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영월군

영월...사자산 법흥사

임병기(선과) 2016. 7. 21.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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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임마!! 드디어 영월 입성!!!!

진작부터 나를 제외한 전원이 도착했다고 아우성치는 넘들에게 큰소리로 폰을 날렸다.

사실 이번 경기.강원 답사의 목적은 서울에서 영월 김삿갓면으로 귀촌한 교교동기의 펜션 오픈 축하 모임 참석이었다.

겸사겸사

비지정 옛님을 뵙고,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은 법흥사에 들린 것이다.

글을 뒤져보니 2002년 법흥사를 마지막으로 들렸다.

물론 그 이전에도 두어차례 들렸지만 옛기억속의 풍광에서 크게 변화가 없어 보인다.

 

 

법흥사 홈페이지 소개 글.

"사자산 법흥사는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나라의 흥륭과 백성의 편안함을 도모하기위해 643년 신라 선덕여왕 12년에 사자산 연화봉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흥녕사(興寧寺)로 창건했다. 중국 선종의 중흥조인 마조도일 선사로부터 선(禪)을 전수받았던 신라의 선승 도윤칠감국사의 제자 징효절중(澄曉折中)이 886년 이곳에 선문을 여니 이것이 바로 라말여초 구산선문 중 하나였던 사자산문(獅子山門)이다.


1163년 고려 의종 때 다시 중창하였으며, 1730년 조선 영조 6년, 1778년 조선 정조2년, 1845년 조선 헌종 11년까지 역사의 부침 속에서도 소실과 중창을 반복하며 그 맥을 이어왔다.그 후 폐사지에 가까웠던 흥녕사가 1902년 대원각스님에 의해 법흥사로 개칭되고 재건되었다.1912년 또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1933년 지금의 터로 적멸보궁을 이전 중수하였다.


현재 법흥사의 유적으로는 옛 흥녕선원의 위세를 짐작하게 하는 3개의 석탑과 1개의 수호석불좌상, 자장율사가 수도하던 토굴, 적멸보궁, 사리탑(강원도 유형 문화재 73호), 흥녕사 징효대사 보인탑(보물 612호),징효대사 부도(강원도 유형문화재 72호), 흥녕선원지(강원도 지정 기념물 6호)가 있고 종이가 없던 시절 인도 영라수 잎에 범어로 기록한 패엽경 등의 소중한 삼보종재가 남아 있다" 남아있다.

 

홈페이지에 소개된 흥녕선원의 3개 석탑, 1기 수호석불좌상은 어디를 칭하는 것일까?

3개 석탑은 흥녕선원 이정표 역활을 했던 석탑을 칭한다.

 

 

제천 장락리 모전석탑...2008년

 

 

영월 주천 3층석탑...2010년

 

 

영월 무릉리 삼층석탑...2010년

 

 

영월 요선정 마애여래좌상...2010년

 

 

요선정 마애불을 그린 신경림님의 시를 참 좋아하며 자주 인용한다.

 

주천강가의 마애불...신경림

 

다들 잠이 든  한밤중이면
몸 비틀어 바위에서 빠져나와
차디찬 강물에
손을 담가보기도 하고
뻘겋게 머리가 까뭉개져
앓는 소리를 내는 앞산을 보며
천년 긴 세월을 되씹기도 한다.

 

빼앗기지 않으려고 논틀밭틀에
깊드리에 흘린 이들의 피는 아직 선명한데
성큼성큼 주천 장터로 들어서서 보면
짓눌리고 밟히는 삶 속에서도
사람들은 숨가쁘게 사랑을 하고
들뜬 기쁨에 소리 지르고
뒤엉켜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참으려도 절로 웃음이 나와
애들처럼 병신 걸음 곰배팔이 걸음으로 돌아오는 새벽
별들은 점잖치 못하다
하늘에 들어가 숨고
숨 헐떡이며 바위에 서둘러 들어가 끼어앉은
내 얼굴에서는
장난스러운 웃음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2002년 법흥사 글을 가져왔다.

대단한 배짱의 겁없는 톤의 글이다.

 

책 박물관, 한반도를 닮은 지형 표지판이 보이지만 법흥사 상원사 월정사를 들리려면 길을 재촉해야 한다.

법흥사 초입에 무릉리 마애불 입간판이 보인다.
횡재다!!!
무릉도원인가? 선경인가?
화택의 삶을 벗어나고픈 꿈의 발현일까?

미륵암을 지나 산길을 걸어 몸은 땀에 젖지만 시원한 산바람을 맞으며 야산 정상에 오르니 명경지수의 주천강을 눈 아래 두고 자연 암반위에 설악산 흔들 바위처럼 물방울 같고, 유원지의 오리보트 닮은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이 반겨준다. 좁은 상체에 비해 결가부좌한 하체가 커서 균형이 맞지 않지만 연화문양의 광배도 갖추었고 팔공산 갓바위 약사여래불처럼 후대에 조성된 듯한 갓이 씌워져 있고 마 애불 앞에는 고려시대 탑으로 보이는 앙증맞은 삼층탑이 마애불을 전각 삼아 앉아 있다 요선정 정자에 누워 낮잠을 즐기고 싶고 주천강을 내려보며 도끼자루야 섞든 말든 바둑 한판 두고 싶은 절경이니 무릉리라는 지명이 결코 호사스럽지 않게 여겨진다.

주차장 대형관광 버스에서 나오는 음악이 아니라도 법흥사는 산만하기 짝이 없다.


사자산문 개산조 철감 선사의 법제자인 징혜 대사의 부도는 팔각원당, 앙련, 복련 몸돌에 문비, 옥개석 우동마루의 귀꽃이 곱고 지대석과 귀부가 하나의 돌, 이수에 네 마리의 용이 새겨진 부도비를 뵙고 쭉쭉빵빵한 전나무 길을 번화가처럼 많은 사람에 휩쓸려 불사로 인해 요란한 선원을 지나 길옆 감로수로 목을 적시고 시끌 벅쩍 시장통 같은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기 때문에 불상을 모시지 않는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의 하나인 법당에 좌정하고 몸을 가눈다.

적멸보궁 뜰에서는 여행가이드(?)가 초교생과 부모들을 상대로 어려웁기 그지없는 유현한 설명에 한창이다.
“적멸보궁은 팔작지붕에 정면 몇칸 측면 몇칸......”
설명을 들으며 수첩에 뭔가를 기록하고 있는 아이들이 수상하기 짝이 없다.

법흥사의 사리는 자장율사가 사자산 어느 곳에 감추어 두어 행방이 묘연하지만 사리탑으로 불러지는 부도가 적멸보궁 뒤뜰 자장이 수도 했다는 무덤 같은 토굴 앞에 서 있어 마치 무덤의 장명등 같이 보인다.

가사를 입은 처사님이 돋보기안경을 쓰고 가는 붓으로 깨알처럼 작고 촘촘하게
필사(경) 공덕에 여념이 없으시다.

-. 어떤 경전입니까?
-. ....
-. 몇 권을 쓸 예정이고 시간은 얼마나 소요될까요?
-. (붓으로 입을 가린다).

아차!!!!
필사공덕 시에는 묵언 침묵이라 하지 않았던가?
깜박 잊고 질문을 하다니 바보 멍청이 병신, 진심으로 고개 숙여 용서를 빌고 적멸보궁을 내려오는 등 뒤로 아직까지 어린아이를 상대로 가이드는 열심이다.

“자장율사는...........어쩌구저쩌구, 구산선문은............. 궁시렁궁시렁”

2002. 7월말

 

 

 

 

 

영월징효국사부도 (寧越澄曉國師浮屠)

징효국사는 19세에 탁월한 총명으로 수행을 시작하여 효공왕 4년(901)에 75세로 입적하였다. 철감선사 도윤의 제자였으며 경문왕의 총애를 받기도 하였다.

부도는 기단부(基壇部) 위에 탑신(塔身)을 올린 후 머리장식을 얹었으며, 각 부분이 8각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기단은 아래·가운데·윗받침돌의 세부분으로 나뉜다. 아래받침돌에는 각 면에 안상(眼象)을 1구씩 얕게 새겼다. 가운데받침돌은 각 면마다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둥근 윗받침돌은 연꽃무늬를 둘러놓았다.

 

탑신의 몸돌은 아래윗변의 모서리를 약간 죽인 듯 처리하였는데, 앞 뒷면에는 문짝 모양의 조각안에 자물통 모양을 표현해 놓았다. 지붕돌에는 급한 경사가 흐르고, 여덟 귀퉁이마다 꽃장식이 높게 달려 있다. 꼭대기에는 지붕을 축소한 듯한 장식 위로, 공모양의 장식이 놓여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각 부분이 8각을 이루고 있으나, 두꺼운 지붕돌표현, 지붕돌의 높은 꽃장식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기단부

 

 

 

탑신

 

 

 

상륜부

 

 

 

징효국사 부도 옆. 조선후기 석종형 부도

 

 

 

당호가 마모되어 주인공 확인이 어렵다.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 (寧越 興寧寺址 澄曉大師塔碑)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올리고, 그 위에 용머리가 조각된 머릿돌을 얹었다. 받침돌의 거북머리는 용의 머리에 가깝고,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다. 특히 발가락과 발톱은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어 눈에 띈다. 반구형(半球形)에 가까운 등은 길쭉한 6각무늬로 채워져 있으며, 중앙에는 비를 꽂아두는 네모난 홈을 마련해 두었다. 머릿돌에는 네 마리의 용이 중심을 향해 마주보고 있다. 눈, 코, 입은 사실적으로 새겼으나 몸에 표현된 비늘은 약하게 새겨져 형식에 그치고 있다.

비문에는 징효의 출생에서부터 입적할 때까지의 행적이 실려있다. 비문에 의하면 징효는 19세에 장곡사에서 승려가 되어 75세 되던 효공왕 5년(901)에 입적하였다. 끝부분에는 대사의 공적을 기리는 내용도 새겨져 있다.

이 비는 대사가 입적한지 44년 후인 고려 혜종 원년(944)에 세워진 비로, 글은 최언위가 짓고 최윤이 글씨를 썼으며 최오규가 비에 새겼다.

 

 

귀부

 

 

이수

 

 

 

 

중정 한쪽에도 비신과 이수가 결실된 귀부가 있다.

 

 

적멸보궁 가는 길

 

 

적멸보궁.

 

 

진신사리는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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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사 석분石墳

바깥부분은 낮은 언덕에서 내려오는 완만한 경사를 이용하여 그리 높지 않은 봉토를 이루고 있다. 내부 돌방의 벽은 자연석의 평평한 면을 가려서 10단을 쌓았는데 6단까지는 수직이고 7단부터는 각을 줄여 쌓았다. 천장은 넓고 평평한 1매의 뚜껑돌로 덮어 놓아 내부전체가 거의 원형을 이루는 있다. 석분 뒷쪽에 돌로된 관이 있어서 이름 높은 스님의 사리 또는 유골을 모시던 곳일 수도 있으나, 기록에는 승려가 수도하던 토굴과 같은 역할을 하였던 곳으로 전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법흥사 홈페이지에는 자장율사가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수도하는 장소로 소개하고 있다.

 

 

적멸보궁 뒤편 부도

아래·가운데·윗받침돌로 이루어진 기단부(基壇部) 위에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갖추었으며, 각 부분이 8각을 이루고 있다. 넓고 네모진 바닥돌 위에 놓인 아래받침돌은 각 면마다 안상(眼象)을 새겼다. 가운데받침돌은 여덟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윗받침돌에는 연꽃무늬를 둘렀다.

 

탑신의 몸돌은 앞, 뒤 양면에 문짝모양을 새기고, 나머지 6면에는 1구씩의 신장상(神將像)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다. 급한 경사가 흐르는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마다 꽃장식을 높게 달았다. 꼭대기에는 축소된 지붕모양과 꽃봉오리 모양을 조각한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전체가 8각을 이룬 모습으로 두꺼운 지붕돌 표현이나 높은 지붕돌의 꽃장식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작품으로 보인다.

 

 

 

 

아버지의 절박한(?) 심정으로 예를 올렸다.

뒤늦게

전각에 들리신 보살님이 촛불 공양을 올린 후

땀에 젖은 내모습을 지켜보시더니 숨 돌리고 내려가라고 권한다.

하지만

40년 지기 친구 놈들이 보고잡아서 뛰어서 적멸보궁을 내려 왔다.

 

 

2016.06.24

***문화재에 대한 설명은 문화재청 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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