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영주시

영주...순흥 읍내리석불입상. 척화비.석교리 석불입상

임병기(선과) 2015. 8. 31.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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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새벽 소백산 석륜암지 석탑 답사를 위해 순흥에서 여장을 풀고

저녁 식사전에 추억을 반추하며 읍내를 돌아 보았다.


석불입상, 척화비는 여전히 그자리에 계셨다.

아차!!

민속관의 석불좌상을 뵙지 못했다.

도난 당했는데 돌아 오기는 했는지...


석교리 석불입상

2005년 뵐 때도 과수원 주인(?) 아저씨에게 사정사정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10년이 지났건만

오히려 더 뵙기 힘들 것 같다.

과수원 초입에 쇠사슬로 바리게이트를 치고, 요란한 개 3마리로 봉쇄하고 있었다

겁 많은 중생

어쩔 수 없이 발길 돌릴 수 밖에...






2015.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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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2005.08.27

사진...2007.08.14

 

아들놈이 순흥 척화비를 본 기억이 없다길래 옛기억을 더듬어주려고 순흥면 사무

소에 들렸다. 본편보다 재미있는 속편은 없다는 건방진 맹신으로 예전의 답사기를

수정없이 올린다. 오류도 나의 소중한 자산이기에...

 

 

성혈사을 내려오면서 갈등이 일어난다. 다시 풍기로 가서 비로사 답사를 할까? 아님 바로 순흥을 거쳐 구국도를 따라 영주로 갈까? 잘못 계획한 동선이라도 되돌아 가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 중생이라 갈등도 잠시 달구지를 순흥면사무소로 몰고 갔다.

 

담벼락의  비림을 배경으로 읍내리 석불입상은 태생지를 떠났어도 면민들의 왕래가 잦은 순흥면사무소에 깊은 상처를 입고 서있다. 불상은 광배, 대좌가 멸실,  머리는 잘려 없어졌고, 수인을 알 수 없도록(추측컨데 통인의 수인으로 여겨진다) 손목도 없다.

하지만 뚜렷한 삼도, 통견의 법의와 통일신라 석불 특징인 무릎위의 길쭉한 타원형의 주름이 보이며, 안내문에 의하면 양감,탄력성이 느껴지는 훌륭한 작품이라고 하지만  바라볼수록 서글픔만 진하게 전해온다

 

석불 옆에는 대원군이 전국에 세운 척화비가 서있다. 비석 표면에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글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시골 면사무소지만 제법 마당이 넓고 정면 좌측으로 작은 박물관이 있다. 면 단위의 박물관은 흔치 않은데, 박물관 입구에 읍내리 석조여래좌상 안내 입간판이 아주 깨끗하게(?) 단장하여 객을 맞이하지만 석불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상하네? 박물관 안에 있겠지라며 면사무소 당직 직원에게 박물관을 열어달라고 했더니 무척 친철하게 응대한다.

 

 

아저씨! 근데 저 안내판의 석불 어디있는교?

여기 안내판이 있었나?

켁!!!(숨통이 멎는 줄 알았다). 화가나서 언성을 높이고 얼굴을 찌뿌렸더니 이곳 출신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다며 사무실로 가더니 어디론가 급히 전화를 한다.

잠시후 오신 분도 석불의 위치, 존재 유무를 모른다며, 동네 어른에게 전화하더니 그분이 직접오셔서 설명해주시겠다고 말씀했지만 사양을 했다.

 

 

"석불은 어느 더러운 인간이 훔쳐 갔으나, 되찿아 어디엔가 보관하고 있다" 그러면서 미안했던지 박물관을 안내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안내간판을 철거하던지,  석불을 원위치 시키든지 해야지 원!!

대민에게 친절하다는 것은 바람직한 변화의 현상이지만, 기왕이면 관내의 적어도 입간판이 있는 문화유산에 대해서는 현업 부서를 초월하여 기본적인 상식을 갖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발길을  돌렸는데도 뭔가 찜찜하기 그지 없더니, 아뿔사!!! 흥주 도호부 건물이라 봉서루와, 공민왕 글씨를 보지 않았다.

(면사무실로 들어가는 공무원의 등을 향해) 아저씨!!  잠깐만요. 봉서루 누각은 어디 있는교?

저기 있었던 건물이 봉서루 였던가? 그거 철거 했습니다.

그럼 어디로 옮겼나요?


 

가을 초입에 길을 나섰다.

유명 답사지 그늘 아래에 묻혀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건만, 늘 스치기만 했거나, 들린지가 10년도 더 지난 순흥, 영주,안동의 맛나는 답사지를 향해서....

 

제일 먼저 소수서원 건너에 위치한 금성대군의 자취를  찿아 순흥향교 길목으로 달구지를 몰아 갔다. 금성대군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여섯 째 아들로 이름은 유이다. 1433년 금성대군에 봉해지고 1437년     참찬 최사강의 딸과 혼인했 으며, 그 해 태조의 여덟 째 아들이자 신덕왕후 강씨의 두번째 소생   방석의 봉사손으로 출계하였다. "

 

경북 성주군에 위치한 세종대왕 왕자 태실로 세조인 수양대군, 금성대군은 물론 단종의 태가 함께 묻혀 있다. 성군인 세종이 훗날 일어날 골육상쟁의 피비린내를 상상이나 했겠는가?

 

"1452년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과 함께 사정전으로 불려가 물품을 하사받으면서 왕을 좌우에서 보위   할 것을 약속 하였다. 그리고 수양대군이 정권을 탈취하자 이에 반발하여 삭녕에 유배당했다.

 

이 후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당하자 자신의 유배지였 던 순흥에서 부사 이보흠과 함께 모의하여 단종 복 위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관노의 고발로 실패로 돌아가 반역죄로 처형당했다. 이 때가 그의 나이 32세였다. 1791년(정조 15년)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을 편정할 때에 육종영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

 

 

2년 전인가 한참 공사 중이던 선비촌이 준공되어, 관광버스가 줄을 잇고 있지만, 바로 그 건너편의 복숭아,사과, 인삼 밭 가운데에 금성대군이 위리 안치지에는 누구 한 사람 찾는 사람 없이 정적만 감돈다.

 

위리 안치지에는 중앙에 돌우물 모양의 구덩이를 파고  주위는 (圍) 탱자나무 울타리(籬)에 둘러 쌓여 있으며,세종의 여섯째 아들, 단종의 숙부, 세조의 동생, 금성대군이 두번에 걸친 단종 복위사건에 연루되어 위리안치된 곳으로 결국은  이 곳에서 사사되고 말았다.


 

안내문에는 금성대군이 이곳으로 유배 오는 그림과 안치(安置)형벌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다.

즉, 본향안치:본인의 고향에서만 유배생활을 하도록 하는 가벼운 죄인의 형벌.

다음이:절도안치 혼자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서 유형생활을 치르도록 하는 중죄인의 안치 형벌

그리고 가장 중한 것이:위리안치거주지를 제한하기 위해 집 둘레에 탱자나무 울타리를 둘러 치거나 가시덤불로 싸서 외인의 출입을 금한 중죄인의 안치 형벌이다.

 

금성대군과, 좌측 순흥부사 이보흠, 우축 단종 복위 운동에 희생된 사람들을 향사하는 제단이다. 복위 거사 실패 후 순흥 고을도 폐고을이 되었으며 숙종조에 순흥부가 복설되고 금성단을 설치 봄,가을로 향사를 올리고 있다.

 

강원도 산골 지방의 사당, 산신각에는 한을 품고 죽은 단종 영정을 모신 곳이 많이 있다. 이런 고유 민속 신앙은 전국에 산재해 있으며, 특히 최영, 임경업 장군을 모신 사당이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영주 지방에서는 금성대군을 모신 사당이 많다고 하며,고치령 산신각도 금성대군이 순흥에 귀양해 살다가 죽자 소백산 산신령으로 신격화 하고, 단종영정과 같이 모신 것으로 보인다. 충북 진천에도 전주 이씨 금성군파(?) 집안에서 모시는 금성대군의 사당이 있다.
 

2007.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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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아침에 너무 많은 욕심일 수도 있으나, 기초지자체에서는 자체, 파견 교육을 통한 관내의 문화유산의 일반적 상식을 직원들에게 주지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물론 문화유산해설사가 있어 답사객의 허기진 앎의 욕구를 채워주고는 있지만 아직 부족한 인원 등으로  충족할 수 없어 아쉬운 차에 하나의 대안으로도 모색해볼만 할 것이다.


순흥읍내를 벗어날 즈음에 좌측으로 석교리 입간판이 보인다. 혹 石橋라고 가정한다면 단순히 작은 돌다리 보다는 가람 초입에 놓였던 홍예는 아니었을까? 이름조차 알 수 없는 폐사지의 석불, 석탑의 부재로 미루어 절터는 분명할 것이고...

 

상념에 젖어서  죽계천에 놓인 작은다리를 건너 천변과 산자락에 사과밭을 헤치고 다다르니 석불이 전각속에 외로이 서계신다. 온몸에 무수한 상처를 입고서도 복스럽고 곱게 보인다. 땅속에서 발견 당시에는 목이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고 했지만 습의 밖으로 들어난 목은  마치 여인네의 긴 목으로 다가온다. 전각속에 모시기전에는 무릎이하를 땅속에 묻고 계셨으니 고통이 얼마나 심했겠는가? 

 


영주석교리석불상/문화재청


이번 답사에서도 느꼈지만 아니, 만추 부석사 답사기에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빨간 사과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경북북부 지방은 온통 사과밭이다. 수령으로 보아 심은지 오래지는 않은 것 같은데 기후의 온난화와 관계는 없을까? 사과는 일교차가 심하면 당도가 더 난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지만, 어린시절 사회 시간에 사과는 대구의 특산물로 공부한 우리세대가 아닌가?

 

요즘 대구 근교에서 사과밭을 구경하기는 쉽지 않다, 예전에는 내고향 성주, 경산에서 사과밭은 흔하디 흔한 전경이었고, 과수원집은  이문열, 김주영 소설에서 자주 보이듯이 시골마을에서는 방앗간, 곡상, 술도가집과 더불어 동네의 유지, 부잣집의 대명사로 여겨졌었다.

 

대구의 팽창과 더불어 농지의 축소, 공단으로 용도 변경, 노동력 문제 보다는 온난화로 인해 사과의 재배 환경이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풍기의 소백산 '죽령'이 대나무의 북방한계선을 의미한 고개이듯이......  



영주석교리석불상/문화재청



이제 전각속에 모셔진 석불의 무릎 아래가 하얗게 보이는 것은 땅속에 묻혔던 흔적이며, 다른 석불이 아들을 바라는 기자 신앙에 의해 코멸실이 심한데 석교리 불상은 눈의 상처가 심한 것으로 미루어 민간신앙의 다양함, 또는 지역적 특색을  엿볼 수 있다.

 

 삼도가 뚜렷하고, 육계가 크며 둥글고 복스런 미인의 얼굴로 보이는 석불은 습의, 특히 무릎의 타원형 자락으로 통일신라 하대의 특징을 가진 순흥 면사무소의 석불과 닯은 모습이다.

 

2005.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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