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하동군

하동...지리산 칠불사

임병기(선과) 2016. 6. 29. 07:14
728x90

 

칠불사.

처음 방문은 우리아이들이 초교 시절이었으니 20여년 전이었고, 창원 근무시절의 답사도 2003년 이전이었다.

하지만 창문을 통해 보았던 아자방과 영지 외에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고, 청학동과 더불어 진입로가 비포장이었던 사실만 떠오른다.

 

요즈음은 답사 동호회 운영, 비지정 옛님의 출현, 나이탓(?)으로 거의 대부분 재답사이지만 젊은 시절에는 못난 성정 탓에 한 번 답사 한 곳은  별로 즐기지 않았었다. 첫사랑은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이지 여인으로 변한 그 소녀가 그리운 것이 아니기에.

 

 

이번 여름

우연하게 필이 꼽힌 지리산 자락의 부도.

그 순례의 화룡점정의 점을 찍기 위해 하동 일원 답사, 결론적으로 글을 작성하는 이 순간에도 벌써 3기를 추가로 찾았으니 끝을 서두르지 않아야겠다.

 

현판 글씨는 제월통광 스님이 쓰고, 서각은  정도화 교수가 했다.

 

 

칠불사 사적비

 

온 우주법계가 부처님의 도량 아님이 없고 산하대지와 삼라만상이 부처님의 나투심 아님이 없나니, 과거칠불의 스승이신 문수보살의 상주도량으로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梵僧 장유보옥화상의 가르침을 받아 동시 성불한 것을 기념하여 수로왕이 국력으로 창건하였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수로왕은 서기 42년에 탄생하였으며 남해바다를 통해 매형인 장유보옥화상과 함께 가락국에 도착한 인도 황하 상류의 태양왕조인 아유다국 공주인 허황옥을 왕비로 맞아 10남 2녀를 두었다. 그중 장남은 왕위를 계승하고 2남 3남은 어머니의 성을 이어 받아 김해 許氏의 시조가 되었고, 나머지 일곱 왕자는 외숙인 장유화상을 따라 출가하여 가야산에서 3년간 수도하가다 의령 수도산과 사천 와룡산 등을 거쳐 서기 101년 이곳 지리산 반야봉 아래에 雲上院을 짓고 정진한지 2년 만에 모두 성불하였다.

 

이 사실은 한국불교의 南方海路 직전설을 뜻하며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고구려 소수림왕 2년인 서기 372년 처음 불교가 들어 왔다는 北方陸路 전래설보다 약 3백여년 앞서는 기록이다. 가락국 제8대 질지왕은 공주의 최초 도래지에 왕후사를 세우고 장유화상의 주석지에 장유사를 세워 가야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것을 기념하였다.신라 경덕왕때 옥보고가 이곳 운상원에 들어와 50년 동안 거문고를 연구하여 왕산악 금법을 정리 신곡 30곡을 지어 속명득에게 전했다.


신라 효공왕때 김해에서 온 담공선사가 벽안당 선실을 亞字형으로 축조하였으니 한번 불을 지피면 100일간 따뜻하였다. 이 아자방은 이중 온돌구조로 되었는데 방안 네모퉁이의 높은 곳은 좌선처이며 ╂字형으로된 낮은곳은 경행처이다. 세계 건축사전에 기록된 아자방은 불가사의한 공법뿐만 아니라 수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고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조의 정명, 조선조의 조능, 서산, 부휴, 백암, 무가, 인허, 월송선사등이 대표적이며 대은, 금담 두 율사는 이곳에서 용맹기도 끝에 서상수계를 받아 해동계맥을 자립했다. 초의 선사는 이곳에서 茶神傳을 초록하였으며 근세의 선지식으로 선,교,율을 겸한 용성선사가 납자들을 제접하는 여가에 歸源正宗을 저술하였고 석우, 금오, 서암선사등이 이곳에서 수선안거 하였다. 임진란에 퇴락한 가람이 서산, 부휴대사에 의하여 중수되었으며 서기 1800년에 보광전, 약사전, 등 10여동의 사찰의 모든 전각이 실화로 전소되었으나 금담, 대은 두 율사의 원력으로 완전 복구되어 동국제일선원으로서의 위풍을 떨쳤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51년 지리산 전투의 참화로 대가람이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으니 폐허에는 잡초만 무성할 뿐이었다. 1964년 제월 통광선사가 행각 차 이곳을 지나가다가 천고의 성가람이 찬 재 속에 묻쳐 있는 것을 통탄하고 반드시 옛 절을 복원하리라는 서원을 세워 산죽과 억새풀로 작은 초막을 짓고 문수보살님께 1000일 기도를 하고 10여년간 수행정진하다가 마침내 문수보살의 가피를 받아 복원 불사를 시작하였다.


1978년 문수전을 시작으로 대웅전, 설선당, 요사채를 차례로 복원하고 1983년 지방문화재 144호 아자방을 복원하고, 그후 보설루, 종각, 주지실, 채공실 준공, 대웅전 내에 목각으로 삼존불상, 칠불탱화, 신장탱화를 새로 조성하고 허북대에서 칠불에 이르는 상수도 설치, 경내 진입로 확장, 사찰주변 임야 50만평 매입, 1989년 운상선원 확장 복원에 이어서 대웅전, 문수전, 설선당, 보설루, 주지실, 종각, 등을 동기와로 바꾸어 이고, 연동에서 칠불사까지 약 5키로미터의 수도공사, 장경각, 식당, 요사채 건축, 1994년 초의선사 다신탑비건립, 1995년 일주문 착공 조경을 마무리하여 마침내 18년에 걸친 대작불사가 원만히 회향하게 되었다. 이는 오로지 시방삼세의 불보살님과 역대조사의 가피력과 참선납자들의 정진력과 화주, 시주 및 신심 단월들의 성원과 장인들의 공력과 당국의 협조로서 통광선사의 대원력이 이루어진 것이다.


돌이켜 보건대 운상원 아자방이 있는 동국제일선원 칠불사는 허황후가 일곱왕자의 성불을 목격한 영지, 추월 조능선사의 치열한 구도행, 문수동자의 화현, 대은 스님의 서상수계 등 수 많은 일화를 간직한 한국 불교의 빼어난 성지이다. 장엄하여라 칠불사 복원이여! 사해의 승니도속이 운집하여 지혜의 눈을 맑히고 명안종사가 출현하고 용상대덕이 배출되어 무량한 중생을 제도할 것이며 천룡팔부의 옹호로 삼보광명이 법계에 가득하여 영원토록 무궁하리라.


백두태백 길이 뻗어 방장영봉 솟았으니
반야봉 남녘기슬 칠불출현 성지로다.
가락국 김수로왕 일곱아들 출가하여
장유화상 가르침에 일시성불 하였어라.
담공화상 아자방은 동국제일 선원이요
서산, 부휴 양대선사 선풍 진작하였으며
금담 대은 양대 율사 해동계맥 수립했네
근세의 용상대덕 무수히 쏟아지니
이 어찌 천하제일 명승도량 아니런가
동란중 전화속에 일시에 소진되니
무상할손 세상사여 잡초만 무성쿠나
통광선사 여기와서 차마 발길 못 돌리고
천일기도 발원으로 문수보살 가피 입어
옛 성지 복원하니 이 아니 희유한가
시방의 승니도속 모두 발심정진하니
자타일시 성불하여 불국정토 이루리라.

 

佛紀 2539년 서기 1995년 을해 3월 3일
가야산 해인사 東谷堂 日陀 짓고
淸觀居士 尹孝錫 쓰고
普光居士 金漢烈 새기다

 

 

지리산의 중심봉인 반야봉(1,732m)의 남쪽 800m 고지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말 도선국사가 지은『옥룡자결』(玉龍子訣)에 의하면 지리산 칠불사는 와우형(臥牛形)의 명당으로, 제일의 양택이라고 했다. 임진란에 퇴락한 가람을 서산대사와 부휴대사가 중수하였다. 그 후 1800년에 큰 화재가 나서 보광전, 약사전, 미타전, 벽안당(亞字房), 칠불각, 설선당, 보설루, 요사 등 10여 동의 건물이 전소되었는데 대은율사와 금담율사에 의해 모두 복구되었다.


그러나 6·25전란으로 인해 1951년 1월경에 전소되었다. 27년간 폐허로 남아 있던 것을 제월통광(霽月通光) 스님이 1978년부터 15여년에 걸쳐 대웅전, 문수전, 아자방, 운상원, 설선당, 보설루, 원음각, 요사, 영지, 일주문 등을 복원 중창했고, 이 외에 선다원, 사적비, 다신탑비 등을 세웠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부처, 대지혜를 갖추신 문수보살, 대행을 실천하시는 보현보살과 후불 목탱화와 김수로왕의 칠왕자가 성불한 칠불 목탱화와 신중 목탱화를 조성하여 모셨다. 대웅전 불상은 동국대 교수인 청원스님이 조각했고, 현판과 주련의 글씨는 여초 김응현(1927-2007) 선생이 썼으며, 글씨의 서각은 정도화(?-2010) 교수가 일도각으로 새겼다.


대웅전 뿐만 아니라 칠불사의 모든 현판과 주련은 여초 김응현 선생이 쓰고, 정도화 교수가 서각했다

 

 

아자방

현재(201606월)는 보수중이다.

 

아자방(亞字房)은 스님들이 참선수행하는 선방이다. 벽안당(碧眼堂)이라고도 한다. 신라 효공왕 때 담공선사가 축조 하였는데, 방안 네 귀퉁이의 50cm씩 높은 곳은 좌선처이고, 가운데 십자 모양의 낮은 곳은 경행처이다. 축조 당시에는 한 번 불을 지피면 100일 동안 고루 따뜻하였으므로, 신비한 온돌방이라 하여 세계 건축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현재 경남유형문화재 제14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아자방에서 참선공부 할 때는 장좌불와(長坐不臥, 늘 앉아만 있고 눕지 않는 것), 일종식(一種食, 하루 巳時에 한 끼만 먹는 것), 묵언(言, 말하지 않는 것)의 세 가지 규칙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규칙을 지키면서 애써서 공부하였기 때문에 이 아자방에서 무수한 도승들이 배출되었다.


그리고 아자방에 문수보살이 화현하여 스님들이 발심정진케 한 이야기가 여러 가지 전해 오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한다.
조선 중엽 어느 해 음력 10월 14일 동안거 결제를 하려고 하는데 어린 사미승이 걸망을 지고 조실스님을 찾아와 아자방에 방부를 들여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조실스님이 보아하니 나이가 어려 도저히 아자방에 방부를 받아줄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아자방에서 정진하는 데는 장좌불와, 일종식, 묵언의 세 가지 엄한 규칙이 있는데, 어린 사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힘겨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조실스님은 그 사미승에게 더 커서 오면 방부를 받아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 사미승이 “부처님 말씀에 생사가 호흡하는 사이에 있다고 하셨는데, 어찌 클 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했다. 조실스님은 매우 기특하게 여겨 방부를 받아 주셨다. 아자방에서 참선하는 대중들이 한방중이 되어 마구 졸면 그 사미승은 뒤로 벌렁 자빠져 꿍 소리를 내고, 그리고 땅을 치고 울면서 넋두리 하기를 “생사의 괴로움이 아니라면 왜 자고 싶은 잠도 못자고, 먹고 싶은 밥도 제대로 못먹고, 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하는가”라고 했다.

 

그러면 졸던 스님들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정진하였다. 한 철 내내 이렇게 되풀이 하며 해제를 맞이하였다. 해제날 조실스님의 해제 법문이 끝나자 그 사미가 대중 앞에 나와 세 번 절을 하고 “조실스님께서 방부를 들여 주셔서 한 철 공부를 잘 하였습니다.”라고 했다. 그 말이 끝나자말자 그 사미는 온데간데 없었다. 그때야 비로소 대중 스님네들은 그 사미는 문수보살이 화현하여 나타나신줄 알고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더욱 발심정진 하였고 한다.

 


영지影池

영지는 칠왕자의 그림자가 나타났다는 연못이다. 수로왕 부부가 출가한 일곱 왕자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와서 왕자를 보려 하자 장유화상은 “왕자들은 이미 출가하여 수도하는 몸이라 결코 상면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꼭 보고 싶으면 절 밑에 연못을 만들어 물 속을 보면 왕자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장유화상의 말에 따라 김수로왕 부부는 연못을 만들어 놓고 그 연못을 보니 과연 일곱 왕자들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를 보고 수로왕 부부는 환희심을 느끼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로 인하여 이 연못을 영지라 부르게 되었다.(비슷한 설화는 김해 신어사, 합천 해인사에도 전한다)

 

또 칠불사 인근 마을의 명칭인 범왕(凡王)마을과 대비마을도 칠불사가 가야불교의 성지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범왕리라는 명칭은 김수로왕이 칠왕자를 만나기 위하여 임시 궁궐을 짓고 머무른 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또 화개면 정금리의 대비마을(大妃洞)은 허황후가 아들을 만나기 위하여 머물렀다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부도전.

 

 

통광스님은 1940년 하동군 화개면 의신마을에서 태어나, 1959년 범어사에서 덕진(德眞) 여환(如幻)스님을 은사로, 명호(明虛)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1963년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1963년 범어사 강원을 졸업한 스님은 1963년 범어사에서 수선안거이래 10하안거를 성만했다. 1975년 동국대학교 역경연수원을 수료하고, 1975년 탄허스님의 화엄경 역경교열에 참여했으며, 1977년 탄허대종사로부터 강맥을 전수받았다.


1978년부터 1995년까지 칠불사를 복원하고,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제13교구본사 쌍계사 주지를 역임했고, 1998년부터 2012년까지 쌍계사승가대학 강주를 지냈다. 1998년부터 현재까지 칠불사 주지 및 회주 소임을 맡기도 했다.2007년 12월7일부터 2009년 12월6일까지 대한불교 조계종 역경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역서로는 <고봉화상선요·어록>(1993), <초의다선집>(1996), <진감선사대공탑비문>(2005), <證道歌 언기주>(2008) 등이 있다.

 

2013년 9월 6일 입적하셨다.

 

임종게(臨終偈)
生本無生何好生(생본무생하호생)
滅本無滅何惡滅(멸본무멸하오멸)
生滅好惡寂滅處(생멸호오적멸처)
法身光明遍法界(법신광명변법계)


살아도 본래 삶이 없는데 어찌 삶을 좋아 할 것이며
죽어도 본래 죽음이 없는데 어찌 죽음을 싫어 할 것인가
나고 죽음과 싫고 좋음이 적멸한 곳에
법신광명이 법계에 두루하네

 

 

무가당탑 無價堂塔

팔각 대석위에 탑신과 보주를 올렸다.

탑신 하부에는 앙련을 표현하였고 상부 천판에는 복련위에 1단 괴임을 두었다.

보주는 별석으로 화염문 위에 보주를 올렸다.


탑신에 당호를 새겼고

유곽과 9개 유두를 표현한 전형적인 석종형 부도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당호의 주인공의 행적은 전하지 않는다.


 

백암석감탑 栢庵石龕塔(1631~1700)


백암성총栢庵性聰

조선 중기의 고승. 호는 백암(栢庵). 성은 이씨. 남원출신. 13세에 순창 취암사(鷲岩寺)로 출가하였고, 1648년(인조 26) 지리산에 들어 가서 취미수초(翠微守初, 1590~1668) 밑에서 9년 동안 불경을 공부하여 그의 법을 이어받았다. 부휴선수의 정통 계보로서, 태고보우의 9대손이다.


1660년(현종 1)부터 순천 송광사, 낙안 징광사(澄光寺), 하동 쌍계사 등지에서 많은 학승들을 지도하면서 『치문경훈주』(緇門警訓註)를 간행하기도 했다. 1681년(숙종 7) 임자도에 표류 하다가 정박한 배에서 명나라 평림섭(平林葉)이 교간한 『화엄경소초』(華嚴經疏抄)·『대명법수』(大明法數)·『회현기』(會玄記)·『대승기신론기』(大乘起信論記)·『사대사소록』(四大師所錄)·『정토제서』(淨土諸書) 등 190권을 발견하고 1681(숙종 7)년부터 1696년(숙종 22)까지 낙안의 징광사에 머물면서 이들을 5,000개의 판(板)으로 만든 뒤, 인쇄하여 징광사와 쌍계사에 나누어 봉안하였다. 이 가운데서도 『화엄경소초』와 『회현기』의 합본 80권 간행에는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선종과 교종에 두루 통하였을 뿐 아니라 정토문에도 귀의하여 극락왕생을 염원하였다. 또한 그의 참선 공부법은 철저히 임제종의 종지를 따라 후학을 지도하였으며, 유학에도 조예가 깊어서 유학자들의 배불론에 대해서도 철저히 반론하였다. 1700년(숙종 26) 7월에 70세의 나이로 쌍계사 신흥암(神興庵)에서 입적 하였다. 열반에 든 뒤 연일 밤마다 상서로운 빛이 감돌더니, 7일째 되는 날 밤 다비식을 행할 때 그 빛이 확대되어 한줄기 빛이 남북에 뻗치었다고 한다. 그리고 3일이 지나 영골을 수습해 송광사와 칠불사에 나누어 탑을 세우고 봉안하였다.


저서로는 『정토보서(淨土寶書)』1책과 『치문집주(緇門集註)』3권, 『백암집(栢庵集)』2권, 『지험기(持驗記)』1책 등이 있다.

 

 

 

 

 

팔각 대석에 탑신을 올렸다.

특별한 문양은 없으며 2단늬 보주는 별석이다.

탑신에는 감실을 내고 백암석감탑 명문을 새겼다.


 

부도전 뒤편의 비좌

칠불사의 사적을 새긴 사적비로 추정된다.

 

 

부휴대사선수탑 浮休大師善修塔(1543~1615)

 

조선 중기의 고승. 성은 김씨. 호는 부휴(浮休). 남원출신. 아버지는 적산(積山), 어머니는 이씨이다. 어머니가 신승(神僧)으로부터 원주(圓珠)를 받는 태몽을 꾸었으며, 어릴 때부터 비린내를 좋아하지 않았다. 20세에 부모의 허락을 얻어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신명(信明)의 제자가 되었고, 그 뒤 부용 영관(芙蓉 靈觀, 1485~1571)의 밑에서 수도하여 심요(心要)를 얻었다.

 

그 뒤 덕유산·가야산·속리산·금강산 등의 이름있는 사찰에서 더욱 수행정진하다가 서울로 가서 노수신(盧守愼)의 장서를 7년 동안 읽었다. 필법은 왕희지체를 익혔는데, 사명당(四溟堂 )과 함께 당대의 2난(二難)이라 불렸다. 그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 덕유산 초암에 은신하고 있었는데, 왜적 수십명이 몰려와 차수(叉手)하고 서 있는 부휴스님을 칼로 치려고 하였으나 태연부동하였다. 왜적들은 그 모습을 보고 매우 놀라며 기이하게 여겨 절하고 물러갔다.

 

그 뒤 가야산 해인사에 머물고 있을 때 명나라 장수 이종성(李宗城)이 찾아와서 법문을 듣고 감동하여 스님의 법석을 차마 떠날 수가 없어서 며칠 동안 머물다가 떠났다. 얼마 뒤 무주 구천동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어느 날 『원각경(圓覺經)』을 외우고 있을 때 큰 뱀이 나타나서 계단 아래 있었다. 그날 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화상의 설법의 힘을 입사와 고신(苦身)을 여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광해군 때 지리산에 있었는데, 어떤 미친 승려가 무고하여 투옥되었다가 무죄로 판명되었다. 광해군이 내전으로 초빙하여 설법을 청하여 듣고 크게 기뻐하고, 대사에게 가사 등을 보시하였다.


1614년에 조계산에서 지리산 칠불암(七佛庵)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다음 해 7월 제자 각성(覺性)에게 부법(付法)하였다. 그해 11월 1일 목욕을 한 다음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나이 72세, 법랍 57세였다. 저서로는 『부휴당대사집』이 있다.
칠불사 운상선원 앞에 대사의 부도탑이 모셔져 있다.

 

 

부휴대사의 다시(茶詩) 


獨坐深山萬事輕
掩關終日學無生
生涯點檢無餘物
一椀新茶一卷經

깊은 산에 홀로 앉아 있으니 만사가 가볍게 여겨져
문을 걸어 잠그고 온종일 무생을 배우네
내 생애를 점검해 보니 다른 물건 없고
한 사발 햇차와 한 권의 경 뿐이네


 

 

부휴선사부도는

방형지대석, 대석, 탑신과 일석인 상륜으로 되어 있다.

지대석은 후보물로 추정되면 팔각하대석은 면석과 갑석이 일석으로 면석에는 안상을 새겼고 갑석에는 화문을 표현하였다.

중대석과 상대석은 일석으로 중대석을 하대석에 끼웠다. 상대석 면석에는 안상을 표현하고 팔각 모서리에는 2개 연주문을 새겼으며 상하에 괴임을 두었다, 탑신석에는 명문을 새겼고 특별한 문양없이 보주를 올렸다.


 

부휴선사와 인허당부도를 순례하는 길은 녹녹치 않았다.

인적없는 아침 산사.

공양주 보살님은 강원은 출입금지 지역이라 한사코 길을 일러 주지 않아, 쪼구려 앉아 폰으로 인터넷을 수없이 검색하여 등반로 초입을 찾았다. 인허당 부도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부휴선사 부도를 뵙고도 산정상을 향해 30분이상 올라갔으나 뵙지 못하고 내려오는 길에 뭇짐승의 도움으로 뵈었다.

 

알고보면 너무도 쉬운 길인데...

 

 

인허당탑 印虛堂塔

대석위에 탑신고 상륜을 일석으로 조성하였다.

 

 

상륜에는 8개 연화문이 보주를 받쳤으며 모서리에는 용문양을 두었다.

특별한 문양이 없는 탑신에는 인허당 당호를 새겼다.


 

 

 


  

스님의 생몰과 행적은 전하지 않는다,


 

월송당탑 月松堂塔

탑신석외에는 후보물로 보인다.

한국사찰문화재 총람에는 월송당부도로 등재되어 있고

칠불사 홈페이지에는 문수동자의 화현의 설화를 간직한 문수동자탑, 디지털하동문화대전에는 아래 전설의 소년부도로 소개하고 있다.

 

 

소년부도

칠불사를 중건하는 데 마을의 머슴과 스님들이 동원되었다. 일꾼들은 12㎞ 아래 사하촌에서 기와를 지고 험한 산길을 왕복했다. 그때 칠불사 상좌 스님은 여자처럼 예쁘고 마음씨가 고운 소년이었다. 농사철이 되자 일꾼들은 줄어만 갔다. 일손이 부족해지자 절에서는 스님들까지 중건 공사에 나섰고, 이 스님도 일꾼들과 어울려 12㎞ 길을 왕복하며 기왓장을 날랐다. 소년 스님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병중에도 아침 일찍 일어나 맡은 일을 열심히 했다.

세월은 흘러 절은 중건되었지만 소년 스님은 그만 지쳐 쓰러졌다. 헛소리를 하고 열이 올라 하룻밤에도 몇 번이나 정신을 잃었고, 회복될 기미는 없었다. 그런 후 며칠이 지나 세상을 떠났다. 절의 주지와 신도들은 절을 세우면서 희생된 소년 스님을 위해 명복을 비는 뜻에서 정성을 쏟아 탑을 세웠다.


 

초의선사다신탑비草衣禪師茶神塔碑

智異山 玉寶臺아래 七佛禪院은 草衣禪師가 한국의 茶道를 중흥하고자 茶神傳을 초록한 곳으로 綠香茶煙 속에 茶禪一味의 禪風이 서려있는 성지이다. 茶聖 초의선사는 서기 1786년 務安에서 출생하였으며, 속성은 張氏요 법명은 意恂, 자는 中孚이며 초의는 法號이다. 15세에 무안 雲興寺에서 碧峰禪師에게 출가득도하여 敎와 禪을 겸수하고 본 칠불사에서 大隱 錦潭 兩大律師의 계맥을 계승한 禪·敎·律의 대종사이며, 詩·書·畵에도 능하여 당대의 名儒 茶山 丁若鏞과 秋史 金正喜와도 교유를 가진 碩學이다.


신라 興德王 3년 서기 828년 金大廉이 唐나라에서 茶종자를 가져와 왕명으로 화개동에 茶를 심었다. 純祖 28년 서기 1828년에 초의선사가 차의 시배지인 花開洞에 위치한 이 곳 칠불사 아자방에서 참선하는 여가에 萬寶全書에서 茶神傳을 초록하여 東茶頌의 기초를 定立하였다. 다신전은 採茶造茶로부터 茶衛에 이르기까지 총 22항목으로 茶에 관한 모든 것을 一目瞭然하게 서술한 茶人들의 지침서이다. 선사는 東茶頌에서 빼어난 色香氣味를 지닌 우리나라의 茶를 찬미하고 있다. 지리산 전란에 全燒된 七佛寺를 복원하고 이에 茶를 사랑하는 雲水衲子와 善男善女의 원력으로 초의선사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이곳 칠불사에 茶神塔碑를 세워 화개동이 茶道의 성지임을 기리고 나아가 茶禪一如의 풍류가 더욱 진작되어 佛國淨土가 이룩되기를 염원하며 이를 기록하는 바이다.

                        

玉寶臺 아래 亞字房이여
茶道의 성지 花開洞이여
遣唐使 뿌린 씨앗 겨우내 푸른 찻잎
찬 서리 향기 짙은 여린 움 雀舌인양
禪味禪藥을 겸한 茶로 우리 茶가 으뜸일세
천하에 이 좋은 茶 俗手에 버려지니
草衣禪師 茶禪抄錄 茶道의 中興이라
諸法不二 茶禪一如 綠香煙裏 茶 한 잔에
般若峯 흰 구름 섬진강 푸른 물결
초의선사 茶神禪風 길이길이 振作되어
온누리 불국정토 맑은 香氣 농울지리


佛紀 2538年 採茶佳節 穀雨日에
時 七佛寺 住持 霽月通光 撰
如初居士 金膺顯 書
石潭居士 金光烈 刻


 

그 강에 가고 싶다...김용택

그 강에 가고 싶다
사람이 없더라도
강물은 저 홀로 흐르고
사람이 없더라도 강물은 멀리 간다

인자는 나도
애가 타게 무엇을 기다리지 않을 때도 되었다

봄이 되어 꽃이 핀다고
금방 기뻐 웃을 일도 아니고
가을이 되어 잎이 진다고
산에서 눈길을 쉬이 거둘 일도 아니다

강가에서는
그저 물을 볼 일이요
가만가만 다가가서 물 깊이 산이
거기 늘 앉아 있고 이만큼 걸어
항상 물이 거기 흐른다

인자는 강가에 가지 않아도
산은 내 머리맡에 와 앉아 쉬었다가 저 혼자 가고
강물은 때로 나를 따라와 머물다가 멀리 간다

강에 가고 싶다
물이 산을 두고 가지 않고
산 또한 물을 두고 가지 않는다
그 산에 그 강 그 강에 가고 싶다


2016.06.11


*칠불사홈페이지,디지털하동문화대전.함국사찰문화재총람.불교신문사를 참고, 발췌 하였습니다.

728x9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