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하동군

하동...이명산 마애여래좌상

임병기(선과) 2011. 11. 28. 07:21
728x90

 

 

 

하동군 북천면. 면 어디를 가도 코스모스가 지천으로 피어 있다. 더구나 코스모스 매밀 축제를 개최중이어서 조용한 시골 작은 면은 오랫만에 활기를 띠고 있었다. 면소재지를 경유하여 이명산 마애불로 접어드는 경전선 철로변 마을 담벽의 코스모스 마을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그냥 즐겁다.

 

 

 

폐철로를 활용하여  추억 속의 고향역을 떠올리게 조성했다. 나훈아의 고향역 노래가 금방 흘러나올 듯하다. 가사에 등장하는  이뿐이 곱분이는 모두들 대처로 시집가고 없겠지만 저기 미스김 미스리가 있지 않은가.

 

 

 

 

지리산의 작가 이병주 문학관 이정표

 

이병주(李炳注, 1921년 ~1992년)는언론인이며 소설가이다. 호는 나림(那林)이다.하동군 북천면의 이명산 자락에서 태어났다. 매이지 대학 문예과를 졸업하고 와세다 대학 불문과에서 수학했다. 와세다 대학 재학 중전쟁에 학병으로 징집되어 중국 전선에 투입되었다. 종전된 뒤 귀국하여 경남대학교의 전신인 해인대학 교수를 지냈다. 이 대학에 재직 중이던 1953년에 부산일보에 장편 《내일 없는 그날》을 연재하였으나, 정식으로 중앙 문단에 등단하지는 않았다.

 

1965년 중편 소설인 〈소설 알렉산드리아〉로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시작한 이래 《지리산》, 《산하》, 《그해 5월》, 《관부연락선》 등 현대사를 소재로 한 역사 소설을 즐겨 썼다. 선이 굵은 남성적 소설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정식 등단은 늦어졌으나 이후 많은 작품을 집필한 다작 작가이다.

 

권위주의 정부 하에서 금기시된 소재인 이데올로기 문제를 둘러싼 지식인의 고뇌를 앞장서서 다루어, 유신체제 하인 1970년대 중반에는 “이제 이병주를 읽은 사람과 안 읽은 사람으로 나누자”라는 말이 있었을 만큼 영향력이 컸다. 실제로 그의 소설 《그를 버린 여인》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일경력,계획없는 경제정책, 유신하의 인권침해등을 다루고 있다. 고향이자 작품의 주요 무대가 되었던 경남 하동군에는 이병주문학관이, 섬진강변에는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위키백과

 

 

멀리 우측으로  보이는 건물이 문학관이다. 역시 코스모스가 절정이다. 이병주 문학관 주소(www.narim.or.kr)를 가져오니 답사시 참고 바란다.

 

이병주 문학관을 경유하여 길을 따라 직진 후 우측에 위치한 부일청소년 수련원으로 진입하며 주차 후 산길을 오르면 된다. 사진 속의 나뭇가지를 지나면 이정표가 보인다.

 

 

밀가루 반죽을 포갠듯한 모양의 기기묘묘한 바위가 나타나면 마애불이 지척이다.

 

 

"어서오게나"라며 막 일어서려는 듯.

 

 

얼굴과 목까지는 도드라지게 조각하였고, 나머지 몸은 선으로 처리하였는데, 입술을 굳게 다물고 눈까지 지긋이 감고 있는 얼굴의 표정은 명상에 잠긴 모습이다.

 

마애불이 자리한 터는 이명사지로 알려져 있다. 원래는 석굴사원이었지만는 천장이 무너져 내려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으며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어 석굴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석굴은 벽체와 천장이 모두 무너져 원형을 잃었으나, 자연석을 돌담 쌓듯 포개어 쌓아 올린 형태의 다솔사의 보안암 석굴과 비슷한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천연 암벽에 감실속에 마애불을 조각했다. 머리는 소발, 육계는 봉긋하며 둥근 상호는 양감이 풍부하다. 얼굴을 제외한 신체부분은 얕은 선각이 마멸되어 형태가 불분명하다. 수인은 오른손은 들어올리고 왼손은 팔을 구부려 무릎 위에 올려놓은 듯하다. 조성시기는 통일신라시대로 추정한다.

 

 

 

이곳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져 오는데, 『동국여지승람』에 ‘이맹산은 동경(현재의 경주)의 비보산인데, 산정의 못에 용이 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장님이 되어 괴로워하였다. 그래서 그곳에 화철석(火鐵石)을 담궜더니 용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그 뒤부터는 사람들이 장님이 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이 전설은 매우 허무맹랑한 이야기 같지만, 이명산을 동경의 비보산이라고 한 점과 비록 후세에 세워졌으나, 경주 석굴암과 같은 석굴사원이 자리잡았다는 점은 경주와 어떤 관계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점이라서 주목된다...출처/다음

 

2011.10.09

728x9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