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기도/파주시

파주...공효공 박중손묘 장명등

by 임병기(선과) 2016. 8. 5.
728x90
728x90

 

 

개인적으로는 몇몇 묘역을 답사한 경험이 있었지만, 동호회원들과 동행한 답사는 처음이었다.

답사 일정 때문에 강서구의 미타사 석불입상과, 박중순묘역 장명등을 두고 회원들의 의사타진을 하였더니 전원이 묘역의 장명등을 택하였다. 카페 회원 대부분이 석조 문화재 특히 불교석조문화재가 주요한 관심사이지만 우리나라에 유례가 없는 일월형 화창 석등이 보고 싶었던 것 같다.

 

 

박중손 묘역

파주시 탄현면 방촌로879번길 172-34에 위치한 조선 세종대부터 세조대에 활약하였던 공효공 박중손과 정경부인 남평문씨의 쌍분 묘역이다.

 

 

묘소는 3단으로 구성되어있으며 쌍분과 상석, 상석과 향로석, 좌우인석, 단을 낮추어 좌우문인석과 신도비를 갖춘 배치이다.두 분의 묘 앞에 상석이 각각 마련되어 있는데 별도의 상석을 배치한 까닭이 궁금하다.

 

박중손 朴仲孫 (1412.태종 121466.세조 12).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경윤(慶胤), 호는 묵재(默齋).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찬성사(贊成事) 강생(剛生)이고, 아버지는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 절문(切問)이며, 어머니는 왕고(王高)의 딸이다.1435(세종 1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집현전박사가 되고, 홍문관의 부수찬(副修撰지제교(知製敎)를 거쳐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지병조사(知兵曹事동부승지·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453(단종 1)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한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록되고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지면서 병조참판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세종의 아들로 영빈 강씨(令嬪姜氏) 소생인 사위 화의군 영(和義君瓔)이 수양대군을 반대하다 귀양가게 되어 한때 난처한 입장에 빠졌으나, 이어 한성부윤에 임명되었다그 뒤 대사헌, 공조·이조·형조·예조의 판서를 거쳐 밀산군(密山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세조초에 좌찬성에 승진되었고 세 차례에 걸쳐 고시관이 되어 많은 인물을 등용시켰다. 시호는 공효(恭孝)이다.

 

 

문인석

 

 

무인석

 

 

석등은 공효공과 정경부인 묘앞에 각각 조성되었다.

공효공 묘 앞 장명등은 일월형 화창석등이며, 부인 묘앞의 장명등, 방형 화창의 석등이다.

또한 1466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공효공 묘역의 석등은 약간 둔중한 형이며, 부인묘 석등은 세장한 느낌이다.

 

 

공효공 묘역 석등

기단과 화사석이, 옥개석과 보주가 각각 하나의 부재로 조성되었다.

방형의 하대석, 하대저석과 복련이 생략된 소박한 곡형의 하대상석 중간에 간대를 돌출시켰다.방형 중대석은 아래가 넓고 위는 좁다, 상대석에도 특별한 문양없이 간대위에 화사석을 두었다.방형 화사석의 화창은 정면과 뒷면에는 방형 화창이 관통하였고, 향좌측에는  반달형 화창, 향우측에는 원형 화창이 설치되었다.

 

방형 옥개석 받침은 3단,  처마 부위에는 부연이 설치되었고, 사래를 조출하였다. 옥개석 낙수면 물매는 깊고, 추녀마루가 분명하며, 전각의 반전은 급격하다. 옥개석 종마루는 수평이며, 상륜부는 연주대와 큼직한 연봉형 보주를 표현하였다.

 

 

방형 화창.

땅을 상징하였을까?

 

 

반달형 화창.

상징성은 무엇인지?

 

 

원형(태양) 화창

 

 

 

연주대와 보주

 

 

 

정경부인 묘역 석등

공효공 묘역석등과 비슷하나 세장한 형태이며, 화사석 각면에 방형 화창을 두었고 보주괴임이 높고 보주가 뾰족하다.

 

 

 

 

유명조선국수충위사협찬정난공신숭록대부밀산군시공효공박중손신도비명

有名朝鮮國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崇祿大夫密山君諡恭孝公朴仲孫神道碑銘

김수녕이 찬하고, 중추부지사 성임이 쓰고, 형조참판 정난종이 각한 신도비로 1466년(세조 12)에 조성되었다

 

 

풍수에 식견을 가진 분과 동행하지 못하여 아쉬움이 남는다.

이론에 강한 학자 보다는 많은 집안 묘자리를 잡아준  이름없는 지관이라면 금상첨화일 것이고.

 

2016.07.23

728x9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