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영주시

영주...봉도각 석탑재

임병기(선과) 2016. 7. 27. 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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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면사무소

우리 답사객들이 익히 인지하고 있는 순흥도호부 옛자리로 내 글과 더불어 우리 카페 회원들의 답사기도 여러편 올라왔었다.

도호부터, 읍내리 석불입상,척화비, 비림이 뜰앞에 모셔져 있으며, 민속박물관 앞에 전시중 도난되었다가 다시 찾은 석불좌상은 소재는 파악하고 있지만 이번에도 인연 짓지 못했다.

 

 

도호부터

 

 

도호부터 뒤편 넓은 공원.

방형 연못에는 수련이 가득하고 느티나무 벚나무가 울울하게 등을 지고 있다.

 

 

 

봉도각蓬島閣

중국 설화속 삼신산, 즉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의 하나인 봉래산에서 가져온 전각명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우리나라에서는 금강산·지리산·한라산을 일컫는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삼신산에는 신선이 살고 있으며, 시황제와 한 무제가 불사약을 구하려고 동남동녀 수천 명을 보냈으나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일이 유명하게 전해내려오는 전설속의 산이다.

 

순흥도호부터의 봉도각은 도호부 청사 조양각朝陽閣 영조 30년(1754) 부사 조덕상이 이곳에 승운루勝雲樓라는 누각을 짓고, 서쪽  논을 파서 연못을 만들고  가운데에 섬을 쌓고 정자를 세워 蓬島閣(봉도각)이라 했다고 영조조에 편찬된 순흥읍지에 전한다.

 

봉도각은 방형 연지 중앙에 원형의 섬을 마련한 우리의 전통사상인 천원지방의 준하여 조성되어 있으며, 돌다리를 건너 출입할 수 있다. 

 

 

봉도각은 아름다운 전경으로 여행작가와 사진가들에게는 널리 회자되는 장소이지만 대부분 답사매니아들은 순흥면사무소 석불 입상에서 소수서원으로 발길을 옮기게 된다. 나역시도 그러하였지만 오늘은 언제, 어디서 입수한 정보인지 알 수 없지만 미답사목록에 기록된 석탑재를 뵙기위해 들렸다.

 

 

석탑 기단면석으로 추정되는 부재는 경로소 앞 벤치 옆에 있다.

1개 탱주와 양우주를 조출하였다.

 

 

경로소敬老所

정자처럼 보이는 전각이다.

모르긴해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고 넉넉하며 여유로운 경로소 같다.

 

근데 경로당敬老堂이 아니고 경로소敬老所?

 

영주시민신문에 실린(2015.01.15) 내용을 발췌하였다.

 

"지역유림의 한 원로는 “경로소의 유래는 홍무연대(洪武年代)니까 흥주(순흥의 옛 이름)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며 “이곳은 원래 약국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오늘날 보건소와 같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당시로는 침을 놓거나 뜸을 떠 주고 또 지압을 하거나 두드리고 주무르는 정도의 치료를 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또 다른 원로는 “처음에는 약국으로 운영되다가 그 후에 경로국이 됐다. 아직도 이곳의 좌장을 ‘국장(局長)’이라 부른다. 경로(敬老)란 노인을 공경하고 섬기는 것을 말한다. 순흥 경로국은 우리나라에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노인을 돌보는 의국으로 당시 순흥 사람들이 경로효친을 가장 소중히 여겼다는 증표”라고 말했다.

 

경로국이 최초로 설립된 것은 홍무연대(洪武年代, 고려말에서 조선초)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경로소가 소장하고 있던 기록물은 일제강점기 때 소실되고 없다. 문중이나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기문 등에서 찾은 기록에 의하면 “1696년(숙종 22년) 의국의 전제(典製) 4인 중 장무(長務, 원무과장) 1인을 선출하고, 도감 1인(李 모야)은 향중에서 선출했다. 이날 정중창(鄭重昌, 1693-1698 재임) 부사가 임석했다”라는 기록에서 경로국의 권위와 위상을 짐작할 수 있으며, 1683년(숙종 9년) 순흥부가 복설된 후부터 조직과 기능이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에도 1730년 의국 임원들이 석교리에 모여 밝은 향촌을 만들기 위한 논의를 한 후 이기융(李基隆)이 쓴 기록이 전해지기도 한다.재향지(梓鄕誌)에 의하면 “의국(醫局)은 향서당 서쪽에 있다. 향서당은 고을 동쪽 동천가에 있다”라는 기록으로 볼 때 당시 의국은 읍내리 은행나무 인근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순흥 경로국장은 지역유림에서 가장 명예로운 자리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영주, 봉화, 예천, 안동 지역 사족(士族)들이 많이 출입했다고 한다. 경로국의 국장이 되려면 소수서원 원장과 금성단 단장, 순흥향교 전교를 거쳐야 했다. 경로국은 해방 이후 경로소로 개칭되었으나 수장은 지금도 국장이라고 부른다. 경로소에 있는 임원록에는 약 80여 년 간의 기록이 보존돼 있다. 

 

현존하는 임원록에 의하면 첫 면에 국장 김석규(金錫奎, 선성김씨)로부터 시작하여 현 최길현(崔吉鉉, 화순최씨, 2014-현재) 국장에 이르기까지 50여명의 국장 이름이 한지에 붓으로 기록돼 있다.경로소의 조직과 기능은 홍무연대로 적힌 입안(立案, 규약)과 경로소에 보관되어 있던 문서들은 일제 강점기를 겪는 동안 소실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조직과 형태는 면면히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순흥 경로소는 요즘 노인정과는 달리 향내 사족을 중심으로 향촌내의 모든 문제를 자치적으로 처결하는 기구로 보고 있다.

 

특히 순흥 경로소는 순흥 특유의 유서 깊은 향촌제도(鄕村制度)의 하나로 보고 있으며 경로소의 장이 소장(所長)이 아니고 국장(局長)이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의국으로 창립되어 의료국의 역할을 수행해 왔기 때문이다. 현재 경로소 운영은 연1회 총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최길현(85, 부석 상석) 국장과 윤택중(순흥지동2리) 총무가 현 임원이다"

 

 

 

 

경로소 맞은편 방형 연지 둑 느티나무 아래의 석탑재

1단 탑신괴임,약간의 물매가 있고, 내림마루를 표현한 상층기단 갑석으로 보이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어디에서 가져 온 부재일까?

순흥면사무소의 석불입상, 지동리 미륵당 미륵, 모처에 소장중인 석불좌상,순흥초교의 배례석이 동일 사찰의 불교유물로 추정되지만 근거도 없으며 설상가상으로 사찰명도 전하지 않는다.

 

 

 

 

영월 김삿갓면의 친구가 운영하는 펜션에서 대구로 향하는 귀가길

예까지 와서 묵을 먹고 가야한다는 영주에 거주하는 친구의 고집으로 순흥 묵밥으로 늦은 점심을 대신했다.

 

2016.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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