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서 서울 답사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교통, 시내 사정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외곽지역의 마애불은 언감생심 꿈도 꿀수 없다고 치부해버린다. 나역시도 그러했지만 이번 서울 뚜벅이 답사 동선을 수립해본 결과 이외로 대중교통을 이용한 답사도 용이함을 알았다.
승가사는 산행 하지 않고도 쉽게 참배 할 수 있었다. 3호선 경복궁역에서 7212버스-서울미술관 석파정 석탑(보도각 백불도 지근이지만 이미 답사했음)-7212버스-승가사앞 하차-도보 5분-승가사 입구 경찰초소-승가사 셔틀버스(매시 정각 출발. 1000원)-참배후 승가사(매시 20분 출발,1000원)
승가사는 756년(경덕왕 15)에 수태스님에 의하여 창거되어다고 전한다. 수태스님은 당나라 고종 때 장안 천복사에서 생불生佛 불리우던 인도 출신의 승가대사僧伽大師의 행적을 듣고 그를 경모하는 뜻에서 절의 이름을 승가사라 하였다. 창건 이야기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3권 한성부 불우佛宇조에 기록되어 있다. 곧 이예라는 사람의 중수기에 있는 말이라고 하면서 최치원의 문집을 보면 “옛날 낭적사狼跡寺스님 수태가 승가대사의 거룩한 행적을 익히 듣고 삼각산 남쪽에 좋은 자리를 정하여 바위를 뚫어 굴을 만들고 돌을 쪼아 형상을 새기니 대사의 어진 모습이 더욱 우리나라에 비추었다. 나라에서 천지의 재변과 홍수와 한발 등의 재난이 있으면 기도를 드려 물리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언제나 효험이 있었다.”라는 내용이 있다.이예가 쓴 이 중수기는 현재 『동문선(東文選)』권64에 그 전문이 전하고 있다. 고려시대 1024년(현종 15)에 지광智光, 성언成彦스님 등에 의하여 중창되었고, 1090년(선종 7)에는 구산사 주지였던 영현領賢스님이 왕명으로 다시 중수하였다. 1099년(숙종 3)에도 영현스님이 재차 중수하였는데, 이 때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왕과 왕비를 모시고 참배하면서 불상을 개금하고 불당을 중수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422년(세종 4)에 왕이 전국의 사찰을 통합, 선교양종으로 나눌 때 선종에 속하게 되었다. 임진왜란을 맞아 절이 크게 소실되었고, 병자화란 때 다시 북한산 일대의 절이 화란을 입으면서 승가사는 자치를 감추게 되었다. 1780년(정조 4)에 성월城月선사가 폐허로 남아 있던 곳에 돌을 고르고 전각을 재건하여 승가사의 법등은 다시 이어져 갔다. 고종 때는 명성황후와 엄상궁의 후원으로 중건하기도 했다. 근대에는 1941년 도공스님이 다시 중수하였고, 비구니 도원스님이 도량을 가꿔 나갔으나 한국전쟁 때 모두 소실되었다. 그러던 것을 1957년 비구니 도명스님이 산신각, 향로각, 동정각, 대방, 요사 등의 불사를 이루어 절을 일신하였다. 1971년에는 상륜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마애석불에 오르는 백팔계단의 대리석 조성을 시작으로 절의 진입로를 확장하고 전기를 가설하는 등 20여 년 동안의 정진을 통해 사세를 확장시켰다. 이렇게 해서 대웅전 중창을 비롯하여 명부전, 영산전, 향로각, 산신각, 동정각, 적묵당, 서래당.대중선방, 일주문 등 현재의 대가람을 형성하게 되었다. 승가사는 창건 이후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에 이르기 까지 여러 차례 왕들이 행차하여 기도드렸고, 그 외에도 조선 초기의 고승 함허涵虛 스님과 조선 후기의 팔도도승통八道都僧統이던 성월(城月) 스님 등도 모두 이곳에서 수행하는 등, 예로부터 기도처로 널리 알려져 왔다. 또한 현재는 비구니 스님들의 선원으로 스님들이 정진하고 있는 적묵당에는 “삼각산제일선원(三角山第一禪院)”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북에는 승가사, 서에는 진관사, 남에는 삼막사, 동에는 불암사라 하여 한양 근교의 명승사찰을 꼽았는데 그중에서도 신라의 고찰로서 참선수도 도량으로 이름 높은 승가사는 고려시대부터 많은 시인 묵객이 승가사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절찬하는 시와 글을 남겨 놓아 그 발자취가 우리에게 이어져 지금도 세상에 회자되고 있어 감명을 새롭게 하고 있다...출처/다음 백과사전 마애여래좌상 뒤편에 진흥왕순수비가 있으며, 비문 판독을 위해 추사 김정희가 승가사에 머물렀다고 전한다.
대웅전에 이르기 전 이국적인 석탑이 눈길을 끌었다.
민족통일기원호국보탑. 1987년에 시작하여 7년 만에 완공되었다. 인도정부로부터 공식적으로 기증 받은 부처님 진신사리 1과, 청옥 와불 1구, 아라한 사리 2과, 패엽경 1질, 무구정광다라니경판 1질, 철제 9층탑 99기, 화엄경 9질 등이 봉안돼 있다.
대웅전 약 1시간 가량의 참배 시간을 고려하여 부처님께 삼배 드리고 바로 약사전으로 향했다.
거북형상의 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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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전 승가대사상 약사전 이전에는 승가굴로 통칭되었으나 세종조에 전각명이 바뀌었다. 즉, 왕비인 소헌왕후의 신병을 고치고자 흥천사, 진관사, 승가사에 신하를 보내어 불공을 드리게 했던 것인데, 영험이 있어 병이 낫자 그 보은으로 절을 중수케 했으며, 이때부터 승가굴이 치병에 효능이 크다 하여 약사전으로 전각의 이름이 바뀌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6권, 세종 4년 5월 4일 경신 1번째기사 1422년 명 영락(永樂) 20년 ○庚申/遣右議政鄭擢于興天寺, 谷山府院君 延嗣宗于僧伽寺, 設藥師精勤。 判左軍都摠制府事李和英于開慶寺, 設觀音精勤。 우의정 정탁(鄭擢)을 흥천사(興天寺), 곡산 부원군(谷山府院君) 연사종(延嗣宗)을 승가사(僧伽寺)에 보내어 약사 정근(藥師精勤)을 배설하고, 판좌군도총제부사(判左軍都摠制府事) 이화영(李和英)을 개경사(開慶寺)에 보내어 관음 정근(觀音精勤)을 배설하였다.
승가대사 (628~710)
승가대사상 인도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추앙받던 승가대사 상이다.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넓은 얼굴,볼륨감이 빈약한 불신,, 통견, 결가부좌상이다. 주형거신광배로 신광,두광은 둥글며, 연꽃무늬를 두르고, 덩굴무늬와 모란꽃 무늬를 둥글게 새겨 넣었다. 거신광의 테두리에는 전체적으로 화염문을 새겼다. 광배 뒷면에는 태평(太平) 4년, 곧 1024년(현종 15)에 지광(智光)스님이 동량이 되고 광유(光儒) 등이 조각했다는 글이 새겨져 있는 상으로 보물 제1000호로 지정되어 있다.
호분 때문인지 광배와 승가대사상의 분위기가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광배에 새겨진 명문으로 조성시기를 1024년로 비정한 것은 광배와 승가상이 동시에 봉안되었다는 가정하에 성립된다. 그렇다면 위의 승가사 사적 내용중에 언드라인 한 최치원 문집에 등장하는 석불상은 어떻게 된 것인가? 최치원의 문집을 보면 “옛날 낭적사狼跡寺스님 수태가 승가대사의 거룩한 행적을 익히 듣고 삼각산 남쪽에 좋은 자리를 정하여 바위를 뚫어 굴을 만들고 돌을 쪼아 형상을 새기니 대사의 어진 모습이 더욱 우리나라에 비추었다. 나라에서 천지의 재변과 홍수와 한발 등의 재난이 있으면 기도를 드려 물리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언제나 효험이 있었다.”
약사전 옆 비좌 탄연스님의 승가굴중수비僧伽窟重修碑 비좌로 추정되고 있다. 승가굴중수비는 1106년 고려중기 서승書僧으로 유명하였던 탄연(坦然 : 1070~1159)이 쓴 삼각산 승가굴僧伽窟의 연혁 및 중수과정에 대하여 기록한 비석으로 동문선에 원문이 전한다. 삼각산 중수 승가굴기(三角山重修僧伽崛記)...동문선 제 64권 이예(李預) 이를테면 강회(康會)는 오왕(吳王)의 궁정에 들어갔고, 도안(道安)은 진제(晉帝)의 수레에 올랐다. 석씨(石氏)의 조(趙)나라에서는 도증(圖澄)이 있었고, 요씨(姚氏)의 진(秦)나라에서는 구마라집(鳩摩羅什)이 있었으니, 이들은 모두 승려 중에서도 가장 걸출한 인물이었다. 양대(梁代)의 보지명공(寶誌明公)은 모두 감화시킨 행적이 기이한 것이 많고, 또한 명성(名聲)도 매우 위대하였다. 그러나 생전과 죽은 뒤에 모든 사람을 제도함이 다름이 없고, 이 땅이나 다른 지방에서 귀의(歸依)하는 정성을 바침이 다르지 않은 사람은, 곧 이씨(李氏)의 당대(唐代)의 승가대사(僧伽大師) 한 분일 것이다. 대사가 세속에서 쓰던 성은 하씨(何氏)인데 서역(西城)의 어느 나라 사람이다. 나이 30에 지팡이를 휘두르고 동쪽으로 당(唐)나라에서 놀았다. 이 때 용삭(龍朔) 초년에 초주(楚州) 용흥사(龍興寺)에 이름을 걸고 있다가, 후에 사주 임회현 신의방(泗州 臨淮縣 信義坊)에 토지를 구하여 표를 세웠다. 그 표의 밑에다 절을 지으려 했는데 그 곳을 파다가 옛날 향적사명기(香積寺銘記)와 금불상 하나를 얻었는데, 불상 위에 보조왕불(普照王佛)이라는 글자가 있었다. 드디어 그 자리에 절을 세웠다. 경룡(景龍) 2년에 중종(中宗) 황제가 사절을 보내어, 대사를 대궐 안에 있는 도량(道場)으로 맞아들여 높여서 국사(國師)로 삼고, 황제와 백관이 제자로서의 예절을 행하고 스승으로 섬기었다. 얼마 후에 천복사(薦福寺)에 나가서 거처하였다. 항상 방 하나에 혼자서 거처하는데 그 정수리 위에 구멍이 있어서 솜으로 막아 두었다가 밤이 되면 솜을 빼버렸다. 그러면 그 정수리 구멍에서 향기가 나와서 연기가 방에 가득하여 특이한 향내를 풍기었다. 새벽에 향기가 다시 정수리 속으로 들어가면 또 솜으로 이를 막아 두었다. 대사가 항상 발을 씻는데 사람이 그 물을 받아 마시면 고질병이라도 모두 나았다. 중종이 하루는 내전(內殿)에서 대사에게 말하기를, “서울에 비가 오지 아니한 것이 수 개월이 되었으니, 바라건대 대사는 자비를 베풀어 나의 고민을 해결해 주시오.” 하였다. 대사가 곧 병에 들어 있는 물을 가지고 널리 뿌렸더니, 별안간 검은 구름이 모이더니, 단비가 많이 왔다. 중종이 크게 기뻐하여 명을 내리어 수리한 절의 이름을 임회사(臨淮寺)라 하였더니, 대사는 ‘보조왕사(普照王寺)’라고 이름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이것은 자기가 얻은 불상 위에 있는 글자대로 하려는 것이었다. 경륭(景龍) 4년 3월 2일에 장안(長安) 천복사(薦福寺)에서 단정하게 앉아서 죽었는데, 얼굴빛이 살아 있는 것과 같았다. 향년(享年) 83세로 서역에서 30년, 중국에 들어와서 52년이었다. 중종은 곧 천복사에 탑을 세우고 시체에 옻칠을 하여 공양하려 하였더니, 별안간 큰바람이 일어나고 냄새가 장안에 가득히 퍼졌다. 중종이 묻기를, “이것이 무슨 좋은 징조냐.” 하니, 측근의 신하가 아뢰기를, “승가대사는 교화를 실시한 인연이 임회(臨淮)에 있기 때문에, 그곳으로 돌아가려 하여 이러한 변을 나타낸 듯합니다.” 하였다. 중종은 잠자코 마음속으로 그렇게 해야겠다 승낙하였더니, 그 냄새가 갑자기 없어지고 잠깐 사이 기이한 향기가 두루 퍼졌다. 곧 그 해 5월에 임회로 보내어 탑을 세우고 공양하였으니, 현재 있는 탑이 그것이다. 중종은 때로 명을 내리어 제자인 혜안(慧岸)ㆍ헤엄(慧儼)ㆍ목의(木义) 세 사람에게 도첩(度牒)을 주고 각기 가사[衣]와 바리때[鉢]를 주어 그의 향화(香火)를 받들게 하였다. 뒤에 만회(萬回)대사에게 묻기를, “승가대사는 어떠한 사람이냐.” 하니, 만회는 말하기를, “이는 관음보살의 화신입니다《법화경(法華經)》에 이르기를, ‘마땅히 비구(比丘)의 몸으로 제도하는 사람은 곧 모두 그대로 나타내어 설법(說法)을 한다.’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하였다. 송대(宋代)에 조산대부(朝散大夫) 장지기(蔣之奇)와 비서(秘書) 저작랑(著作郞)유신(柳紳)과 천수사(天壽寺) 대사(大師) 찬녕(贊寧)이 각기 대사의 전기를 썼고, 중조산거사(中條山居士) 신숭(辛崇)이 편집한 대사의 행장(行狀)이 36개 항목인데, 모두 신령하고 기이한 행적이 있었다. 모두 세상에 간행되었으므로 여기에는 기록하지 않는다. 최치원(崔致遠) 공의 문집을 보면, “옛날 신라 시대에서 낙적사(狼迹寺)의 중 수태(秀台)가 대사의 거룩한 행적을 익히 듣고, 삼각산(三角山) 남쪽에 좋은 장소를 골라 바위를 뚫어 굴을 만들고, 돌을 조각하여 얼굴을 묘사하니 대사의 얼굴이 더욱 우리 나라에 비치었다. 국가에 천지의 재변이 있을 때나 수재나 한재 등 모든 의심스러운 일이 있을 때에, 기도를 올려 이를 물리치면 그 자리에서 응답을 받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사절을 보내어 봄과 가을에 3일씩 재(齋)를 베풀고, 연말에는 아울러 임금의 옷을 바치는 것을 정상적인 규례로 삼았다.” 하였으니, 성인과의 거리가 더욱 멀어졌다는 말을 누가 할 수 있겠는가. 밝으시며 또 인자함을 모두들 감탄하도다. 자식 없는 여자가 절하며 기원하면 곧 훌륭한 아들을 낳으며, 말을 잃은 노인이 정성을 다하여 고하면 바로 잃었던 말을 찾는다. 병든 사람이 애절히 간구하면 병상에서 신음하던 소리가 곧 그치며, 벼슬을 구하는 사람이 간절히 원하면 조정에서 막혔던 벼슬길이 바로 트인다. 소금을 구하면 바닷가의 사람이 구워 가지고 오기도 하며, 갓을 원하면 서울의 여자가 만들어 바친다. 그 밖의 신기한 경험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 태조(太祖)께서 나라를 세우신 뒤에 역대의 임금들이 모두 친히 여기에 와서 예(禮)를 올리셨다. 저 당나라의 아홉 황제가 청량산(淸涼山)에 가서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 귀의한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대안(大安) 6년 선종(宣宗)께서 행차하시어, 굴에 나아가서 재를 올리고 보물을 희사하시어 공경을 극진히 하셨다. 눈을 돌리어 10리를 돌아보니 들보의 채색과 벽의 그림은 먼지가 결어서 시커멓게 되었고, 기왓장의 이음새와 처마의 추녀는 피해를 입어 반쯤 무너졌다. 특별히 귀산사(龜山寺)의 주지(住持)인 선사(禪師)영현(領賢)에게 명하여, 임시로 신혈사(神穴寺)에 거주하면서 다시 수리할 사무를 맡게 하셨다. 영현공은 목수는 옛날 반이(般爾)와 같은 우수한 사람을 선택하고, 재목은 예장(豫章)과 같은 좋은 나무로만 골랐다. 곧 연장을 잡고 날마다 공사를 힘써 시켰다. 석상(石像)은 잘 받들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모신 굴은 단장을 베풀어 화려함이 증가되었다. 부처님이 계시던 녹원(鹿園)과 영취산(靈鷲山)과도 비슷한 듯하였다. 인하여 신에게 명하여 중수(重修)한 데 대한 기(記)를 지으라 하고 미처 나라에 아뢰지 못했었는데, 수창(壽昌) 5년 가을에 우리 임금께서 사무 담당관에게 명하여 거가(車駕)를 준비하시고 왕비(王妃)ㆍ태자(太子) 및 우세승통(祐世僧統)과 양부(兩府)의 여러 관료를 데리고 천여 명의 수행자, 만 필의 기마(騎馬)가 구름이 모인 듯, 안개가 어울리듯 땅에 가득하여 산이 채웠다. 행차가 굴에 도착하여 재(齋)를 베풀고 인하여 백은으로 만든 향그릇과 손에 드는 향로 한 벌 씩과 금강석, 수정으로 만든 염주(念珠) 한 벌씩과 순금제인 띠 한 벌을 금화과(金花果)ㆍ수번(繡幡)ㆍ차[茶]ㆍ향ㆍ의복ㆍ비단 등과 함께 바치시어 귀의(歸依)하시며 공경을 드리는 예절을 나타내시었다. 인하여 선사(禪師)영현(領賢)을 보내어 공사 전체를 감독하여 그 일을 완성하게 하셨다. 영현 선사는 바로 신라 시대에 이 굴의 주지였던 선사(禪師)여철(如哲)이 창건한 신혈사(神穴寺)의 처음 조사(祖師)이며, 왕사(王師)인 자응(子膺)의 법윤(法胤 불가에서 법통을 계승하는 아들)이다. 훌륭하도다. 진리를 숭상하는 조정에서 여기에 복을 심는 터전을 경영하셨으니, 성스러운 태양은 오래도록 빛날 것이며, 인자한 바람은 영원히 퍼지게 되리로다. 가벼운 옷이 돌로 변할지라도 자비스러운 집은 오히려 남아 있을 것이며, 푸른 바다에 먼지가 날릴지라도 공덕의 수풀은 오히려 무성하리로다. 임금께서 이르시기를, “보살의 신통한 조화와 절을 수리한 내력을 마땅히 돌에 새기어 멀리 후세에 전하여 나의 불민(不敏)한 솜씨로도 영원한 아름다움을 누리게 하라.” 하시었다. 내가 재주가 부족하나 요행히 과거에 합격하였고, 다행히 좋은 시대를 만나서 외람되이 문장을 맡은 관료에 뽑혀, 명을 회피할 길이 없어 곧 불가 사찰의 훌륭한 업적을 찬양하였다. 때는 건통(乾統) 6년 병술(丙戌) 10월 일(日) 삼가 기(記)를 적는다.
약사전 앞 탑재 초층탑신석과 상층 옥개석 처럼 보인다. 탑신석은 통돌이며 우주 1개와 양우주를 모각하였다. 옥개석 층급은 3단이며, 낙수면 물매는 깊고, 상부에 1단 탑신괴임을 두었다. 모서리에 현수곡선이 나타나며,옥개석 측면에는 금빛 장식품을 치장한 흔적의 홈이 남아 있다. 탄연스님의 승가굴중수비를 건립한 시기(1106년)와 비슷한 시대 특징을 보이는 석탑으로 승가굴중수와 함께 조성한 석탑 아닐까?
구기동마애여래좌상 108번뇌를 접고 참배드려야 한다.
바위에 얕은 감실을 파고 조성한 고려초기의 대형마애불상이다 팔각의 머릿돌을 끼워 올려 불상을 보호하고 있으며, 소발에 육계가 높고,백호공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방형의 살찐 상호, 가늘게 내려 뜬 눈,코는 오똑하며,입은 다물고 있다. 두 귀는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고, 삼도는 희미하게 나타나 있다. 법의는 우견편단이며, 허리가 날씬한 불신은 당당한 편이지만 각진 어깨, 밋밋한 가슴 등 볼륨감이 떨어진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이다. 무릎은 넓어서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대좌에는 복련과 앙련의 연꽃무늬 조각되어 있다. 대좌로부터 시작되는 광배는 굵은 선으로 조각된 거신광으로 문양은 생략되었다. 마애불 주변에는 보호각을 설치하였던 기둥 홈자국이 남아 있다.
마애불 측면, 인공적으로 조성한 홈이다. 마애부도공?
부도전. 현재 출입이 금지되어 있으며 산신각에서 내려 볼 수 있다. 성월선사城月禪師 탑과 탑비 위 승가사 사적에 언드라인 된 부분의 주인공 성월선사 부도이다. 1780년(정조 4)에 성월城月선사가 폐허로 남아 있던 곳에 돌을 고르고 전각을 재건 탑비에는 조선국정헌대부성월당비명병서朝鮮國 正憲大夫 城月堂 碑銘竝序 가경 찰년 암술 팔월입嘉慶 七年 壬戌 八月日立 명문이 새겨져 있어 1802년 8월에 조성된 성월대사 부도임을 알려준다.
원구형 부도 대좌와 상륜은 결실되었으며 부도공이 드러나 있다. 민족통일기원호국보탑에서 대웅전으로 연결된 데크 아래에 있다.
승가사僧伽寺 - 유원순兪元淳 2016.05.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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