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함양군

함양...백운암 목조아미타불좌상, 건륭명 동종

임병기(선과) 2016. 6. 10. 22:03

 

 

백운암

절집 분위기 보다는 단촐한 살림집 분위기다.

 

 

목조관음보살과 동종을 다시 뵙기위해 들렸지만

아뿔싸,공사중이다.

그냥 돌아 갈 수는 없어 스님을 찾았더니 부처님 뵙고 가라며 요사 안쪽 문고리를 열어 주신다.

심지어, 사진 찍으려는 나의 본심을 꿰뚤어 보시고는 자리를 슬며시 비켜주기까지 했지만, 오히려 마음은 더 조급하였다.

 

근데

저기 저 일본풍 석등은...

 

 

목조아미타불. 복장의 발원문을 통해 1674년(현종 15)에 근처의 백운산白雲山 영은사靈隱寺에 봉안하기 위해 200명에 달하는 시주자, 발원자들이 동참하여 조성한 불상으로 원래는 아미타여래를 본존으로 좌우에 관음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하는 아미타삼존상으로 조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최근까지 양협시보살의 행방은 몰랐으나  2015년 12월 범어사 원효암 목조관음보살에서 발견된 복장기를 통하여 원효암 관음보살상이 백운암 아미타불의 협시보살로 밝혀졌다(하단의 불교 신문 기사 참조)

 

범어사 원효암 목조관음보살좌상

 

 

반구형의 머리에는 굵고 조밀하게 나발을 부착하여 머리와 육계의 구분이 없으며, 머리의 중앙과 정상에는 초승달 형태의 중앙계주와 원통형의 정상계주가 모두 표현되었다. 큼직한 머리의 크기에 비하여 중앙계주가 다소 작은 편이다. 군살 턱이 없는 방형의 얼굴은 양감이 극도로 제한되어 다소 밋밋해 보이지만, 이는 부처님의 자비나 위엄을 나타내는 정신성을 최대한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내면의 자비와 외면의 엄숙함이 잘 조화를 이룬 이러한 얼굴은 서울 봉은사 목조아미타불좌상(1651년)이나 담양 호국사 목조아미타불좌상(1660년, 장성 백양사 성보박물관 소장) 등과 유사하다.

 

 

수인은 두 손을 모두 무릎 위에 올려 엄지와 중지를 둥글게 맞댄 하품중생인을 결하였고, 손은 따로 제작하여 끼워 넣었다. 착의형식은 두 장의 대의를 두텁게 걸쳐 입은 통견의로, 오른쪽 어깨에는 끝을 살짝 반전시킨 반달형의 대의 자락이 큼직하게 걸쳐져 있다. 오른쪽 어깨에 걸쳐진 대의자락의 주름은 강약을 주어 표현하였고, 못 깃은 좌우대칭으로 반전시켰다.

 

왼쪽어깨에는 두 가닥의 수직 주름이 팔꿈치로 흘러내렸고,  좌측면에는 높낮이를 두어 M자형으로 주름이 잡혀있고 왼쪽어깨로 넘긴 대의의 끝단은 큼직한 잎 형으로 마무리하였다. 크게 연 가슴에는 꽃잎 모양으로 멋을 낸 군의의 단을 표현하였고, 군의를 묶은 띠와 자락은 생략되고 좌우 두 곳을 꾹꾹 눌러 그 여운만을 남기고 있는데, 17세기 불상에서 일반적으로 보이는 표현 양식이다.

 

 

높고 넓은 무릎은 직각으로 처리하여 강직한 힘이 느껴지며, 오른다리를 왼다리 위에 편안하게 올린 길상좌를 취하고 있다. 무릎으로 흘러내린 대의자락은 노출된 오른 발가락을 살짝 덮었고, 무릎 앞쪽에는 八字형의 넓은 띠 주름을 중심으로 좌우로 3-4가닥의 호형주름을 시원스럽게 펼쳐졌으며 그 끝단은 파형으로 마감하였다. 세부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이러한 무릎 주름의 표현은 17세기 중엽 경에 활약한 승일파(勝一派)에서 제작한 불상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전반적으로 이 불상은 탄력적이고 이상적인 불신이 주는 굴곡과 윤곽까지는 세밀하게 표현하지 않았지만, 이는 결국 조선후기 추구한 평담한 미의식이 반영된 결과이다. 그것은 여백을 중시한 굵고 강직한 철선묘의 주름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으며, 이는 같은 시기에 제작된 불상과 공통하는 시대적 미감과 양식적 특징이 투영된 좋은 사례이다.

 

 

전체적으로 이 불상은 군살 턱이 약화된 방형의 얼굴, 엄숙하면서도 자비감을 잃지 않은 상호(相好), 두터운 법의와 간결한 옷 주름이 강조된 불신, 넓고 높은 각진 무릎의 표현 등에서 17세기 중·후반기 불상들과 양식적으로 공통된 특징을 지니고 있다. 특히 이 불상에서 보이는 상호, 착의나 주름의 표현, 두 손을 모두 무릎 두고 결한 하품중생인의 수인, 높고 넓은 무릎에 허리가 다소 길어진 불상의 비례 등은 승일유파에서 조성한 불상들과 친연성이 짙다. 그것은 이 불상을 조성한 성조는 여러 작품에서 승일과 함께 작업을 하였고, 그의 조각유풍을 강하게 계승한 그의 수제자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불상의 제작은 수화원(首畵員) 성조(性照)를 비롯하여 한운(閑云), 자규(自圭), 학청(學淸), 성수(性修), 설매(雪梅), 사원(思遠) 등 7명의 조각승(彫刻僧)들이 함께 제작하였다.

 

 

 

종의 외형은 아래로 갈수록 약간 좁아지며, 고리는 두 마리의 용으로 형상화하였고 천판은 둥글고 낮게 만들었다. 종의 몸체는 횡선으로 공간을 구획하였는데, 상단과 하단에 2줄을 만들어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상단에 있는 횡대 윗부분에는 원형범자문이 둘러져 있다. 몸체 중심부에는 보살상과 연곽이 번갈아 배치되었다. 두광을 갖춘 보살상은 두 손을 모으고 구름위에 서 있으며, 사다리꼴 형태의 연곽 안에는 연꽃 5개가 간략하게 표현되었다. 보살상과 연곽은 종의 몸체에 비해 크게 나타난다. 하단 아래에는 특별한 장식이 없다.

 

남아 있는 건륭32년 乾隆三十二年 명문에 의하면, 동종은 1767년(영조 43)에 조성되었고 봉안 사찰로 추정되는 보운암(普雲庵)이 명시되어 있다. 또한 주종장은 백예적과 안명발이 기록되었는데, 백예적은 옥천사동종(1776년) 제작에도 참여한 장인이다.

 

 

 

2016.05.21

 

문화재 설명문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발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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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 기사


지난 9월2일 범어사 원효암에 모셔져 있던 목조관음보살좌상 복장 유물이 발견돼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불상 속에서는 보존상태가 완벽한 유물 30건이 쏟아져 나와 문화재 전문가들이 환호했다.

복장 속에 반드시 들어있는 경전류와 다라니 후령통 발원문이 깨끗한 모습으로 얼굴을 드러냈다. 발원문 속에는 누가 언제 무슨 연유로 이 불상을 조성했는지 완벽한 정보가 들어있었다. 깜짝 놀랄 정보는 불상 안에만 있지 않았다. 유물을 조사하는 문화재 관계자들에게 원효암에 오랫동안 주석하고 있는 방장 지유스님이 이 불상이 어떤 연유로 원효암에 들어왔는지를 들려주었다. 일제시대 일본인이 이 불상을 가져갔다가 고향으로 돌려달라는 꿈에 시달리다 못해 부산세관에 가져다 놓았다가 범어사로 왔다는 전설 같은 영험담이었다.

복장 속을 들여다 보기 전에 외형만으로 조선 후기 영남지역에서 유행했던 불상임을 안 전문가들은 부산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하면서 원래부터 범어사 소장품으로 추정했었다. 그런데 방장스님의 전언(傳言)에 따라 이 불상의 원 생산지가 범어사가 아님이 드러났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9월 복장유물 발견 당시 알려지면서 부산은 물론 전국적으로 많은 관심을 끌었다. 전문가들이 지난 3개월간 조사한 끝에 밝혀낸 더 많은 사연들이 학술세미나를 통해 공개됐다. 지난 9일 동아대 부민캠퍼스에서 ‘범어사 원효암 목조관음보살 좌상과 복장유물’ 학술세미나가 열렸다. 이날 세미나에는 범어사주지 수불스님과 국장스님 및 스님 20여명과, 동아대 권오창총장, 신도 500여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연구결과는 모두 세 가지 분야에서 이뤄졌다. 불상의 형식과 복장물 중에서도 발원문의 내용 과 불상 조성 책임자인 성조스님에 관해 집중적으로 연구한 이희정(문화재청 문화재감정관실) 감정위원의 ‘범어사 원효암 목조관음보살좌상연구’ ,서지학적 관점에서 복장 속 전적(典籍)을 연구한 윤상기(동의대 문헌정보학과) 교수의 ‘복장전적’, 그리고 과학적 기법을 동원하여 불상의 재질, 훼손 등을 살펴보고 보존처리 방안을 연구한 이수예(사찰문화재보존연구소)이사장의 ‘과학조사와 보존처리 방안’이다. 세 사람의 발표에 앞서 원효암 불상 복장 유물 처리와 연구를 총괄한 정은우(동아대석당박물관) 관장이 이 불상의 총체적인 내용과 특징을 발제문 형식으로 발표했다.

 

정은우관장이 발원문 분석을 통해서 정리한 이 불상의 가치와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불상의 정확한 정체가 밝혀졌다. 정관장은 “정확한 봉안처와 제작연대, 시주자 명단 성조(性照)라는 조각승 까지 정확하게 밝혀진 1674년에 제작된 불상”이라고 밝혔다. 발원문에 의하면 함양 백운산 영은사에서 조성했던 아미타불의 협시보살인 관음보살로 추정된다. 영은사는 폐찰 되고 삼존불 중 본존불은 영은사 옆 함양 백운암에서 봉안되어 있다. 백운암 아미타불 복장에서도 발원문이 발견됐는데 원효암 발원문과 거의 동일한 내용이어서 두 불상이 같은데서 나왔음이 입증됐다.

두 번째는 이러한 이유로 인해 나머지 한 불상도 어느 곳에선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으며 못 찾는다 해도 협시불 1구가 나왔으므로 이를 토대로 나머지 불상의 복원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복장유물이 한 번도 훼손된 적도, 열어본 흔적이 없이 완벽한 보존 상태로 남아있어 서로 헤어졌던 두 불상이 400여년의 시간을 넘어 2015년 극적으로 재회한 것이다. 정 관장은 “일본으로 갔다가 현몽에 의해 범어사로 돌아온 것도 그렇고, 이리저리 채이고 함부로 다뤄지고 했었는데 어떤 연유인지 복장유물이 그대로 남아 2015년에 알려져 헤어졌던 불상을 다시 만난 것은 참으로 설명하기 힘든 영험”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국복장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점도 의미가 크다. 중국이 사람의 장기 모양으로 복장을 채우는 반면 한국은 다라니 경전 후렴통 등을 아래서부터 나름의 규칙을 갖고 배열하는데 원효암불상도 이 같은 전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또 반드시 시주로 복장 유물을 채워야한다는 경전에 따라 헝겊 한 조각 시주자 이름 까지 모두 발원문에 담는 한국복장의식도 철저하게 따르고 있다고 정근우 관장은 소개했다. 스님 23명을 포함한 134명의 시주자 명단이 들어있다.

 

이희정감정위원은 주로 조각승 성조에 관해 발표했다. 그는 1646년부터 1670년대 까지 주로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대표적인 조각승인 승일의 제자다. 승일은 구례 천은사 수도암 목조여래좌상과 보살상, 강진 정수사 목조여래좌상, 서울봉은사 목조아미타와 약사여래좌상, 함양 영원사 목조관음보살좌상, 김천 고방사 목조여래좌상 등 9건의 작품이 알려져 있다. 이러한 승일의 계보는 목조불상과 석조 불상 계보로 나뉘는데 성조는 그중 목조불상을 이은 목조조각상이다. 원효암보살상은 신체 옷주름의 표현 등이 스승의 양식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고 이위원은 주장했다.

 

복장전적에 관해 발표한 윤상기교수는 원효암불상 복장 유물 속에 경전 10종 13건이 나왔다며 “묘법연화경 7종, 선문염송 1종, 육경합부 1종, 지장보살본원경 1종”이라고 밝혔다. 가장 많이 나온 <법화경> 류는 세종 4년(1422년)에 대자산 대자암에서 간행한 대자암 판부터 가장 후대인 1609년 귀신사판 까지 들어있는데 모두 같은 판에서 나중에 인쇄한 후인본(後印本)이며 책은 없이 변상도(變相圖)만 따로 떼어 봉안한 판도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수예이사장이 과학적 장치를 통해 밝힌 바에 따르면 가슴 부위에 있던 후렴통은 세월이 지나면서 아래로 쳐졌으며 재질은 피나무로 밝혀졌다. 이는 소나무 은행나무가 압도적으로 많은 일반적인 목불상과 비교할 때 드문 사례라는 것이 이이사장의 주장이다. 개금은 한 번 밖에 하지 않았으며 목재에 배접을 하지 않고 표면에 바로 개금한 점이 특이하다고 덧붙였다. 불상 표면에 분열은 있지만 개금 색은 바래지 않았는데 현재 누런 모습을 띠고 있다. 이에대해 기조발제했던 정은우관장은 “밝은 황금색을 띠는 요즘 불상과 비교하면 차이가 많이 나는데 원래 우리 불상 개금이 원효암 불상과 같은 모습을 띤 것이 아닐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발표에 앞서 범어사 주지 수불스님은 축사에서 원효암 불상이 일본을 거쳐 한국에 까지 오게 된 연유를 언급하며 이 날 학술대회의 중요성을 상기시켰다. 권오창 총장은 이번 학술대회를 계기로 부산 지역 문화재 연구가 활발해지기를 바란다고 인사했다.

 

박부영 기자 |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 2015년 1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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