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서울특별시

서울...대원군 별서, 삼층석탑

임병기(선과) 2016. 6. 15.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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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파정 삼층석탑

석탑에 관한 정보는 오래전 이상기교수님의 답사기를 통해서 인지하였으며, 몇년전 현직에 있을 때 서울 출장길에 보도각 백불과 함께 답사 동선에 잡았었다. 하지만 노처녀 시집 가는 날 등창 생긴다더니 내부 수리중으로 발길을 돌려야했었다.

 

달구벌에서 한양 도성 입성이 뭐 그리 쉬운 일인가?

그 염원을 이제야 이루었지만, 비싼 입장료(미술관 관람비 때문인 듯)와 서울미술관 입구에서 무리를 지어 담배를 피우는 요커들의 문제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아차!

오늘은 입장료 반액 할인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일반적인 답사 동선은

서울미술관 으로 입장하여 승강기 이용 3층을 통하여 옥외로 나가 석파정. 삼계동각자.소나무.정자.너럭바위.소수운련암각자삼층석탑. 옥상 야외전시물 순이다. 하지만 정자와 너럭바위, 석파장 뒤편 구름길은 건너 뛰었으며 미술관 관람은 짧은 식견에 들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흥선대원군 별서興宣大院君 別墅

인왕산 북동쪽의 바위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흥선대원군 별서(興宣大院君 別墅)는 본래 조선 철종과 고종 때의 중신(重臣) 김흥근(金興根, 1796∼1870)이 조영해 별장으로 사용한 근대 유적이다. 김흥근이 언제 이곳(당시 삼계동정사로 통칭)을 조영하였는지에 관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일부 문헌을 통해 그 시기를 대략 1837~58년 사이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후일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의 섭정이 시작된 1863년을 전후하여 대원군이 이를 인수, 별서로 사용하게 된다.

 

조선 후기 학자 황현(黃玹)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흥선대원군이 김흥근에게 별서의 매매를 종용하였으나 거절하자 계략을 세워 아들 고종을 이곳에 행차해 묵게 하였고, 임금이 묵고 가신 곳에 신하가 살수 없다하여 김흥근이 이곳을 포기하자 이에 운현궁 소유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별서 인수 후 대원군은 사랑채에서 난을 치는 등 이곳을 예술적 활동을 했던 장소로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종의 행전이나 행궁, 즉 임시거처로도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본래 7채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던 흥선대원군 별서는 오늘날 안채, 사랑채, 별채와 같은 살림채와 석파정(石坡亭) 등 4개 동이 남아 있다. 높은 자리에 위치한 별채의 구성과 별채로 진입하는 협문, 과거에 있었던 꽃담 등은 왕이 묵던 곳으로서 손색없게 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별서들 중 흥선대원군 별서와 같이 안채 이외에 별채를 가지고 있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더불어 현재 남아있는 석파정과 종로구 홍지동으로 이전되어 남아 있는 중국식 별당(석파랑) 역시 흥선대원군 별서의 독특한 특질을 잘 드러내는데, 김흥근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보았던 모습을 이곳에 재현한 듯하다. 흥선대원군 별서는 수려한 건축뿐 아니라 빼어난 산수와 계곡으로 이뤄진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특히 사랑채 서쪽 뜰에 위치한 노송은 서울특별시 지정보호수 제60호로서 유구한 세월동안 이곳과 운명을 함께해 왔다.

흥선대원군 사후에도 대략 50년간 그의 후손들에 의해 관리되어 오다가 한국 전쟁이 시작된 후 콜롬바 어린이집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민간에 이양되어 관리되어왔다. 1974년 석파정이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었고, 현재는 (주)석파문화원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출처/서울미술관 홈페이지

 

 

 

 

 

삼계동 각자 앞 소나무

 

 

 

 

 

 

삼계동三溪洞 각자

흥선대원군 별서의 사랑채 서측 후면 암반에 새겨져 남아 있는 삼계동(三溪洞)이라는 각자는 김흥근이 별서를 지어 이를 경영할 당시 이곳이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 삼계정, 삼계동 산정 등으로 불렸을 것을 추정하게 한다. 이는 소치(小癡) 허련(許鍊)이 집필한 『소치실록(小癡實錄)』과 양의영(梁義永)의 『유북한기(遊北漢記)』 등 일부 문헌들에서도 드러나는데, 부근에 세 갈래의 내가 합쳐져 흘러 삼계동이라 불렀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흥선대원군이 이곳을 소유한 후 별서의 앞산이 모두 바위이므로 자신의 호를 석파(石坡)로 바꾸고, 정자의 이름도 석파정으로 바꾸었다고 한다...출처/서울미술관 홈페이지

 

 

계곡 건너 삼층 석탑

 

 

바위 각자가 눈에 들어 온다.

 

 

소수운렴암 한수옹서증 우인정이시 신축세야巢水雲廉菴 寒水翁書贈 友人定而時 辛丑歲也

별서 초입 사랑채 맞은편에 커다란 암반이 있고, 거기에 “巢水雲廉菴 寒水翁書贈 友人定而時 辛丑歲也(소수운렴암 한수옹서증 우인정이시 신축세야)”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어 김흥근의 별서 조영시기 이전의 모습에 대해 추정하게 한다. ‘물을 품고 구름이 발을 치는 집으로, 한수옹(寒水翁)(권상하權尙夏, 1641∼1721)이 벗 정이(定而)(조정만趙正萬, 1656∼1739)에게 신축(辛丑)(1721, 경종1년)에 글을 써주다’ 라는 뜻의 이 글귀는 매우 운치 있는 시적표현으로 자연을 대하고 노래하는 조선시대 선비의 심성을 느끼게 해준다.

 

조선 숙종 때 문신인 오재(寤齎) 조정만의 별서 조성에 관한 기록은 따로 전해지지 않으므로 더 이상 고증된 자료는 없지만, 이 암각을 통해 현재의 위치에 18세기 초 또는 그 이전부터 별서가 조성되어 경영되고 있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출처/서울미술관 홈페이지

 

 

소수운렴암巢水雲廉菴

물을 품고 구름이 발을 치는 집

 

 

한수옹서증 우인정이시 신축세야友人定而時 辛丑歲也

한수옹(寒水翁)(권상하權尙夏, 1641∼1721)이 벗 정이(定而)(조정만趙正萬, 1656∼1739)에게 신축(辛丑)(1721, 경종1년)에 글을 써주다

 

 

 

황강영당(제천.2014년 8월 촬영)

정면 2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집이다. 처마 밑에는 송시열이 쓴 것으로 전하는 한수재와 황강영당黃江影堂의 편액이 걸려 있다. 건물 구조는 자연석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그 위에 방형 기둥을 세웠다. 송시열. 권상하 한원진 권욱 윤봉구 등 5현의 영정을 모셨다.

 

 

권상하(1641∼1721)영정(황강영당.2014년 8월 촬영)

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이은 노론 계열로, 인물성이론을 지지하는 호론의 입장을 취했다. 본관은 안동. 자는 치도, 호는 수암·한수재. 아버지는 집의를 지낸 격(格)이다. 할아버지 성원에게 배우다가 10세 때 사림파의 거두 유계를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1661년(현종 2) 진사가 되었으며, 1663년에는 송시열을, 2년 뒤에는 송준길(宋浚吉)을 만나 두 사람을 스승으로 학문에 몰두했다. 이단하(李端夏)·박세채(朴世采)·김창협(金昌協) 등과 사귀었다.

 

1659년에 있었던 자의대비 복제문제로 1674년(숙종 즉위) 송시열이 덕원으로 유배되자,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청풍에서 학문에 힘썼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송시열이 정읍에서 사사되었을 때 유품을 받고, 그 유언에 따라 괴산 화양동에 만동묘(명나라 신종과 의종을 제향)를 세웠으며, 숙종의 뜻을 받들어 대보단을 세웠다. 1703년 찬선, 이듬해 호조참판에 이어 1716년까지 13년간 해마다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한편 1715년(숙종 41) 가례원류 사건에 연루되어 소론의 공격을 받아 파직당했다. 이 사건은 '회니시비'에 뿌리를 둔 노론·소론 간의 갈등이 이 책의 저작권을 둘러싸고 표면화된 것이었다. 노론이 다시 집권하면서 우의정을 비롯해 여러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사양했다.

 

정이 조정만定而 趙正萬, 1656∼1739)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정이(定而), 호는 오재(寤齋). 아버지는 합천군수 경망(景望)이며, 어머니는 진주유씨(晉州柳氏)로 식(寔)의 딸이다.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81년(숙종 7) 진사시에 장원하여 성균관유생이 되고, 1694년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이어 공조·호조의 낭관, 제용감·군자감의 판관, 장악원정 등을 지냈다. 지방으로 나가서는 강서현령·평양서윤·광산현감·안악군수, 청송·성천의 부사, 나주·능주·청주·양주·상주의 목사를 지냈다.

 

1722년(경종 2) 신임사화가 일어나자 벽동(碧潼)에 유배되었고, 이어 영변으로 이배되었다가 1725년(영조 1)에 풀려나 수원부사·충청도관찰사·호조참의·호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이때 경연에서 ‘알인욕(遏人慾)·존천리(存天理)’의 설을 반복하여 아뢰니, 임금이 경청하고 호피(虎皮)를 특사하였다.

 

1735년 지돈녕부사·한성부판윤 및 공조·형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기로 이름이 있었고, 경(經)·사(史)·백가서(百家書)에 두루 통하였으며, 시와 서예에도 뛰어났다.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이희조(李喜朝) 등과 친교가 깊었다. 저서로는 『오재집』이 있다.

 

 

신라석탑.

안태고향이 경주 부근으로 알려진 연유로 그렇게 명명된 것 같으며, 수습된 부재를 2012년6월 현 위치로 이전 설치되었다.

 

 

 

삼층석탑

2기단의 삼층석탑이다.

4매 부재로 조성한 하기단은 저석,면석,갑석을 일석으로 조성하였으며 면석에는 2개 탱주와 양우주를 모각하였고 상부에는 2단 탑신괴임을 조출하였다.  상기단 면석은 감입식으로 결구 하였으며 우주 1와 양우주를 표현하였다.4매 부재로 구성된 갑석 하부에는 부연을 두었고 괴임은 2단이다.

 

몸돌과 옥개석은 별석으로 하나의 부재로 구성하였으며 몸돌에는 양우주를 새겼다. 전층 옥개받침은 5매이며 낙수면 물매는 급하지 않다. 모서리의 반전이 보이며 상부에는 각형 2단 괴임을 조출하였다. 상륜에는 노반만 남아 있다.

 

조성시기는 9세기로 추정된다.

 

 

 

기단부

 

 

 

 

 

탑신부

 

 

 

 

 

수조.

조성시기가 궁금하다

 

 

 

 

 

 

석등

조선시대?

 

 

 

 

석등

미술관 옥상에 위치

 

 

 

 

 

동자석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

느긋하게 즐기는 답사가 제격인 장소로 추천하고싶다.

 

나같은

미술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게는 별도의 입장료를 징수는 것은 어떨까?

 

2016.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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