽃이 새겨진 띠를 둘러 놓았다.

팔각 옥개석 상륜은 결실된 상태이다.

 

 

 

 

 

 


행호조사모전탑行乎祖師母全(金)塔.

명문은 그렇게 보인다.

 


부도비.

명문 식별이 어려운 상태이었다. 


서상대사 부도비?

금송당 부도비?

 


부도전에는 안국사 경내에 4기 부도가 있다는 안내문이 설치되어 있다.

1기는 은광대화상 부도,  2기의 부도는 부도비와 함께  부도전에 남아 있다.

그렇다면 서상대사 부도는? 

육안으로 구분이 힘든 맨 우측 부도비 앞에 서상대사 부도가 있었을까?

 

 

1686년.4월 17일

저 산을 바라보며

정시한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지세가 높고 광활하여 바로 지리산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 금대암과 차이가 없으나 어제 금대암에서는 구름이 잔뜩 끼어 볼 수 없었는데 오늘은 늘어선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 있고 상봉에 눈이 녹지 않아서 보는 눈과 느끼는 마음이 모두 후련하였다"

 

2016.08.2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