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가면 원두1리 275-5에 자리한 향나무 이천시 홈페이지의 원두리 지명 유래가 흥미롭다. "이 마을은 고려 시대에 서가(西家)경영으로 원이라는 주막이 있었는데 주인 없이 음식만 차려놓고 가격을 정하여 놓으면, 먹은 사람이 정하여 놓은 가격대로 두고 가는 곳이라 하여 원이라는 주막의 “원(院)”과 돈주머니의 “두(頭)”라는 머리를 따서 원두리(院頭里)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서가西家 경영? 동가식서가숙東家宿 西家食은 아닐테고... 검색해보니 "자본을 출자한 사람을 동가(東家)라 했고 경영만 맡은 사람을 서가(西家)"
그렇다면 고려시대에 경영과 자본이 분리된 오늘 날의 기업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또한 무인음식점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었으며, 선진 경업 기법이 정착되었다는 의미기도 하다.
원두리 향나무 원이 설치되어 있던 마을에 500녀년 전 진천 송씨가 정착하면서 식재한 향나무로 전한다. 옛날에 나무 옆에 우물이 있었는데 물이 차고 물맛이 좋아 이 나무 때문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현재는 그 우물터를 복원하였다.
이천시청 홈페지의 설명문을 다시 보자
개인적으로는 수호신 즉 마을지키미는 이해가 되지만 "정자목"은 지나친 과장으로 생각된다. 향나무는 우물가에 심어져 있었다고 하였다. 즉, 휴식공간 보다는 우물을 보호하기 위해 독충 접근을 막기위해 심었을 가능성이 짙다. 유년의 내고향 마을 배꼽마당 앞 우물터에도 독충 방제 목적으로 심은 길게 퍼져 나간 키 낮은 향나무가 있었다. 또한 우물은 여성의 자유공간이다. 시어머니, 시누이를 욕하고, 시집살이의 울분을 토로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던 그런 여성의 전용 공간이다. 그런데 정자목? 정자는 물 좋고 풍광 수려한 곳에 자리한 선비들이 농땡이 치는 공간이었고, 호남지방의 모정 역시도 들판에 지어졌다.풍류를 즐기던, 농경사회의 휴식 공간이었던, 정자는 남성 전용 공간이었다. 우물가에 정자가 설치된 예가 있었던가?
앗! 이야기가 오끼나와로 빠져버렸군!!!
500년? 청년의 기상이다!!
터져나올 듯한 줄기의 용트림
우리는??? 60세에 일터를 떠나야하는 나약한 인간 군상들!!!
고풍스런 그런 자태는 기대 하지 말아야 한다. 푸르름, 늠름함...
복원한 우물
원두리가 고향인 출향민들 아마 유년시절 향나무에 얽힌 경험 하나 둘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그 사연 하나 하나가 고향이고, 어머니며, 정신적 지주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고 살아가고 있다.
2016.06.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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